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편의점>
<불편한 편의점>은 기대 없이 봤는데 너무 재밌어서 막 자랑하고 싶은 책이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재밌어야 한다. 지적 자극이든, 긴장감이든,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든, 철학적 사유든, 뭐든지 간에 재밌고 매력이 있어야 한다. <불편한 편의점>은 우선 잘 읽히는 책이다. 그만큼 재밌는 책이다. 책을 잘 읽히게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공감이 안되면 아무리 쉬운 문체라도 안 읽히고 재미없다. 구성도 뛰어나고 글의 맥락과 문체에 숙련도가 있어야 한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표지만 봤을 때는 그저 오락 소설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용도 유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물론 내용이 무겁거나 심각하지는 않다. 가볍고 재밌다. 그러면서 무겁다.
어릴 때는 동네마다 슈퍼마켓이 있었다. 말이 좋아 슈퍼마켓이지 그냥 동네 구멍가게였다. 우리 동네 슈퍼마켓 이름이 아직도 기억난다. 대성슈퍼. 그러고 보니 '대성슈퍼'라는 이름은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동네에 하나쯤은 있었던 슈퍼마켓 이름이다. 프랜차이즈도 아닌 데, 왜 죄다 슈퍼마켓은 '대성슈퍼'였을까? 나중에 크게 성공하라는 뜻에 모두 감동한 걸까? 아니면 '대성'이 대한민국의 기치였을까?
나는 동생 손을 잡고 대성슈퍼에 종종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 갈 때마다 나이가 지긋하신 주인아주머니가 반겨주셨던 기억이 난다.
"아이고, OO네 집 꼬맹이들 왔구나. 오늘은 뭘 사러 왔을까?"
"안녕하세요? 아이스크림 사러 왔어요."
돌이켜보면 돈이 조금 모자를 때에도 아주머니는 아이스크림 2개를 우리 남매의 고사리 같은 손에 꼬옥 쥐어주셨다. 대성슈퍼에는 어린이 할인이란 게 있었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대성슈퍼는 거의 사라졌다. 늙고 병들어 대부분 은퇴했다. 대신 동네마다 편의점이 들어섰다. 편의점에는 정말 없는 게 없다. 과자, 빵, 일회용 도시락에 김밥까지. 게다가 양말에 속옷, 그리고 콘돔도 있다. 대성슈퍼에 없는 것들이 편의점에는 차고 넘쳐난다. 그러나 어린이 할인은 없다. 외상도 없고 우리 집을 속속들이 아시던 아주머니도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편의점은 대한민국 2022년에 무척 잘 어울린다. 편의점이 1980년에 생겼다면 어땠을까? 어린이 할인도 안되고 외상도 안 되는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편의점은 망했을지도 모른다. 손님에게 관심도 없고 어느 집 누구네 자식인지 신경도 안 쓰는 편의점은 1980년의 눈으로 보면 너무 새침하고 깍쟁이 같다.
그러나 2022년의 눈으로 보는 편의점은 편리하다. 나의 익명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나의 신분은 곧 계급으로 나뉘는 사회. 명함에 불안이 걸려 있는 사회에서 자신의 노출은 곧 불편함이다. '대성슈퍼'에서 나는 누구누구의 자식인지 모두가 알고 있으며, 그래서 늘 친절해야 하며, 등이 굽어서도 안된다. 표정은 늘 밝고 명랑해야 하며 공부도 잘해야 한다. 2022년에 그런 '관심'은 곧 '불편함'이다. 익명성의 보장. 2022년에 편의점이 편한 이유이다.
김호연 작가
<불편한 편의점>은 김호연 작가의 무려 5번째 소설이다. 나는 김호연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읽다 보면 박민규 작가가 생각나기도 한다. 사회 약자들의 이야기이고, 약자들이 삶을 이겨내는 방식이 세상의 논리에 순응하거나 전복하는 게 아니라, 각자 나름대로 삶에 대한 소중한 의미를 찾아간다는 면에서 그렇다. 거기에 위트 있고 재밌는 문체는 덤이다. 둘 다 한번 잡으면 순식간에 끝까지 읽게 되는 점도 비슷하다. 두 작가 모두 못생겼다는 점도 닮았다.
물론 당연히 다른 점도 있다. 박민규가 남자답다면, 김호연은 여성스럽다. 음악으로 비유하면 박민규는 약간 찌질 음악의 대명사 장기하와 닮았고, 김호연은 청춘의 아픔을 대변하는 옥상달빛과 닮았다. 나는 소설에도 ost가 있다면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는 장기하의 <느리게 걷자>가, <불편한 편의점>에는 옥상달빛의 <희한한 시대>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불편한 편의점>은 편의점에 드나드는 알바와 손님들, 즉 소시민들의 사연을 소개하는 소설이다. 어느 날 편의점 주인아주머니는 파우치를 잃어버린다. '독고'라 불리는 서울역 노숙자가 우연히 파우치를 찾아준다. 그 인연으로 독고는 편의점에서 심야 시간대에 알바를 하게 된다. 독고는 알콜성 치매를 앓고 있다. 모두 그의 과거가 궁금하지만 '독고' 자신도 기억하지 못한다.
편의점이란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는 곳이고 손님이나 점원이나 예외 없이 머물다 가는 공간이란 걸, 물건이든 돈이든 충전을 하고 떠나는 인간들의 주유소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편의점이 안락한 곳은 아니겠지만 딱히 불편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김호연의 편의점은 왜 불편할까? 'ALWAYS' 편의점이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은 '독고'라는 서울역 노숙인 사내가 야간 알바를 하기 시작할 무렵부터다. 독고가 말을 더듬어서일까? 불친절해서일까? 몸이 느릿느릿해서? 아니면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위화감을 조성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것 때문에 불편한 게 아니다. 독고 씨가 알바 혹은 손님의 삶에 참견하기 때문이다. 옛날의 '대성슈퍼'처럼 대놓고 인생의 훈수를 두는 건 아니다. 약간의 관심만으로도 몹시 불편한 세상 아닌가. 매일 소주 먹는 사내에게 소주 대신 옥수수수염차를 건네며 술을 줄이라고 한다. 새벽에 도시락을 찾는 여자를 위해 따로 도시락을 빼놓는다든가 겨울에 야외 테이블을 이용하는 손님에게 난로를 켜준다. 손님들은 한편 고마운 마음도 있으면서 덩치 큰 사내의 관심이 불편하다. 다른 편의점으로 갈까 하다 집에서 가까워 어쩔 수 없이 'ALWAYS' 편의점을 이용한다.
매일 밤마다 편의점에서 참참참(참라면에 참치김밥에 참이슬)을 먹는 손님, 새벽에 도시락을 먹으러 오는 손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동료 알바 청년, 하루 종일 컴퓨터 게임만 하는 30대 아들을 둔 아주머니. 편의점에 머무는 소시민들의 삶이 소개된다. 모두 나의 이야기 아니면 내 주변의 이야기다. 현대에 누구나 고민하고 안고 살아가는 문제들. 모두 잘 사는 것 같지만 모두 병들어 있는 사람들. 독고 씨는 편의점에 드나드는 손님과 알바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그렇다고 독고의 액션이 큰 건 절대 아니다. 홍반장같은 오지랖과 적극성은 없다. 사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그들의 말을 잘 들어준 것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독고 씨로부터 치유받고 이해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소중한 가치에 대해 다시 돌아본다.
<불편한 편의점>은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나는 편의점을 중심으로 한 소시민들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독고의 과거를 추적하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다뤄진다. 소시민들의 사연은 독자들의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독고에 대한 과거 행적에 대한 추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낸다. 약간 서스펜스와 스릴러가 가미된 감동 휴먼 드라마 느낌이다. 재미와 감동과 궁금증으로 책을 한번 잡으면 끝까지 읽게 만든다. 그만큼 재밌다.
<불편한 편의점>은 표지를 봤을 때 딱! 오락 소설 같은 느낌이다. <심야 식당>이 생각나고, <나미야 잡화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표지를 보면 가벼운 킬링 타임용 정도로 생각된다. 맞다, 킬링 타임용. 무거운 주제도 아니고 어려운 철학적 고찰도 없다.
<불편한 편의점>은 위트 있고 재밌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감동 포인트가 있고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끄는 문체의 매력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편한 편의점>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익명성이 철저히 보장되는 편의점. 사람들은 외롭지만, 이제 혼자가 편한 것이다. 어느새 대성슈퍼는 망했다. 너무 손님 속을 속속들이 알려고 했기 때문일까. 친구, 가족으로부터 외면받거나 스스로 주변을 외면하는 사람들. 점점 자기 자신에게로 침전하는 사람들.
'편의점'이라는 테마가 현대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압축판 같다. 대성슈퍼는 대성하지 못하고 망했지만 우리 주변에는 편의점이 있다. 편의점에는 어린이 할인도 없고 외상도 없지만, 1+1 상품이 있고 참참참(참깨라면, 참치김밥, 참이슬)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도 분명 사람이 있다.
모두가 부동산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가치는 부동산으로 치환된다. 열심히 일하는 것도, 올바르게 사는 것도, 모두 허튼짓이 되어버렸다. 21세기 최고의 가치는 부동산이다. 그 부동산, 즉 돈이 없어 가난한 자들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편의점을 찾는다. 그게 편하니까.
편의점을 찾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는 독고의 행동은 사실 자기 자신을 치유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했던 말은 모두 독고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김호연은 이제 '대성'이 아닌 'Always'를 말한다. 항상성. 삶의 가치가 저 높은 아파트에 걸려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 가치는 항상 내 옆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소설은 독고라는 사내의 과거를 추적하지만, 사실은 현대인이 잃어버린 관계의 소중함을 추적하고 밝혀내고 무릎 꿇리고 있다. 그걸 회복하는 게 행복이라고 말한다.
결국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음을 이제 깨달았다.
<극한직업>의 이병헌은 <기생충>의 봉준호가 될 수 없다. 뒤집어 말하면 봉준호 또한 이병헌이 될 수 없다. 김호연은 톨스토이가 될 수 없다. 톨스토이 역시 절대 김호연이 될 수 없다. 톨스토이의 소설이 위대하다면 김호연의 소설은 친근하다. 소설이 할 수 있는 일, 바로 인간의 이야기를 소설로 담아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불편한 편의점>. 오랜만에 좋은 소설을 만나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