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시절 중급회계를 강의하던 교수님은 수업하다가 딴 길로 새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 수업에서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지식은 방화에 관한 것이었는데, 말인즉슨 전근대 시대에 마을에서 방화가 일어났을 때 동네 홀아비를 조지면 해결된다는 얘기였다. 방화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성불구인 경우가 많다는 프로파일링스러운 첨언까지 곁들여, 후에 숭례문 방화사건이 났을 때 범인이 충동장애가 있다는 기사를 읽고는 교수님이 했던 이야기가 없는 얘기는 아니었던건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키의 '헛간 태우기'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버닝'의 한 장면. CGV아트 하우스
영국의 가을에 접어들며 놀란 것은 사람들이 정말 시도때도없이 불꽃놀이를 한다는 점이다. 한번 시작하면 기본 수십분간 펑펑소리가 들리기에 동네 잔치라도 열렸나 싶었다. 그 중 일부는 동네 잔치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개인들이 동네 파티샵에서 산 폭죽을 터뜨리고 노는 것이었다. 너무 자주, 오래 터뜨리고 놀길래 동네의 큰 불꽃놀이 행사의 예행연습이라도 하는건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동네 사람들은 불꽃놀이에 진심인 듯 했다. 이 동네의 불꽃잔치는 11월 5일에 열렸는데, 몸은 영국 서부의 시골마을에 있지만 마음은 영국 그 어디에도 없는 나 조차도 인스타그램에 뜨는 광고를 보고 동네에서 큰 불꽃놀이가 열린다는 것을 알 정도였다. 처음 광고를 봤을 때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나의 배우자가 회사에서 공짜표를 얻어오면서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나의 신혼집은 마포에 있었다. 비록 여의도 강 건너 산 꼭대기 집이었지만, 앞 단지에 가려져 한화의 불꽃축제가 열리면 소리만 들리는 집이었다. 그래도 집에서 백미터만 가면 한강이라 큰 고생을 안하고 제법 가까이서 불꽃을 구경 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의 두번째 집은 서대문에 있는데, 그 동네에는 아파트 뒷산으로 5분만 올라가면 덜 알려진 불꽃놀이 관람 포인트가 있다. 알음알음 아는 사람들만 100여명이 모여 멀리서 터지는 불꽃을 꽤 잘 구경할 수 있었다. 결혼을 하고 여의도 인근에서 살기 전에는 단연코 그런 행사를 보러 가겠다는 발상조차 한적이 없었다. 나나 배우자나 게으르기 이를데가 없어 고된 노력이 필요한 행사는 절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영국에 오고 이곳의 낮은 인구밀도와 지루한 삶에 익숙해져서 한국에서의 우리의 행태를 잊은 것이었다.
서울 집 뒷동산에서 보이던 한국화약집단의 불꽃쇼
최근에 우리부부는 중고차를 하나 구하면서 나름의 기동력이 생겼다. 공짜표도 생겼겠다, 불꽃놀이가 열리는 장소도 동네에서 5마일밖에 안하겠다, 차 끌고 가서 불 구경이나 하고 오자는 순진한 생각이 들 정도로 영국시골에서의 삶은 너무 지루하고 심심했다. 불꽃놀이는 오후 7시 부터 열렸는데, 집에서 2시간 전 쯤 출발하기로 했다. 불꽃놀이 날 아침에 농담처럼 '여기 시골 사람들도 할 거 없어서, 불꽃놀이도 제레미 클락슨네 가게처럼 줄 서는거 아니야?'라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걸 농담으로 웃어 넘길 것이 아니었다. 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선지 5분만에 추석 귀성길 한국 고속도로의 모습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제레미 클락슨의 가게 앞에 선 줄 보다 더했다. 2시간이 지나도 고속도로를 벗어날 수 없었다. 클락슨네 농장에서 그의 여자친구가 말했듯, 동네 이름이 '셔'로 끝나는 모든 동네의 사람들이 다 불꽃을 보러 몰려온 듯 했다. 우리 부부만 이 곳에서의 삶이 지루했던 것이 아니었다.
Grand tour의 진행자 Jeremy Clarkson이 운영하는 Diddly squat의 개장날 풍경. Daily mail.
교통체증에 지쳐 아이를 노상방뇨시키러 나오는 엄마와 조금이라도 도로에 자리가 생기면 칼치기를 하며 들어오는 차를 보고 한국이나 영국이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구글 지도에서 불꽃놀이 축제의 평점을 봤다. 내가 확인했을 때 8개의 평가가 있었는데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으로 별이 1개 였다. 가족들을, 특히 아이들을 끌고 나왔다가 결국 차를 돌려 집에 돌아가는 분노한 부모들의 평가들이 더욱 처절했다. 구글의 댓글을 보며 우리 부부는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안하던 짓을 하려다 보니 탈이 나는 것이라고. 이미 그 한참 전에 집으로 돌아가자고 결정했지만, 고속도로에서 차를 돌리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내 배우자의 동료들도 다른 차로 불꽃놀이를 보러 가고 있었는데 그들은 존경스럽게도 끝까지 불꽃놀이를 보러갔다. 어땠냐는 내 배우자의 질문에 그들이 대답했다. "Not that impressive." 역시 그냥 집에 오길 잘했다.
분노의 불꽃놀이 평점
간신히 차를 빼서 나오다보니 좁고 어두운 2차선 도로 갓길에는 불꽃놀이를 멀리서라도 보겠다고 차들이 잔뜩 서있었다. 그래도 자식들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부모들의 굳건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살짝 흐려서 하늘에 비단 장막을 친 것 같음에도 하늘에는 별이 쏟아질 듯이 많았다. 이는 늘 불야성을 이루는 서울에서는 누릴 수 없는 호사였다. 내년 여름에 날이 좋은 밤 은하수나 보러가자는 얘기를 하면서 집에 왔다. 어쨌든 우리는 불꽃놀이를 보러간 사람이 아닌, 그냥 고속도로에서 3시간을 보낸 사람이 되었다.
마음이 영국에 없기에, 11월 5일이 영국에서 어떤 날인지 인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가이 포크스 데이라 그 날 전후로 몇 주를 영국사람들이 불장난에 심취한 다는 것을 교민 선배한테 듣고, 검색으로 배웠다. 불꽃놀이 날이 지났는데도 여지껏 사람들이 동네에서도 불꽃을 터뜨리길래 의아해서 알아보게 된 것이다. 이틀 전인 일요일에도 밤 9시가 넘었는데 장장 40분을 폭죽소리에 괴로워했다.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면, 영국 사람들은 그들의 어떤 욕망을 해소하지 못해서 헛간 태우기를 하듯이 불꽃을 터뜨리는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려고 했는데, 연말까지는 괜찮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인도 축제인 디왈리가 끝나서 12월 26일 까지는 폭죽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