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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miLuna Sep 30. 2023

부끄러움은 나의 몫

핀란드 병원 체험기 

(아직 핀란드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예전 동료가 멀쩡한 사람도 우울증에 빠지게 하는 나라라 말한 적이 있는데 ㅎㅎ 의외로 무탈하게 잘 있습니다.) 


외노자로 핀란드에 살다 보면 절대 익숙해지지가 않고 여전히 이용하기 껄끄러운 게 의료시스템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한국인 교포들 사이에 떠도는 치과 괴담들도 많이 들었던 데다가 이 나라 말을 못 하니 증상을 영어로 설명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또 나름의 예약 시스템과 체계가 있다 보니 한국처럼 쉽게 접근이 가능한 게 아닌지라 소심한 나로서는 소소하게 아픈 것들은 그냥 자연 치유되길 기대하고 내버려두기 십상이다. 다행히 튼튼함을 타고 난지라 나이 들어 움직일 때마다 마디마디 삐걱대는 소리가 나는 거 말고는 이곳에 와서 딱히 크게 아픈 적도 없었다. 병원에 갈 일이 있었던 건 독감/코로나 예방주사 맞을 때, 그리고 두어 번 방광염으로 고생할 때가 전부였는데 그나마도 두 번째에는 병원 앱으로 의사와 챗 상담을 하고 약국에 가서 바로 처방받은 항생제를 받아온 게 전부였다. (한국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핀란드는 공공의료서비스가 잘 되어 있는 편인데, 종이처방전을 따로 출력받지 않고 병원에서 처방을 올리면 어느 약국에서든 확인하고 약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정말 편리하고, 다른 분들의 경험을 들으니 일단 암이나 수술을 요하는 병의 진단을 받으면 개인은 큰 부담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랬던 내가 겨울만 되면 힘이 넘쳐나는 허스키를 겁도 없이 하네스(목줄 대신 몸에 채우는 끈, 개한테는 목이 조이지 않으니 좀 더 쾌적할 수 있다)를 채워 눈길을 산책하다 이놈(시키)이 갑자기 급발진하는 걸 수차례 당하다 보니 왼쪽 팔과 어깨가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팔을 돌릴 때 통증도 있고 뻗기도 힘든 게 어딘가 인대가 늘어나지 않았을까 싶었다 (팔이 아직 붙어 있는 게 기적이다). 몇 달 동안 시원한 쿨링 로션만 좀 바르며 버텼는데, 물리치료를 한 번 받아볼까 싶어 용기를 내고 앱에 들어가 장소와 물리치료사 시간당 단가를 보고 예약을 마쳤다. 예약한 날에 내심 물리치료사가 해 주시는 시원한 마사지나, 마사지가 아니더래도 고주파/저주파 치료기에 널브러져 한숨 자는 걸 기대하고 방문했다.  


아... 나의 기대는 얼마나 어리석었던지... 키가 엄청 큰 젊은 남자 물리치료사 분께서는 설명을 듣자마자 상의 탈의를 하라 하셨다. 음 그래... 치료 목적이니 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부끄러운 거야라고 속으로 나 자신을 다독이며 후드티를 벗고 브라만 착용한 채 물리치료사의 지시에 따라 거울 앞에 섰다. 으악. 그날따라 난 나의 가슴보다 두 배는 커서 따로 붕 떠있는 뽕브라를 착용하고 있었다. 거울 앞에 서니 울룩불룩 몸선은 또 어찌나 부끄러운지. 물리치료사는 동작 몇 개를 주문하고 유심히 관찰하더니 침대에 눕게 하고 팔이 뒤로 기울어지는 각도를 쟀다. 그런 다음 몇 가지 동작을 알려주고 고무밴드로 끌어당기는 운동을 해보게 했다. 그리고 나선 또 눕게 해서 각도를 쟀다. (음.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한참을 혼자서만 부끄러워한 시간을 보내고, 총 예약한 시간 45분 중 30분 정도 지나고 나니, 물리치료사분은 이런 불편함은 운동으로 충분히 되돌릴 수 있다며 운동처방을 해 주시겠다며 운동 방법이 적힌 종이를 출력해 줬다. 영수증을 받고 나니 120유로.. 왓??? (45분 중 30분만 썼으니 할인 안 해 주시나요? 속으로만 불평하며 이 돈으로 차라리 마사지나 받을걸 후회했다.) 

<<물리치료사분들의 정확한 처방과 좀 더 장기적인 관점의 운동 처방 존중합니다 ^^>>


이런 부끄러움을 경험했던 2탄이 바로 이어 있었는데, 이번엔 자궁경부암 검사... 5년마다 여성에게 제공되는 찐 공공의료 서비스다. 어차피 한국 가면 건강검진을 할 거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지만 나도 그동안 냈던 세금혜택 좀 받아보자며 호기롭게 예약을 하고 방문하였다. 가기 전에 이곳의 산부인과는 또 얼마나 치욕스러울지 감이 안 와서 이곳에 오래 살고 계신 한국분께 슬쩍 카톡을 보냈다. 여기선 쌩으로 벗고 검사하나요? ㅋㅋ 잘 기억은 안 나시지만 치마 같은 건 따로 안 준 걸로 기억하신다고... 걱정을 가득 안고 방문한 병원 검진실에 가니 여의사분께서 저쪽에 가서 하의 탈의를 하고 오라고 안내해 주셨다. 치마를 입고 가면 입은 채로 검사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치마를 입고 갔으나 굳이 왜 걸리적거리게? ㅎㅎㅎ 정말 티셔츠만 입고 자연인의 모습으로 줄래 줄래 굴욕침대에 올라갔다. 금방 끝나기도 했고 뭐 사실 한국 산부인과에서 주는 치마도 앞뒤 터져있어서 마음의 안정을 주는 거 말곤 실제 가리는 것도 없다고 한참을 나 자신을 다독였다. 아 쌩으로 이렇게 하는 검사하는 거 너무 해방(liberation)이다. ㅋㅋㅋㅋ 

하지만 이곳에 살면서 산부인과 검진을 다시 가고 싶지는 않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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