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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ix Apr 10. 2022

책 속의 삼촌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접했던 것은 15살 때의 일이다. 아버지 방의 책꽂이에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선이 꽂혀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책꽂이의 책을 가리지 않고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하루키의 단편집은 그때 처음 읽었다. 처음 접하는 일본문학이기도 했다. 하여튼 처음 하루키의 단편선을 읽고 그의 다소 투덜거리는 듯한 말투와 미묘한 지점에서 불평불만이 많은 부분에까지 빠져들게 되었다. 그 뒤에는 아주 초기작을 빼놓곤 웬만한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를 대부분 읽었다.

 

 여배우 박시은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그녀의 지적인 미모뿐만 아니라, 그녀가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말을 어디에선가 봤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은 얄팍한 부분이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누가 좋아하면 그에 대한 호감이 커지기 마련이다. 사춘기부터 20대 초까지의 나의 독서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뺀다는 것은 강치가 도망간 강치 전시관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어쩌다가 일본에 여행을 갔다가 가마쿠라에라도 가게 되면 지나가는 하루키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는 성인으로 자라게 되었다.

  

 나이가 들며 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모래밭에 부은 물처럼 사라지면서 하루키의 장편 신작이 나오면 읽겠다는 각오 역시 증발했다. 마무리가 깔끔한 단편과 담백한 에세이와 달리 하루키의 장편은 올이 풀어진 매듭 같은 경향이 있다. 그 때문에, 그리고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하면 너도 어쩔 도리는 없구나와 같은 얄팍하게 보는 시선 때문에(물론 기욤 뮈소 같은 두더지 똥보다는 부끄럽지 않다.) 어느샌가 부터 하루키의 소설을 멀리하게 되었다. 문학과 소설을 멀리하고 사실과 주장이 가득한 비문학의 탑을 쌓아가는 가운데도 하루키의 잔상은 거대한 심해 동물처럼 내 무의식 어딘가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에 대하여'에 나올 법한 찬란하고 완벽한 최근의 어느 봄날, 나는 랩탑을 고치러 종로 영풍문고 지하의 한 가전제품 수리센터에 갔다. 수리에 걸리는 시간이 꽤 걸린다고 하여,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서점을 둘러보았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난 주말의 서점은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의 도서관처럼 적막했다. 로퍼를 신었음에도 나의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도넛을 튀겨주는 양사나이도, 아름다운 소녀도 없었지만, 서가를 지나갈 때 느끼는 고양감은 충분했다. 나는 적당히 시간을 때울 책을 찾다가 무심코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골라서 다시 수리센터로 내려가 읽기 시작했다.


 에세이집은 90년대 중반 하루키가 연재했던 에세이를 엮은 것인데, 절반쯤 읽다 보니 왜 내가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의 초반까지 하루키에 빠져들어 살았는지를 불현듯 깨달았다. 물론 야구공이 배트에 맞는 소리 따위는 나지 않았다. 하루키는 이를테면, 나에게 있어 책 속의 삼촌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마치, J.M 바스콘셀루스(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작가)가 '햇빛 사냥'(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후속작으로, 그의 사춘기를 다룸)에서 당시의 영화배우 모리스 슈발리에를 상상 속 아저씨로 여겼던 것처럼 말이다.


 나름대로 부족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내 성장기에 주변의 롤모델로 삼을 만한 성인 남성들은 자신들의 취향을 아랫세대와 공유하기에는 팍팍한 삶을 살았다. 부친의 경우 집에서도 전축을 큰 소리로 틀어 클래식과 하드 밥 재즈를 듣는 게 일상이었지만, 당신 자신에게 몰입하는 순간이 중요했기 때문에 당신의 감상을 나누진 않았다. 심심찮게 와인을 사 와서 비교적 어릴 때부터 와인을 얻어먹긴 했지만,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리슬링 와인인 Schloss Vollrads를 유럽 출장 갔을 때 맛있게 먹었는데, 이걸 마트에서 팔아도 하나 사 와봤다던가) 당신의 취향을 추억과 경험에 결부시켜 공유해주지는 않았다. 물려받은 성향인지 나도 테이스트는 있되,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 깊이 있게 고민하고 공유하는 데는 서툴다.


 소설에서 보면 조카에게 낚시라던가, 좋은 시가를 고르는 법 같은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삼촌들이다. 삼촌의 범주를 영어의 uncle로 확대해서 봐도 그렇다. 하지만 내 주변의 아저씨들은 '니 애비의 성질머리 같은 싹수가 보인다며 같이 성당에 다니자고 하는 이모부(참고로 부친과 이모부는 대학시절부터의 막역지우이다.)'라던가, '음대 나온 사촌 여동생의 귀국 발표회까지 수억이 들었다고 한탄하는 외삼촌'이라던가, '결혼식에서 신혼여행지가 어디냐는 질문에 스리랑카라고 대답한 조카가 지 애비(나의 부친이자, 그의 막냇동생인)마냥 실없는 농담이나 하고 있는지 의심하는 큰아버지'이다. 다들 자식들을 둘 이상 낳아서 건실하게 키우느라, 스코틀랜드의 양조장을 돌아다니며 위스키를 음미하는 시간이 넘쳐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아니며, 자신들의 취향을 조카에게 시시콜콜하게 설명해주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전형적인 한국의 아저씨들이다.


 결국, 클래식이나, 재즈나, 술에 대해서는 진짜 아저씨들보다 책 속의 하루키 아저씨가 주절주절 떠드는 것을 통해 배우게 된 것이다. 소설 속의 광고대행사에 다니면서 빨간 컨버터블을 타고 다니며 여자나 꼬시는 다소 불건전한 아저씨(필시, 고 안자이 미즈마루 작가가 모델일 것이다.)나 다소 과묵하고 수줍어 하지만, 잠자는 새끼 고양이를 꺼내오듯 조심스럽게 LP를 꺼내 적당한 음악을 틀어주는 아저씨(무라카미 하루키 본인)를 통해 취향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네가 틀리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을 고수하렴' 같은 이야기를 조근조근해주는 것도 책 속의 하루키 아저씨였다. 아마 하루키의 조카뻘 내지는 자식뻘 되는 사람들 중, 그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그를 '책 속의 삼촌'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이 졸문을 읽다가 어딘가 많이 본 표현과 말투가 느껴진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삼촌을 둔 책 너머의 내 사촌일 것이며, 나는 그에 대해 크나큰 반가움을 가질 것이다. 아무쪼록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책 너머에 있는 수많은 조카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부끄러움보다는 흐뭇한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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