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련 소설 <체공녀 강주룡>
컨베이어 벨트에 사람이 끼어 죽었다. 시신은 여기저기로 흩어졌고 수습도 한참이나 지나서 했단다. 너무나 어둡다고 작업장 좀 환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묵살당해 휴대폰 불빛에 의지하고 본인이 구입한 손전등으로 작업을 했단다. 그의 유품에서도 컵라면이 나왔다. 석탄 먼지 가득한 곳에서 주린 배를 컵라면으로 채워가며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홀로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앞을 지켰을 그를 생각하니 눈물이 솟구친다. 그렇게 사람이 또 죽었다. 아주 오래전 일도 아니고 바로 지금 말이다.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김용균 씨의 죽음은 너무나 참혹하고 참담하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자꾸만 질문하게 되는 죽음이다.
왜 세상은 좋아지지 않는 것일까. 왜 노동자들은 여전히 제 목숨을 내건 투쟁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파인텍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다시 시작한 지도 오늘로 406일째, 파인텍 노조 지회장 차광호가 곡기를 끊은 지도 열흘을 훌쩍 넘었다. 단식과 삭발을 넘어서 이제 노동자들은 굴뚝에도 오르고 송전탑에도 오르고 크레인 위에도 오른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해를 넘겨가며 그렇게 버텨내며 목숨을 걸고 싸운다. 얼마나 사람이 더 죽어나가야 세상은 꿈쩍할까.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는 노동자들의 외침이 멈추는 날은 언제인가. 이런 생각 끝에 우리나라 최초로 고공농성을 벌인 여성 노동자 강주룡의 삶을 그린 소설 <체공녀 강주룡>이 떠올랐다.
노동자들이 권리를 되찾기 위해, 살기 위해 하늘로 오르는 일이 비단 요즘의 일만이 아니라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얼마 전 읽은 소설 <체공녀 강주룡> 이야기다. 소설 속 주인공 강주룡은 실제 인물로 1931년 평양 평원 고무 공장 파업을 주동하며 을밀대 지붕에 올라 우리나라 최초로 ‘고공 농성’을 벌였던 여성 노동자이다. 박서련 작가는 옛 신문 기사를 보고 강주룡을 알게 되었고 일하는 여성 영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강주룡의 삶을 소설로 썼다고 한다.
<체공녀 강주룡>은 주룡의 결혼 생활과 이후 노동자로서 거듭나는 삶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주룡이 시집가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스무 살 주룡은 다섯 살이나 어린 최전빈과 결혼을 하지만 최전빈은 독립운동이라는 큰 뜻을 품고 있다. 최전빈은 주룡에게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국가에 살기를 바랍네다. 내손으로 어서 그래하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주룡은 이렇게 말해주는 전빈이 좋아서 독립군 활동에 따라나선다. ‘부부가 된다는 건 동무를 갖는 일이니, 부부가 함께 비밀을 품으면 오히려 정히 돈독해진다는 걸’ 절로 알게 된 것이다. 그 러나 주룡과 전빈은 오래 행복하지 못했다. 사경을 헤매는 전빈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갈라 피를 받아먹게 하지만 전빈은 끝내 살아나지 못했다. 평생을 함께 하리라 생각한 동무를 잃은 주룡은 급기야 남편을 죽인 살인자로 내몰려 시집에서 쫓겨났다. 그런 주룡을 부끄러워하며 농사지을 땅을 위해 돈 많은 늙은 주인에게 주룡을 시집보내려는 친정 아비 때문에 주룡은 간도를 떠나 평양으로 간다.
모단걸이 되고 싶지만 공장 노동자로 살아가는 주룡. 1930년대의 평양공장 여공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매질이 일상다반사였다. 임금안정과 노동자의 인격적인 대우는 바랄 수도 없는 환경이었다. 아이를 낳고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3일 만에 갓난애를 업고 나와 일을 해야만 하는 여성 노동자 삼이도 있다. 아이를 낳아 쉬겠다고 하면 일자릴 잃게 되니 못난 서방이 이혼으로 협박하는 서방에게 차마 아이를 맡길 수 없어 갓난애를 안고 출근한 것이다.
그들은 ‘자라서 무엇이 될지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쳐 주는 이도 없는’ 그런 삶을 살았다. 주룡이 동생 벌 되는 주인집 딸 옥이에게 “앞으로 너는 네가 바라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고 한 말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으리라. 주룡은 달랐다. 파업과 학습에 참여하면서 여직공이나 모단걸이나 다 같은 사람이라는 걸, 노동자의 인격 대우와 유급 출산 휴가는 당연한 권리라는 걸, 내 동무를 위해 죽고자 싸울 것이라며 나서는 주룡. 대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명예로운 일이 없다는 게 으뜸 지식이라는 주룡은 그렇게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곡기를 끊으며 투쟁하다 죽었다.
주룡의 죽음은 비극적이지만 희망을 떠올리게 만든다. “삶이란 사랑하는 이의 손을 맞잡고 함께 싸워나가는 것이란 걸” 확인할 수 있어서 위안이 됐다. 그런데 오늘 김용균 씨의 죽음 앞에선 자꾸만 참담한 기운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함께 손을 맞잡고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아무도 이렇게 죽게 내버려둬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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