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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방이 Aug 24. 2021

"우리는 평생 배고프다"를 읽고

맛집 에세이

취권 같았다. 시종일관 취해 있다가 뻗은 주먹이 아프지는 않은데 멍 때리고 있으면 아픈, 아니 조금 간지러운 글. 실제로 작가는 종종 막걸리를 마시고 장수막걸리를 마시고 4,900원짜리 이마트 와인을 마신다고 한다.


글에는 확실히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렇다고 김 빠진 사이다는 아니다.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의 해진 양말도 아니다.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부처님 손바닥 같다. 모든 경지를 해탈하면 유머와 위트만 남는다.


책도 내용만큼이나 가볍다. 이렇게 얇고 가벼운 책은 전혀 부담이 없다. 완벽하다. 작가는 두꺼웠으면 독자들이 지루했을 걸 알고 일부러 이렇게 얇게 편집했다고 한다. 완벽하다.


글을 읽고 있으면 무장해제가 된다. 점점 녹아든다. 녹는다는 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물아일체가 되는 것을 뜻한다. 장판과 나는 한 몸이 되고, 믹스커피가 되고 연기가 된다. 책과 책을 읽는 내가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가 단 한 번의 피식 웃음소리가 된다.


지은이 수박와구와구와 디자이너 이태원댄싱머신과 출판사 지적인사과사적인수박은 모두 동일 인물이었다. 처음부터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물증이 없었다. 작가 수박와구와구씨는 스타벅스에서 녹차와 두유가 든 거품 많은 음료를 핸드폰 앱으로 주문하고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 두근거린다고 한다. "이태원댄싱머님" 그래서 알았다! 야호! 찾았다, 물증! 이름이 길어서 스타벅스 앱에 이름이 6글자까지만 들어간다는 사실도.


고백건대 나는 이태원댄싱머신씨의 글이 좋다. 무엇보다 위트가 있다. 1918년에 태어나 "사랑하는 나의 문방구"라는 책을 낸 '구시다 마고이치'씨가 떠오른다. 아니 그보다 더 훌륭하다. 마고이치씨의 글에도 위트가 있고 신선하고 가볍지만, 역시 이태원댄싱머신씨의 글이 더 잘 읽힌다. 더 얇고 더 가볍다.


책을 다 읽고 좋았다. 사실 책 중간에 안 읽고 건너뛴 부분도 있다. 냉장고 정전된 부분은 생생해서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아 건너뛰었다. 그래도 전혀 죄책감이 안 들었다. 책을 100페이지 남짓으로 편집한 점은 탁월했다. 이런 문체로 1,000페이지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음 조금 지루했으려나. 근데 워낙 내가 사랑하는 문체라!


책을 다 읽고 표지를 물끄러미 봤다. 내가 특이한 걸까. 나만 재밌나. 나 이상한 걸까. 이런 의구심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다. 어디 가서 책 재밌다고 훌륭한 책이며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권유하는 게 왠지 자신이 없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제는 부끄러운 기분이 전혀 안 들어서 놀랐다.


이 책은 분명 고전의 반열에 올라야 한다!는 오버인 것 같지만, 정말 재밌는 책이다. 재밌는데 왠지 사람들이 하대한다면 그 하대하는 이유도 알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래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지인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거다. 협박과 고문을 동원해 강제로 책을 읽히고, 어떤지 물어볼 계획이다. 나만 재밌다면 나는 취향이 독특한 사람으로 남는 것이고, 아니라면 이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문체구나하며 나 스스로를 위로할 것이다.


맛집 에세이라지만 책을 다 읽고 딱히 가고 싶은 맛집은 없다. 그러나 수박와구와구씨의 새로운 책은 기다려진다. 그런 의미로 오늘 저녁은 청국장, 제육볶음에 막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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