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lix Sep 10. 2023

광기의 스코틀랜드

Wool, 위스키, 골프 그리고 미친 자들이 가득한

 어릴 적 여행기를 읽는 것은 좋아했지만, 성인이 되어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다니면서도 여행기를 쓰는 편은 아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20대 시절에는 남들 다가는 여행지에 가서도 20대가 가질만한 '특별하고, 마이너한 나'에 취해 여행지 구석의 그라피티나 낙서 따위의 사진을 찍어 싸이월드에 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40대가 된 지금은 역시 남들이 다 가서 구경하는데 이유가 있다며 남들 가는 곳만 열심히 가는 데다, 식견도 별 볼 일 없는 내가 고작 며칠 어떤 도시를 둘러봤다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게 가당치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스코틀랜드 방문에서는 여느 여행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변태 같은 경험을 했으므로 스코틀랜드의 여행기가 아닌 인상기를 써볼까 한다.



(좌)항아리 게임, (우)드라마 아웃랜더의 두걸 맥켄지. 단체관광 가이드 아저씨는 딱 이런식으로 생겼다. 에든버러 인구 50만명 중 2만 5천명은 저렇게 생긴 듯 하다.

 에든버러에 간 김에 산구경도할 겸 하이랜드 투어를 신청했다. 투어의 버스기사이자 가이드인 아저씨는 대머리에 근육질로 항아리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와 똑같이 생겼는데, 킬트를 입고 있었음에도 남성미가 넘쳐났다. 역시 스코틀랜드에선 진정한 전사만이 킬트를 입는 듯하다. 스코틀랜드의 상남자는 운전을 시작하자마자 에든버러의 어둡고도 유명한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는데, Burke와 Hare의 이야기였다. Burke와 Hare는 19세기에 무덤에서 시신을 훔쳐 의대에 해부용 시신을 납품하다가 결국 시신을 직접 생산해서 시신장사를 한 것으로 유명한 이들이다.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거 나무위키에서 본 거네'라는 생각과 함께 여행의 시작을 시신장사와 16명의 연쇄살인으로 시작하는 것이 범상치 않다고 느꼈다. 비록 버크와 헤어는 스코티쉬가 아니라 아이리쉬였지만 말이다. 그 이후의 일정에서 가이드는 윌리엄 월레스와 로버트 브루스 그리고 자코바이트 단 3가지의 주제를 되풀이했다. 프리덤!!!! 브레이브 하트!!! 보니 프린스 찰리!!!


 다시 '이거 다 미친놈들이구만'이란 생각이 든 곳은 에든버러 뮤지엄이었다. 과학관과 박물관을 짬뽕시켜 둔 그곳에는 클로로포름의 발명을 스코틀랜드인이 했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클로로포름의 효과를 실험하는 삽화가 가관이었는데, 발명자인 제임스 심슨과 그의 친구들이 집에서 직접 클로로포름을 마시고 쓰러지고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버크가 의대 실습용 시신을 양산하다 사형당한 해가 1828년이고, 심슨이 클로로포름을 발명한 해가 1831년인 것을 보면 그 시기의 스코틀랜드 인들이 의학의 발전에 얼마나 미쳐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역시 위대함은 광기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약간 사람들이 조금 돌아있어야 그 사람들이 사는 도시 역시 매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로로포름의 효과 실험삽화


 내가 고작 19세기의 범죄와 발견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 것이었으면, 이 글을 시작도 안 했을 것이다. 에든버러 성에서 조금 걸어가다 보면 Dean Village라는 그림 같은 마을이 있다. 관광객들이 드나들지만 번잡스럽지 않아 고즈넉한 광경을 즐길 수 있는데, 내 배우자에게 '내가 생각했던 영국의 이미지가 바로 이런 거였어'라고 말하는 순간 상상치도 못했던 광경을 보게 되었다. 대머리 스코틀랜드 남성이 완전한 하의실종 상태로 덜렁거리면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의가 예쁜 라벤더색 티셔츠여서 더욱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가 오는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랬음에도 그는 더 뻔뻔스럽고도 수줍게 "Hi"라고 인사했다.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역시 스코틀랜드는 광기의 스코틀랜드인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변태를 목격한 것에 굴하지 않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는데, 마을의 커피 포차에서 당당하게 커피를 사고 있는 보라셔츠를 또 보고, 천변에서도 또 봤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우리 앞에 서 있던 다른 커플과 눈이 마주쳤는데, 서로 말은 나누지 않았지만 "너네도 봤니?"라는 눈빛을 나눌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가 하고 그를 지나쳤을 때 그의 뒷모습을 슬쩍 보았다. 앙상한 허벅지와 납작한 엉덩이를 보고 B사감의 연극을 훔쳐본 여학생들처럼 그저 안쓰럽게 고개를 흔들며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마을 밖으로 나오는데 경찰차가 급하게 마을로 들어오고 있었다. 광기의 지역이지만 공권력만큼은 건재했다.

Dean Village


 에든버러의 관광상품을 보면, 고스트 투어가 있다. 에든버러 성은 유령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역시 이 동네와 광기가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이자벨 아자니가 미친 여자 연기를 할 때 가장 아름다운 것 처럼 조금 이상한 에든버러는 이상하지만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관광지의 가게들이 한 집 건너 울과 캐시미어 제품을 팔고, 한 집 건너 위스키를 파는 것을 보고 내 배우자가 말했다. "다 니가 좋아하는 거네." 에든버러에 살고있는 배우자의 동료는 또 말한다. "여기는 사람들이 골프를 지나치게 많이 쳐." 양모제품과 위스키가 넘치고, 골프장으로 둘러싸인, 광기가 은은하게 감도는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보다 더 매력적이다. 

작가의 이전글 Butler to the world - 영국의 집사금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