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몰입과 딴생각 ep.2 - 잔나비 [환상의나라] 앨범을 듣고,
환상의 나라로 떠나는 40여분 간의 음악 여행
딱 세상이 너그러웠던 만큼 아팠어. 아니 사실 너무 아플 것 같아서 그대로 뒀어. 이제 내가 믿어왔던 그 모든 것들, 난 환상이었다 부를 수 있어. 그러면서도 또 믿어볼래. 그것들을 환상이라고 그렇게 부르기까지의 그 시간들을.
누가 요즘 노래를 앨범 채로 듣나요?
저요! 잔나비 세 번째 정규 앨범 '<환상의 나라>: 지오르보 대장과 구닥다리 영웅들' 앨범 리뷰
앨범 소개
환상의 나라로 오세요.
꽝꽝 짖어대는 까만 밤과 너그러운 밤이 함께 사는 곳.
아침 새소리가 반짝이다 이내 뒤엉켜버리는 곳.
내가 찾던 것은 내가 찾는 곳엔 없음을 기어코 알게 되는 곳.
그렇게 지나간 이야기만 줄창 흐르는 곳.
'눈을 감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숨에 즐겨보세요!'라는 최정훈의 앨범 소개글처럼, <환상의 나라>는 각 트랙 순서에 따라 나름의 서사를 담고 있는 앨범이다. 더군다나 각 트랙의 앞뒤를 연결시켜주는 사운드를 삽입함으로써 13곡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는 하나의 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을 준다. 앨범 제목만큼이나 환상적인 분위기에 동화적인 노랫말을 담았으니, 함께 공개한 각 트랙의 아트 워크와 같이 감상해 보자.
1. 환상의 나라 밟히우면 또 꿈틀대는 촌스러운 이 생명들과 고요한 우리의 밤
Track 1은 환상의 나라로 가기 위한 '초대장'같은 곡이다. 신비롭게 말을 거는 듯한 멜로디와 마치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웅장한 간주. 가사와 아트 워크를 보면 '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노래 끝에서는 어느새 '새로운 세계'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이 아침의 새소리가 들린다.
2. 용맹한 발걸음이여 그토록 찾아 헤맨 무지개 닿을 수 없을 거야 우리 알고 있었대도 말하지 않았음은
Track 1과 연결되는 사운드로 밝은 아침의 새소리로 시작하는 Track 2는 '낡고 헤진 성실에 대한 찬가'라고 한다. 성실이면 성실이고, 찬가면 찬가지. 왜 굳이 '낡고 헤진'이란 수식어가 붙었을까 생각했는데 가사에는 성실에서 오는 '서글픔'이 한 방울 묻어있는 느낌이랄까. 그토록 찾아 헤맨 무지개에 닿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말하지 않았다는 의미. 그럼에도 끝까지 발 굴러야 하는 이 '씩씩한 노래'는 오늘 하루도 시작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파이팅 같다.
3. 비틀파워! 뭐가 뭔지 모르겠을 땐 텔레비전 셀레브리티 더 프라이스 이즈 저스트 원 핑거 나는 거뜬해요
잔나비 특유의 마냥 신나는 락 사운드 곡인 것 같지만, 사실 '비틀즈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느낀 자조적인 반성과 음악적 회고를 담고 있다. 'to the topper most of the popper most!'란 비틀즈의 외침에 '우리도 일단 위로 올라가고 보자. 유명해지고 보자!' 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 이는 트랙 아트에서 엿볼 수 있다. 손가락 하나가 없는 손바닥에 적힌 문구 'River man lives by the river. Ocean man lives by the sea' 결국 '음악인은 음악을 하며 살면 된다'는 나름의 깨달음을 비틀즈에게 '나 이제 알아요!'하고 말하는 것 같아 왠지 모를 씁쓸함도 함께 느낀 곡이다.
4. 고백극장 우정은 처절했지 살아남아야만 했으니
Track 3와 이어지는 박수 소리로 시작하는 고백극장은 우정과 사랑에 대한 곡이다. 사실 단어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워야 할 감정이지만, 모두 '좋을 때'의 얘기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힘을 주고, 편안한 위로가 되어야 할 감정이 '생존'과 '쟁취'가 되었을 땐 오직 '외로움' 뿐이다. 아트워크에서도 우뚝 혼자서 나 외로웠노라 고백하는 것처럼 처절하고 치열했던 인간의 관계성을 다룬 곡.
5. 로맨스의 왕 때마침 비가 내리고 낯익은 음악이 흐르고 다들 춤을 추는데 마주 보며 멋쩍게 웃던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유명 로맨스 영화에 나올 법한 사랑을 꿈꿔봤을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같은 사랑을. 하지만 현실은 늘 영화와는 다르기에 '때마침 비가 내리고 낯익은 음악이 흐르는' 끝내주게 로맨틱한 상황에서도 머뭇거리게 되는 그런 감정을 곡은 표현하고 있다. 꼭 사랑이 아니라 '기쁨', '슬픔', '미안함' 등 내가 생각하는 기준치에 내 감정이 따라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냥 솔직한 게 역시 답인 걸까. '다들 춤을 추는데 마주 보며 멋쩍게 웃던 우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영화의 한 장면으로 그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6. 페어웰 투 암스! + 요람송가 신음하는 친구여 자신 있게 고갤 떨궈라
백기를 든 성으로 향하는 무수한 사람들과 뒤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소년들의 모습은 마치 아직 나는 투항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시 한 편을 읽는 듯한 가사와 뮤지컬적인 장르 변주가 돋보이는 이 곡은 헤밍웨이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의 제목을 따왔다. 삶에 적응해가는 친구들의 모습을 낭만주의적 세계관으로 '투항'이라 부르기로 했다는데, 백기든 뭐든 요즘은 살아있음, 살아가고 있음 뭐 됐지 않나 싶다. 어쨌든 멋진 투항을 한 친구들의 행복을 비는 노래!
7. 소년 클레이 피전 소년 클레이 피전 분칠한 광대여 뽀얀 그 얼굴에 눈물이 겹치면
Track 6가 한 편의 뮤지컬 느낌이었다면, Track 7은 새로운 서막을 알리는 작은 노래 같았다. 하늘의 별이 될 줄 알았던 소년은 빵! 총성 하나에 떨어지고, 그 얼굴에 눈물이 겹치면 살아계신 소년의 아버진 독한 술 한 잔에 유언을 고친다는 노랫말. 클레이 피전은 사격 용어로 공중에 던져 올리는 원반 과녁을 뜻한다고 하는데, 신이 나서 날았던 거에 비해 아무렇지 않게 깨지고 죽어버릴 수 있다는 건 너무 슬프지 않나 싶다.
8. 누구를 위한 노래였던가 이겨내려던 그 비바람도 덤빈 적 없다 하고
'시간이 째깍째깍 위선을 부리니, 나는 이제 아팠던 일도 추억이라 부를 수 있어요. 맞아요. 그게 더 슬프네요.' 개인적으로 취향인 노래. 모차르트의 '황금별'을 떠올리게 하는 전주는 듣고 있으면 굉장히 슬픈 뮤지컬 한 장면이 상상된다. 허무한 듯이 읊조리는 노랫말과 단순하지만 점점 고조되는 멜로디. 2:40초부터 시작되는 연주까지. 아팠던 기억을 꺼내고, 노래로 쓸고, 또 부를 수 있다는 것에 희망적인 노래다.
9. 밤의 공원 초록을 거머쥔 우리는 여름으로!
노래 제목만큼이나 여름밤과 굉장히 잘 어울리는 노래이다. 어쩔 땐 힘차고, 또 어쩔 땐 부드러운 멜로디의 변화가 여름, 밤, 공원이라는 계절감과 공간감을 잘 반영하는 것 같다. 밤 산책을 불러일으키는 마법의 노래!
10. 외딴 섬 로맨틱 그래 넌 두 눈으로 꼭 봐야만 믿잖아 기꺼이 함께 가주지
앨범 타이틀인 이유를 알 것 같은 참 아름다운 노래. 개인적 취향으로는 항상 타이틀보다 다른 트랙의 곡이 더 좋지만, 이번 앨범 중 가장 아름다운 가사를 가지고 있는 노래임에는 틀림없다. 때마침 노을빛이 아름답더니 캄캄한 밤이 오고, 바다 한가운데서 맞는 밤은 무서울 법도 하지만 이대로 더 길 잃어도 좋다고 한다. 또 거긴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두 눈으로 꼭 봐야만 믿는 너를 위해 기꺼이 함께 가준다. 먼 훗날 그 언젠가 돌아가자고 말하면 너는 웃다 고갤 끄덕여주면 된다고. 무한한 사랑과 응원, 그리고 믿음이 담긴 곡이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
11. 블루버드, 스프레드 유어 윙스! 짙은 어둠의 그 바다가 날 삼키면 나는 또 울어볼래
이 곡은 원래 '외딴 섬 로맨틱'에 붙어있는 아웃트로였다고 한다. 그래 어쩐지 삽화가 없더라! 아마 이 노래가 아웃트로로 붙어 나왔다면 나의 최애 트랙은 '외딴 섬 로맨틱'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바다가 날 삼켜도 아무 걱정 없다는 느낌의 희망찬 노래에 날개를 펼치고 힘차게 날아보자!
12. 굿바이 환상의 나라 그 촌스러운 은유를 벗겨내는 고통은 그래
'딱 세상이 너그러웠던 만큼 아팠어. 아니 사실 너무 아플 것 같아서 그대로 뒀어.' 이번 앨범은 쉽고 가볍게 들을 수 있는 곡들은 아니었다. 정말 수많은 '은유'가 가득했다고 느꼈고, 이 가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여러 번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은유를 이제 벗겨내야 한다는, 환상의 나라의 여행을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편지 같았달까.
13. 컴백홈 우린 돌아갈 거야 Come Back Home
집에 가자! 길고 먼 여행에 조금은 지쳤고, 피곤하지만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에 힘을 내보는 듯한 느낌의 곡이다. '내 사랑 그대 외로이 지새운 밤들을 기억하오 오늘 밤 그대 품 안에 날 안겨 드리리'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에 가능한 컴백홈!
리뷰 끝.
사실 마지막 '컴백홈'을 들으면서는 콘서트에서 마지막쯤의 곡으로 이 노랠 준비했다는 잔나비를 상상했다. 팬들은 야유를 보내며 싫다 하고. 코로나 끝나고 얼른 어디에서든 모두가 컴백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