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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상수 Jul 06. 2021

신라 왕릉 탐방기 2

#동남산 근방 김씨 왕릉들

신라 건국의 시조 박혁거세를 비롯한 초기 박씨 왕릉들이 밀집되어 있는 서남산 탐방을 마치고 동남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동남산 기슭에 조성된 신라 왕릉은 두 기가 있고 나머지 대부분은 구 산업도로 건너 몇몇 야산 등에 산재해 있다. 이번에는 주로 남산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왕릉들을 탐방하였다.


동남산의 주요 유적들이 몰려 있는 절골, 탑골, 부처골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맨 먼저 헌강왕릉이 나온다. 신라 49대 왕이자 경문왕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헌강왕은 불교와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헌강왕 재임 시절은 나라 안팎으로 큰 분란이 없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하나 국력이 쇠퇴하면서 지배층과 하층민과의 괴리가 깊어지는 시기였다. 헌강왕은 풍수의 대가로 알려진 도선 국사를 흠모하고 국학을 중시하였으며 최치원을 중용하는 한편 처용을 만났다는 일화도 있다. 12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재위 끝에 승하하자 동생이 그 뒤를 이어 정강왕에 오른다.

경문왕의 차남으로 형인 헌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신라 50대 정강왕은 51대 진성여왕의 오빠이자 효공왕의 숙부가 된다. 즉위 1년 만에 병으로 승하하자 보리사 동남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300미터 거리를 두고 있는 헌강왕릉과 비슷한 양식과 크기지만 정강왕릉이 다소 초라한 느낌이 난다. 통일전 바로 옆이긴 하지만 우거진 솔숲을 지나야 정강왕릉을 찾아갈 수 있다.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밑부분을 여러 단으로 쌓아 보호하고 있으며 갑석은 보이지 않는다.

헌강왕릉과 정강왕릉

경주에서 불국사를 지나 울산으로 내려가는 산업도로 인근에 산재한 신라 왕릉들은 대부분 김씨 왕릉이다. 그중에서 가장 남쪽인 내남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경덕왕릉을 찾았다. 새로 생긴 산업도로에서 샛길로 빠져나와 내남초등학교를 지나면 경덕왕릉이 나온다. 신라 35대 경덕왕은 33대 성덕왕의 셋째 아들로 34대 효성왕이 아들이 없어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위에 오른다. 신라 중대 시절에 재임한 경덕왕은 전제 왕권에 대응하는 귀족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개혁을 시도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귀족들과 어느 정도 타협하고 만다. 경덕왕릉 하부에는 왕릉을 보호하는 둘레돌이 설치되어 있고 면석에는 무인의 복장으로 무기를 들고 있는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구 산업도로 아래쪽 외동읍 가기 전 괘릉초등학교 옆에는 원성왕릉이 있다. 신라 38대 왕이자 내물마립간의 12대손인 원성왕은 선덕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김주원과 왕위 다툼 끝에 알천의 물이 불어나 입궐하지 못한 김주원을 제치고 왕위에 추대되었다고 한다. 초기에 괘릉이라고 불려지기도 한 원성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완비된 형태의 왕릉으로 봉분과 전방의 석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봉토를 보호하기 위한 호석(둘레돌)은 면석을 놓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려놓았는데 면석 사이의 탱석에는 경덕왕릉과 같은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의 앞쪽에는 동서로 25미터 간격을 두고 돌사자 두 쌍, 문인석 한 쌍, 무인석 한 쌍과 무덤임을 나타내는 화표석 한 쌍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차례로 늘어서 있다.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 무인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경덕왕릉과 원성왕릉
원성왕릉 앞의 석사자상과 문인석, 무인석, 화표석

원성왕릉에서 산업도로를 따라 올라오다가 불국사 삼거리를 지나면 지금은 폐관이 된 한국광고영상박물관이 보이고 바로 근처에 효소왕릉과 성덕왕릉이 있다. 신라 32대 효소왕은 문무왕의 손자이자 신문왕의 아들로 신라 역대 최연소인 6세에 왕위에 올라 재위 기간 10년 내내 모후인 신목왕후의 섭정을 받았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한 비운의 효소왕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인 성덕왕이 신라 33대 왕이 된다. 박물관 주차장에서 효소왕릉으로 들어가는 길이 지금은 철길로 가로막혀 있어 무단 횡단하는 위험을 무릅써야 넘어갈 수 있다. 

신라 33대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성덕왕 재위 시절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통일신라의 전성기라 할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었고 당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대동강(패강) 이남의 영토를 완전히 인정받기도 했다. 성덕왕릉의 무덤 앞쪽에는 석상이 놓여 있고 주변 네 군데 모서리에는 돌사자가 배치되어 있으며, 석상 앞쪽 양옆으로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각 한 쌍씩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무인석 하나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 하나만 남아 있고, 왕릉 앞쪽 좌측에는 능비가 있는데 비신과 이수는 없어졌으며 현재 목이 부러진 귀부만 남아 있다. 훗날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성덕대왕 신종(일명 에밀레종)이 경주 박물관에 남아 있다. 

효소왕릉과 성덕왕릉
성덕왕릉 주변 돌사자상과 석인, 무인석

효소왕릉과 성덕왕릉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오다가 산업도로에서 빠져나와 철길 건널목을 건너 조금 들어가면 신무왕릉이 나온다. 신라 45대 신무왕은 상대등을 지낸 김균정의 아들로 왕위 계승 투쟁 과정에서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나 반년만에 종기를 앓다가 승하한다. 신무왕릉은 아무런 부대시설이 없는 원형봉토분으로 제형산 서북에서 장사 지냈다는 기록에 따라 신무왕릉으로 전해진다. 

신무왕릉에서 나와 산업도로로 다시 북쪽으로 올라오다가 역시 철길 건널목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효공왕릉이 나온다. 신라 52대 효공왕은 헌강왕의 서자로 51대 진성여왕의 태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오르나 재위 기간 내내 천첩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아 궁예와 견훤에게 수십 개의 성을 빼앗기며 신라 왕실의 권위를 추락시키다가 급기야 말년에는 대신 은영이 천첩들을 죽이며 왕권에 대드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다. 효공왕릉 또한 신무왕릉과 같이 원형봉토분으로 자연석을 사용한 호석 서너 개가 보일 뿐이며 아무런 장식물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무덤으로 일반 민묘보다는 규모가 크다.

신무왕릉과 효공왕릉

경주 남산 동편에 산재한 왕릉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왕릉은 신문왕릉과 선덕여왕릉이다. 신라 31대 신문왕은 문무왕의 장남으로 왕위에 올라 귀족들을 누르고 왕권을 확립하여 중앙 집권을 도모하였으며 9주 5소경을 확립하여 지방 통치 제도를 정비하기도 했다. 한때 달구벌(지금의 대구)로 천도를 도모하였다가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9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태종 무열왕에서부터 시작된 전제 왕권의 확립에 노력하였으며 국학을 설립하여 유교적 정치 이념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신문왕릉의 형태는 무열왕릉에서 한 단계 발전한 형식으로 봉토 밑에 벽돌 모양으로 가공한 돌을 5단 정도로 쌓고 그 위에 갑석을 덮었으며 44개의 삼각형 받침돌이 둘레돌을 튼튼하게 받치고 있다.

신문왕릉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오면 사천왕사지가 있고 그 옆으로 철길 아래 지하통로를 지나 조금 올라가면 선덕여왕릉이 나온다. 신라 27대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장녀로 성골이라는 명분으로 왕위에 오른다. 선덕여왕은 재위 기간 내내 나라 안팎으로 많은 분란이 있었으나 김춘추와 김유신의 도움으로 헤쳐나가기도 했다. 특히 분황사를 짓게 하고 호국 의지를 담은 황룡사 9층 목탑을 축조하였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를 남긴 선덕여왕은 여왕이라는 이유로 당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귀족들로부터도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여근곡의 일화와 죽음에 대한 예언으로 선덕여왕의 예지력이 높이 평가받으며 사후 도리천(낭산의 남쪽)에 묻어 달라는 예언으로도 유명하다. 선덕여왕릉의 외부는 흙으로 덮은 원형봉토분이며 밑둘레에는 자연석으로 단을 쌓아 올려 보호하고 있다. 

신문왕릉과 선덕여왕릉

신라 왕릉의 상당수가 남산 동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왕릉들은 200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지만 아직 신라 왕릉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신라 왕릉이 조성되고 천 년 이상 방치되다가 17세기 중반에 와서야 왕족의 대표 성씨인 박씨와 김씨 문중의 족보가 만들어지면서 여러 가지 역사적 기록들을 참고하여 왕릉의 주인을 정하였기에 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조건인 진정성과 완전성에서 다소 미흡한 게 아닌가 여겨진다. 실제로 신라 왕릉의 비정은 17세기 후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중반까지 진행되었지만 정확하게 일치하는 왕릉은 몇 기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신라 왕릉들의 탐방을 통해 신라 천 년의 역사를 되새기며 최초로 한반도의 통일을 이룬 신라인들의 용기와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Jul 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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