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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담쌤 Oct 06. 2021

[에필로그] 쓰지 않는 시간이 지루해서

 엄청난 ‘덕후’까지는 아니지만 학창시절 내내 소박하게 ‘덕질’을 했다. 학창시절 좋아하던 아이돌이 출연하는 공개 방송을 찾아가고 친구들과 한 멤버의 집 앞에서 기다린 적이 있다. 숙소로 팬레터를 보내고 공연에서 풍선을 흔들며 응원 구호를 외치거나 거의 모든 출연 방송을 찾아보는 일상이었다.


 좋아하던 그룹이 해체했던 때는 학교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운동장 스탠드에서 반별 계주를 응원하던 중 오열하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친구의 표정이 떠오른다. 한 가수를 열렬히 좋아하는 일대기를 소재로 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을 볼 때는 (잘생기고 전교 1등에 나만 좋아하는 소꿉친구와 결혼하는 판타지를 제외하고) 살면서 가장 열정적으로 누군가를 응원했던 날들을 추억했다.  


 직장인이 된 후 몇 가지 취미를 시도했지만 끈기가 부족하여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무언가를 열심히 좋아하지 않아도 일상은 그럭저럭 흘러갔지만 어딘가 조금 허전한 기분으로 지냈다. 30대 초반에 몇 년 동안 질리지 않고 꾸준히 몰입할 수 있는 일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린이책을 쓰는 일이다.     

 

 쌍둥이 남매 하윤이, 하진이를 임신 중일 때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을 두 권 썼다. 출판사에서는 ‘새콤달콤 속담 사전’ 시리즈를 펴낸 직후였고, 내 책은 조금 다른 이름의 사전 시리즈로 출판하자고 했다. 아이들 태명이 ‘알콩이 달콩이’였고 <쇼미더머니> 시리즈의 열혈 시청자였던 나는 “‘새콤달콤’과 라임이 맞으려면 ‘알콩달콩’, 뭐 이런 거요?”라고 그냥 던져보았다.


 의외로 편집자가 무심한 표정으로 괜찮겠다고 해서 엉겁결에 앞에 ‘알콩달콩’이라는 말을 붙여서 책 두 권의 제목이 결정되었다. 개인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제목이다. 그러나 제목이 차지하는 비율이 책 판매의 절반 이상일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지금은 더 좋은 제목이 있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임신 전에도 아동 도서를 쓴 적이 있지만 아이가 생긴 후 새로운 버킷리스트가 생겼다. ‘아이와 함께 내 책 읽기’이다. 풍선처럼 부푼 배를 어루만지고 곧 태어날 아이의 눈코입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하며 책을 썼다. 같이 책을 읽는 풍경을 상상하면서.


 그런데 만삭의 몸으로 너무 열심히 작업했던 것일까. 통증이 느껴져서 병원에 갔더니 자궁문이 많이 열리고 자궁 수축이 심하다고, 오늘 당장 입원을 해서 지켜보자고 했다. 원고 마무리 작업을 남긴 채 병원에 바로 입원했다.      


 당시 신생아 중환자실에는 자리가 없었고 의료 파업을 하던 시기라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아이들이 너무 일찍 나오지 않게 며칠만 더 버티자고 했다. 코로나에 의료 파업까지, 쌍둥이를 출산하기에는 여러모로 복잡하고 심란한 시기였다. 진통이나 수축이 갑자기 심해지지는 않는지 밤새 모니터링을 하면서, 신생아 중환자실에 갈 날짜보다는 하루라도 늦게 아이가 나오길 간절히 소원했다.


 다행히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하는 날짜보다는 이틀 지나서 출산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예정일보다 몇 주나 빠르게 출산을 하여서 아이들은 저체중으로 태어났다. 쌍둥이는 원래 일찍 출산하는 경우가 많지만, 갑자기 출산이 진행된 것이 무리해서 원고 작업을 해서 그런 것 같아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그래도 태교에 좋았다고 생각되는 점은 임신 중에 쓴 책이 감사, 존중, 사랑, 관용, 배려 등 삶에서 소중한 가치들을 소개하는 책이어서 예쁘고 긍정적인 말을 많이 생각하고 접했다는 것이다. 평소 나는 쓸데없는 걱정과 고민을 많이 하여 ‘걱정 인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지만 책을 쓰는 시간에는 걱정하지 않게 된다. 무언가 몰입하는 순간에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잡념이 들어올 틈이 없어서 좋다.


 원래 책 마지막 페이지에 ‘이 책을 읽는 모든 친구, 곧 태어날 알콩이 달콩이가 사랑이 가득한 하루하루를 보내길 바라며’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나의 갑작스러운 출산으로 출판이 늦어져서 ‘곧 태어날 알콩이 달콩이’가 ‘올해 태어난 알콩이 달콩이’로 바뀌어서 책이 나왔다. 아직 돌이 안 된 아기들이라 책을 같이 읽는 것은 어렵다. 내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는 것으로 버킷리스트를 반 정도 이룬 셈이다.     


 난임 기간에는 혹시 몸에 무리가 갈까 걱정이 되어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썼던 글은 업무상 작성하는 공문이나 학생들의 통지표에 쓰는 행동발달특성 의견뿐이었다. 나는 잘 먹고 잘 자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면서 수많은 콘텐츠를 즐겼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콘텐츠를 소비만 하는 일상이 심심했다. 임신한 후 다시 책 작업을 시작하고 온전한 내 글을 쓰게 됐다. 이전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감각을 느꼈다.




 엄마가 된 후 나의 시간은 현저히 줄었는데 오히려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는 더 강해졌다. 온종일 신생아 둘의 밥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옷에는 토한 분유가 묻은 채 샤워할 시간도, 휴대폰 한 번 제대로 들여다볼 시간도 없는 하루. 4시간 이상 통잠을 자지 못하고 아이들이 잘 때 잠깐잠깐 토막잠을 자는 게 다인 생활.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오롯이 나로만 존재하고 싶을 때가 있다.     


 글쓰기는 나를 잃어가는 일상에서 나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이다. 운 좋게 아이 둘이 동시에 잠든 시간은 길어야 한두 시간 정도. 한글 파일을 열어 글을 쓸 때 새벽의 고요함 속에 타닥타닥 기계식 키보드 소리만 명쾌하게 울리는 시간. 그 시간이 행복하고 충만하다. 마치 어릴 적 소풍에서 아껴놓은 초콜릿을 몰래 먹는 기분처럼.


 내가 쓴 책을 읽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표정이 궁금하다. 우리 아이들처럼 각 가정의 보물로 자란 많은 아이들이 책을 읽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런 상상은 마음을 따스하면서도 간질거리게 한다.     

 

 때로는 목 디스크와 허리 통증과 스트레스를 주는 글쓰기이지만, 한 번 쓰는 사람이 되면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자신이 쓴 글이 세상에 나와 책이라는 물성을 가지게 되면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책, 음악, 영화, 공연 모두 정말 좋아하지만 인풋만 쌓이고 나만의 아웃풋을 전혀 내지 않는 시간이 조금 지루했다.


 쓰지 않는 시간이 지루해서, 세상에 조금이라도 의미를 더하고 싶어서, 오늘도 아이들이 자는 새벽에 원고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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