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hwan Sep 07. 2020

평범한 삶

대체 뭔데요?

프라하에서 만난 P 씨에게 연락이 왔다. 한국에 돌아왔으니 밥 한 끼 하자고. 다음 날 저녁 그와 수원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그는 여행 전후로 일어난 신변에 관한 이야기를 한참이나 풀면서 자신의 이름에 있는 한자 때문에 평범한 삶을 살기 어렵다고 말했다. 자신뿐 아니라 그 한자를 이름으로 쓰는 사람들 모두 그렇다고 했다. 나로서는 꽤 신박한 해석이었다. 대체 평범한 삶이란 무엇이기에. 


그가 예로 든 평범하지 않은 삶이란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하거나, 집에 차압 딱지가 붙거나, 성인이 되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거나, 부모님 뜻을 어기고 새 직업을 갖는 일 같은 것이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다섯 살쯤 많았는데,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을 못한 것" 또한 자신의 삶이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기준대로라면 내 삶도 그리 평범하진 않다. 위에서 언급한 일들은 분명 좀 슬프거나 아쉽거나 힘든 일이지만 그런 일 한번 겪지 않고 성장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그런 세월 겪지 않고 지난 사람이 더 비범해 보인다. 그래서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렵다'는 말이 나온 걸까. 


누군가의 삶을 평범과 비범으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에는 '표준화'된 삶이 존재한다. 내가 그런 삶의 경로에서 이탈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그러니까 꽤나 오래전부터) 이 나라에서 표준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꽤나 진지하게 생각해왔다. 표준의 기준은 거의 나이와 성별에 맞춰져 있다. 여자의 경우 열아홉 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에 대학에 입학해 이십 대 중반 취업을 하고 이십 대 후반 혹은 삼십 대 초반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 이 경로대로 인생을 살아왔다면 "지금 삼십 대 중반이시니 과장 명함 다셨겠군요" "아이가 두 살 정도 됐나요?" 하는 질문에 수월하게 답할 수 있겠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의 삶이 이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친구를 보면서 '내 삶은 어디까지 와 있나'를 잰다. 친구가 휴학 한 번 안 하고 졸업해서 취업했을 때, 긴 연애를 끝내고 결혼을 할 때, 한참을 육아에 전념하다 아이가 돌을 넘기자 복직을 한다고 했을 때도 그랬다. 친구의 삶을 기준점 삼아 내 삶은 얼마만큼 벗어나 있나를 가늠했다. 그리고 가끔은 불안하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비교당해야 한다는 사실, 영영 그 기준점에 당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에.


그렇다고 친구의 삶이 P 씨가 말하는 평범한 삶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친구는 남들에게 평범하다고 불리는 그 삶을 지켜내기 위해서 치열하게 노력한다.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그 안에서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며 나보다 훨씬 크게 성장했고 어른이라 불려 마땅하다. 친구가 남편과 아이와 소소한 기쁨을 누리는 걸 보면서 나에겐 저런 행복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렇다고 내 행복이 친구의 행복보다 작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이런 삶을 선택했을 뿐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동양인, 유럽의 이방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