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멜번의 카페
'주머니 속 마트영수증'에서는 하지 못했던 진짜 호주 여행 잡담기
커피에 문외한 나는 첫 번째 여행지였던 멜번에 대해 검색을 해보고서야 커피가 유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폴바셋에서 먹었던 아이스라테가 가장 맛있었던 커피로 기억이 되는데, 폴바셋이 호주와 관련 돼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슬그머니 났다. 호주는 (특히 멜번) 아침이면 커피 향이 자연스레 퍼지는 도시다. 카페는 보통 오전 7시쯤 개점을 해서 3시정도에는 문을 닫는다. 누가 아침 7시에 커피를 마시냐 싶었는데, 막상 그 시간에 거리를 다니면 광고에서나 본 ‘커피 앤 도넛’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커피만 마시면 잠을 잘 못 자는 나이지만, 여기까지 왔으면 하루에 두 잔은 어떻게든 마셔보자 싶었다.
359 Little Bourke St, Melbourne VIC 3000
브라더 바바 부단은 일명 ‘BBB’로 불린다. 아래에 소개할 세븐시드즈(Seven seeds)와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바바와 부단이라는 형제가 7개의 커피씨앗을 몰래 가지고 옴을 가게 이름에 차용했다. 두 매장의 대표도 동일하다. 아무튼 브라더 바바 부단은 명성에 비해 규모는 굉장히 작았다. 넓은 테이블이 하나 있었고, 대부분 앉아서 먹기 보다는 테이크아웃으로 들고 나갔다. 작은 매장에 쉴 틈 없이 사람들이 오는데, 주문이 밀리거나 커피가 밀리거나 하지도 않는다. 규모에 비해 많은 직원들이 각자의 역할을 일사불란하게 했다. 나는 호주에서 시작됐다고 하는 플랫화이트를 마셨다. ‘평평한 거품’이라는 의미의 플랫화이트는 널따란 잔에 찰랑거리며 나왔다. “호록”하고 맛을 봤다.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 우유거품도 부드러웠고, 깔끔한 맛에 커피 맛(도 모르지만)도 좋았다. 폴바셋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스타벅스가 실패한 도시로 호주의 멜번을 꼽았다. 거의 유일할 정도로 실패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곳에서 너무 맛있게 먹어서인지 앞으로 마실 커피들이 모두 기대되기 시작했다.
328 Swanston St, Melborne VIC
멜번에는 주립도서관이 있다. 도서관에 관심 없는 여행객도 이곳은 관광지 삼아 꼭 들려서 사진을 찍고 간다는 그런 도서관이다. 관심이 없는 사람도 들리는 곳에 관심이 있는 나는 당연지사 꼭 가야 하는 곳이었다. 내가 간들 볼 책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만. 사진 속에서 보던 중앙열람실은 정말 멋졌다. 입이 쩍 벌어졌다. 이런 곳에서 글을 쓰면 내 글이 조앤롤링처럼 해리포터라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멋졌다. 도서관 탐방을 마치고 1층으로 나가면 미스터 터크(Mr Tulk)라는 카페가 있다. 도서관 카페 치고 맛이 아주 괜찮았다. (일단 멜번은 커피가 어딜 가서 먹더라도 평타 이상을 치는 것 같다.) 미스터 터크는 도서관 첫 관장이었던 영국출신의 아우구스투스 헨리 터크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넓은 내부 덕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잠시 쉬어가기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마감을 준비하려는 직원들 사이에 앉아 제법 진해진 오후의 해를 맞으며 진한 커피를 마셨다.
247 Flinders Ln, Melbourne VIC
멜번에는 유명하지 않은 커피 집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지나가다 들린 카페에서도 커피가 맛있었으니. 유명한 카페 중에서도 듁스커피는 유명하다. 그레이트오션로드 투어를 떠나는 날 아침 나는 같은 방을 쓰던 친구들보다 더 부지런히 준비해 이 곳으로 먼저 왔다. 오늘 먹지 않으면 도저히 듁스커피를 먹을 길이 없을 것 같았기에 내가 조금 더 부지런해진 거다. 일찍 문을 닫는 카페덕분에 내가 부지런해졌었다. 아침 일찍 찾은 카페에는 줄이 제법 길게 있었다. 출근길에 커피와 크로와상을 사서 가는 사람들 사이에 나도 있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카페와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에 생기가 넘치게 흘렀다. 주문자 이름을 부르며 커피를 주는데, 그 목소리가 활력이 돋았다. 내 이름이 들리는 순간 나도 힘차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커피와 빵을 손에 들고 누군가의 출근길을 걸어가니 나도 멜번인이 된 것 같았다. 활기차게 그레이트오션로드로 출발했다. 맛은 더 이상 논하지 않으려 한다. (다 맛있으면 어떡해)
서울에도 점점 듁스커피의 원두를 쓰는 곳이나 팝업매장이 생겨나고 있다.
119 Rose St, Fitzroy Vic 3065
겹겹이 쌓인 버터와 밀가루의 조합인 크로와상이 맛이 없기도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룬 크로와상은 또 다르다. 뉴욕타임즈에서 선정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크로와상이 바로 이곳이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빵을 주식으로 하는 유럽도 아니고 호주 그것도 멜번에 있는 곳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곳이라니, 그럼 또 가봐야지. 겨우겨우 문을 닫기 직전 그곳에 도착했다. 새벽 5시부터 가서 줄을 서도 먹고 싶은 빵을 먹기 힘들다는 곳인데 난 운이 좋게도 몇 개 남지 않은 빵 가운데 오리지날이 있었다. 뙤약볕을 걸어서 아이스 더치를 시켰다. 커다란 네모얼음이 크지 않은 유리잔에 꽉 차게 담아주고 커피를 따라준다. ‘아… 더치커피까지 맛있다.’ 크로와상을 한입 깨물었다. 바사삭하고 소리를 내더니 입안에서는 사르르 사라진다. 바사삭의 잔해물이 테이블을 더럽혔다. 그것들을 다시 주워 입 속에 털어 넣고 싶었는데 그렇게까지는 못했다. 위치가 시티에서 가기엔 조금 멀지만 꼭 한번 가보시길 추천한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크로와상을 먹을 수 있으니깐.
주소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곳이었다. 가려고 들어간 것도 아닌데, 룬 크로와상을 나와 시티로 걸어가던 중 빨간 벽돌 집 검은 창살 사이로 보이는 상점과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이 집 문을 넘게 만들었다. 대충 봤을 때는 슈퍼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냥 슈퍼가 아니라 채식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식재료와 음료들, 굿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피츠로이에는 비건음식을 파는 음식점들도 많았다. 나는 이곳에서 밖의 날씨를 망각하고 콩우유가 들어간 뜨거운 라떼를 시켰었다. 계산까지 했는데 뒤돌아서 다시 창살 사이로 쏟아지는 태양빛에 ‘아차!’싶어 아이스롱블랙으로 바꿨다. 점원은 눈썹과 어깨와 입술한쪽을 올리며 계산대를 다시 두드렸고, 나는 머쓱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66 Bourke St, CBD, Melbourne, VIC
한 자리에서 60년을 지키고 있는 멜번의 오래된 카페이다. 카페라고 하기엔 간단히 음식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소개할 수 있다.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호주에서 60년 전통의 음식점이라니 워낙 노포를 좋아하는 나이기에 당연 카페를 찾았다. 연세가 지긋해 보이시는 어른들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커피를 건네주는 직원들과 자연스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바에 앉아 호주식 아이스커피를 시켰다. 호주식 아이스커피는 달달한 믹스커피 같은 커피 위에 바닐라아이스크림이 한 덩어리 올라가 있다. 처음에는 빨대로 달달한 커피를 쭉쭉 빨아먹고, 아이스크림이 커피에 빠질세라 조심조심 떠먹었다. 어느 정도 그렇게 먹고 나면 숟가락으로 마구마구 저어준다. 그럼 쉐이크같은 맛이 난다. 이곳은 원래 수박주스가 유명하다고 하니 갓나온 파이들과 함께 수박주스를 마셔도 좋을 것 같다.
114 Berkeley St, Carlton VIC 3053
이곳은 앞서 언급한 브라더바바부단(BBB)의 시작이 된 곳이기도 하다. 로고부터 마음에 들었다. 7개의 줄이 그어져있는데 의미가 담기면서도 깔끔해 보였다. 플랫화이트는 BBB에서도 먹어봤으니 이번에는 롱블랙 아이스를 시켰다. 그러고 보니 더위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나는 호주에서도 아이스를 많이 먹어버렸다. (더울 땐 아이스J) BBB의 몇 배나 되는 넓은 매장에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빼곡했다. 기다리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는데 혼자 온 나는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안내 받았다. 한국에서는 한번도 먹어본 적 없던 ‘브런치’를 처음 먹었는데, 먹으면서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고작 10$정도의 브런치 뿐이었지만 적당히 바삭한 빵과 적당히 새큼한 토마토소스와 보스라우면서 촉촉한 오믈렛이 내 입안으로 들어왔을 때 매우 행복했기 때문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호주에 나에겐 조금 진한 롱블랙은 롱블랙대로 깔끔했다. 이후 일정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면 듁스커피와 세븐시드즈에서 커피원두를 꼭 사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지 못했던 것이 참 많이 아쉬웠다.
12 Sutherland St, VIC 3000
이제 정말 멜번과 작별을 고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커피 맛도 모르는 내가 멜번에서 마지막으로 한 것이 카페를 간 것이다. 처음 먹은 플랫화이트를 마지막으로 느끼고 시드니로 넘어가고 싶었다. 고심해서 쇼츠스톱에 가기로 했다. 사실 그레이트오션로드 투어를 가던 날, 나도 듁스커피를 먹고 있었지만 함께 하던 가족무리가 이 쇼츠스톱 커피를 마시며 차로 들어왔었다. 그러면서 들리는 소리가 “난 이 집이 제일 맛있는 것 같아”였다. 멜번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그분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다가 찾아가게 된 것이다. 내부는 어디를 가더라고 한국처럼 편히 있을만한 카페들은 없었다. 사람들도 앉아서 즐기기보다는 거리를 다니면서 커피를 먹는 모습이 더 많이 보였다. 나는 유명하다던 소금 도넛과 플랫화이트를 시켰다. 한입 먹자마자 역시 호주에서는 플랫화이트가 참 맛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고소하고 깔끔한 우유와 시큼한 맛이 감도는 커피인데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커피원두, 그리고 아주 알맞은 양과 가격. 다시 멜번의 플랫화이트를 먹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지경으로 맛있었다.
짧은 일정에 나름대로 최대한 많은 곳의 카페를 가보려 노력했다. 커피덕분에 잠을 이루지 못한 날들도 있었지만 멜번에서 먹은 커피들이 하나같이 맛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냄새, 시간, 장소가 좋았다. 멜번에서는 유명한 곳들을 위주로 다녀봤지만 시드니 브리즈번에서는 중간중간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커피를 먹었는데, 그 맛도 정말 눈이 번쩍 할 정도로 맛있었다. 그러니 커피가 고플 땐 눈에 보이는 아무 카페나 들어가서 커피를 시켜도 맛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커피는 잘 모르지만 맛있는 것은 잘 아는 저이니 멜번에 가신다면 아니 호주에 가신다면 꼭 커피를 즐기고 오시라고 말하고 싶다. 호주 일정 후에 태국 치앙마이로 넘어갔는데 치앙마이도 커피를 빼놓기엔 아쉬운 곳임에도 그 어떤 곳을 가도 멜번에서 먹은 커피 맛을 뛰어넘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여전하다.
다음은 '시드니의 책방'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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