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보다는 제목이 오래 남는 책들이 있다. 눅눅한 우울의 터널을 지나 잠시 빛 속에 머물 때는 백수린 작가님의 에세이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이 떠오르고, 모처럼 쾌적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에는 모리미 토미히코 작가님의 소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주문처럼 되뇐다.
그런데 후자는, (나는 아가씨가 아닌데도) 너무 자주 되뇌어서 탈이다. 산책을 좋아하지만 일사병에 잘 걸리는 체질 탓에 여름에는 산책량이 압도적으로 적다(그렇다고 추위에 강한 것은 또 아니라 겨울에는 동면에 들어간 뱀처럼 흙 색 이불속에 똬리를 틀고 파묻혀 지낸다). 도쿄의 여름날은 해가 지면 그래도 걸을 만해 지는데, 술을 마시면 억눌렸던 산책 욕구가 폭발하는지 꼭 두세 정거장 전에 내려 걸어오는 것이다(가끔은 내릴 역을 지나쳐 도쿄 전철 여행을 즐기다 돌아오기도 하는데, 이 모든 흔적은 다음날 아침 스이카라는 모바일 교통카드 기록을 보고 확인하는 편이다).
그러다 얼마 전, 일을 내고야 말았다. 위스키를 과음한 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역에서 내려 두 시간쯤 걷는 사이에 집 열쇠가 든 파우치를 흘린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자정을 훌쩍 넘긴 뒤 집 앞에 도착해 알아차리고 만다. 문 너머에 익숙한 내 방, 은신처와 같은 침대, 그리고 심지어 스페어키까지 있는데 들어갈 수 없는 막막함이란. 창문을 통해 침입해볼까 싶어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원망스럽게도 아침의 내가 꼭 잠가 둔 상태였다. 걸어온 길을 돌아가 보기도 하고, 경찰서에 분실 신고를 하며 몇 시간을 더 허비하다 일단은 집에 들어가자 싶어 수리공을 불러 문을 여는 견적을 내어 보니 약 5만 엔.
나 역시 이번 일을 계기로 정보를 찾다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임대 맨션의 경우 함부로 사설 업체를 통해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마스터 키와 보험 가입 여부에 따라서는 무료로 처리될 가능성이 있기에, 자신의 지갑 사정을 위해서라도 관리 회사에 연락하는 편이 좋다. 다만, 내가 계약한 관리회사의 영업시간은 오전 10시부터였는데, 5만 엔을 내고 함부로 시설을 훼손하는 위험 부담을 안기보다 기다리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보내다 몇 통의 전화 끝에 방에 들아온 것은 낮 12시 무렵. 그래도 다행히 보험 적용이 되어 문을 여는 데 비용은 들지 않았지만, 보안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열쇠를 바꾸라는 편이 좋다는 수리공의 말에 마음이 또 조금 착잡해졌다. 정확히는 열쇠 교체 비용 2만 2천엔 탓에.
집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뉘었다. 몸도 지칠 대로 지쳤고, 심적으로도 ‘30대 중반에 한심하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과 ‘이렇게 철없고 허술한 채로 혼자 살아낼 수 있을까’ 싶은 막막함이 휘몰아쳐 아주 오랜만에 소리 내어 울었다. 별거와 이혼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이토록 목놓아 운 적은 없었기에, 아마 이 작은 (그리고 자업자득인) 사건을 핑계로 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었던 마음이 자그맣게 숨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운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는 박준 시인님의 산문집이 있다. 감정을 적절히 표출하는 건 중요하지만, 나는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 쪽이라, 열쇠 교체는 우선 주말이 지나기를 기다려보기로 하고, 몇 시간 뒤에 있을 저녁 약속을 위해 알람을 맞춘 뒤 일단 낮잠을 잤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준비를 마친 뒤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역에 들어서기 직전,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신고한 분실물과 비슷한 파우치를 접수했다는 경찰서의 연락이었다.
덕분에 그날의 사건은, 친구와 기쁨의 맥주를 마시면서 술은 집에서 마시거나, 집까지 데려다주는 사람이랑만 마시라는 잔소리(그래도 끊으라는 말은 안 하는 상냥한 사람)를 듣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지나고 나니 별 것 아닌 에피소드지만, 이 일을 계기로 우울감도 확연히 줄고, 나에게도 남에게도 조금은 더 너그러워질 수 있게 되었다. 자물쇠 여는 비용과 열쇠 교체비로 낼 뻔했던 7만 2천 엔이 0엔이 되었고, 같은 도시에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분실물을 신고해 주는 선량한 시민이 살고 있음을 알았으며, 아무리 일본 치안이 좋다 한들 더한 일을 겪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각과 취기였으니.
결핍은 나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그날 닭발에 맥주를 들이켜며 친구와 나누었다. 생계라는 절대적인 과제가 있어 조금이나마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삶을 살고, 예산이 제한적이니 나에게 진정 만족감을 주는 경험과 물건을 선별해 소비한다. 잠시였지만, 열쇠 분실 사건을 통해 지금보다 더한 결핍을 경험함으로써, 지리멸렬하게만 느껴졌던 일상에 조금은 감사하게 되었다.
그 후로 몇 번의 술자리가 더 있었으나, 위험할 정도로 밤 산책을 즐기는 일은 사라졌다. 효과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덜 추한 40대를 위해서라도 자제력을 기르겠다 다짐한다. 이원하 시인님의 시집 제목인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를 ‘도쿄에서 혼자 살고 술은 (제발) 적당히’로 멋대로 바꿔 쓰고선, 새로운 주문 삼아 나지막이 읊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