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복이 등장하면 책임도 성과도 없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읽은 독자라면 후한의 멸망이 10명의 환관 '십상시'로부터 기인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십상시는 황제가 정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온갖 향응으로 황제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후한의 멸망을 야기했다. 주로 환관이 국정을 어지럽히는 과정은 아래와 같다.
1. 군주가 특정 환관을 총애한다.
2. 군주는 신하와 직접 소통하지 않고 환관을 통해 지시한다. 심하면 보고까지 환관을 통해 받는다.
3. 우쭐해진 환관은 군주의 지시를 왜곡하거나, 자기 해석을 덧붙이기 시작한다.
4. 신하들은 정확한 지시인지 알 길이 없으므로 환관의 눈치를 보게 된다.
5. 환관에게 잘보이기 위해 뇌물을 바치는 신하들이 늘어난다.
6. 환관은 자기 입맛에 맞는 신하를 높은 자리에 천거하는 상황이 반복횐다.
7. 지시사항과 보고내용이 엇갈리기 시작하고, 질이 낮은 해결책이 등장하며, 일정이 늦어지기 시작한다.
8. 환관은 이 모든 책임을 신하들에게 뒤집어 씌운다. 군주는 그 말을 믿고 신하들을 문책한다.
9. 충직한 신하들은 환관에 의해 제거되고, 간신들은 환관과 결탁한다.
10. 아무 생각 없는 신하들은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고 일은 적당히 처리한다.
11. 1번에서 5번이 반복되면 반란이 일어나거나, 외적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한다.
이렇게 환관이 군주와 신하 사이의 소통을 독점하면 국정은 어지러워지고 나라는 피폐해지며 심하면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삼국지> 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비단 환관 뿐일까? 나는 오늘날 기업에서도 환관과 비슷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인물을 종종 본다. 업무를 지시하는 리더와 업무를 수행하는 실무자 사이에 자리잡아 업무소통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통칭 리더의 '심복'이 그런 사람이다. 환관이 국정을 어지럽히는 과정에서 '환관'을 '심복'으로, '군주'를 '리더'로, '신하들'을 '실무진'으로 바꾸면 놀랄 정도로 현재 기업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닮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 예시를 보자.
금요일 저녁, 마케팅 팀장 제임스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경영기획 팀장 에반을 만났다. 둘은 날씨를 주제로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에반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참, 팀장님. 대표님이 오늘 이런 말씀을 하시던데요. 곧 회사 창립 40주년이잖아요. 이 때 뭔가 기념을 크게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던데요? 프로모션도 해서 매출도 올리고 이벤트도 하고 홍보도 하면서요."
"네?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오늘 아침 팀장 회의에서는 그런 말씀 없으셨는데...그냥 기념 굿즈만 만들어서 사내에 배포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저도 퇴근하기 전에 대표님과 함께 담배 피면서 들은 얘기에요. 은근히 기대하시는 거 같던데요? 마케팅 팀이 이럴 때 뭔가 아이디어 딱 가져오면 좋을 것 같다구요. 뭐, 그냥 참고만 하세요. 주말 잘 보내세요."
에반은 제임스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간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임스는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평소 대표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에반은 대표의 복심을 가장 잘 아는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제임스 입장에서는 에반의 말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그때부터 팀 단체 카톡방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 제임스는 주말까지 반납하고 팀원들의 서포트를 받으며 기획안을 작성했다.
이틀 뒤 월요일 아침, 경영진 회의에서 제임스는 야심차게 기획서를 발표했다. 주말 동안 팀원들과 열띤 토론으로 만들어낸, 본인이 보기에도 멋진 기획이었다. 발표를 끝내고 제임스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대표이사의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대표의 표정이 예상보다 어둡다. 대표는 못마땅한 듯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주말에 고생한 건 알겠는데, 지난 주 회의 때 나온 이야기랑 다르지 않나요? 그 때 분명 기념 굿즈만 만들기로 한 걸로 기억하는데요. 갑자기 기념행사를 하고 프로모션까지 하자는 건 누구 생각이죠? 창립 40주년은 우리만 축하할 사실이지 고객들은 관심도 없을 거라고 마케팅 팀장이 그러지 않았나요?"
순간 제임스는 심장이 발 빝까지 덜컥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제임스는 대표님 옆에 앉은 에반에게 눈길을 주었으나 에반은 회의실 한 켠에 걸린 그림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제임스는 허탈한 마음을 애써 추스리는 동안 대표는 벌써 다음 안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기서 문제, 위 사례에서 가장 잘못한 사람은 누구일까?
① 대표와의 사담을 마치 지시처럼 들리게 만든 경영기획 팀장 에반
② 공식적인 지시가 없었는데도 눈치껏 알아서 일한 마케팅 팀장 제임스
③ 제임스를 믿고 열심히 일한 마케팅 팀원들
④ 마케팅 팀장이 왜 갑자기 기획방향을 바꿨는지를 파악하지 않고 넘어간 대표
정답은 ④번이다. 대표는 창립 40주년을 어떻게 기념할지에 대한 기획이 주말 사이에 달라진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고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보통 다 같이 결정한 사안을 갑자기 바꾸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케팅 팀장에게 어떤 변수가 생겼길래 이런 상황이 벌어졌고, 투입된 마케팅 팀의 리소스가 얼마나 되는지를 확인하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조치해야 한다.
다음으로 잘못한 사람은 ①번의 경영기획 팀장 에반이다. 대표의 공식적인 지시가 아님에도, '뒷담화'를 은근슬쩍 흘려서 마케팅 팀장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정작 그 혼란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이런 교활한 사람은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만약 대표가 마케팅 팀장의 새 제안을 마음에 들어했다면 자신이 일조했다고 공을 강조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잘못한 사람은 ②번의 마케팅 팀장 제임스다. 공식적인 지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알아서' 눈치를 보고 움직여서 쓸데 없이 시간을 낭비했다. 주말 사이 투입된 마케팅 팀장과 팀원들의 노동력이 불필요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회사로부터 어떤 인정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팀원들은 주말에 쉬지 못했으니 월요일 업무를 수행할 때도 평소 같이 잘 하기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도 팀 전체의 사기가 떨어졌을 것이고 팀장에 대한 팀원들의 신뢰도 떨어졌을 것이다. 대표와 마케팅 팀장의 사이도 서먹해졌을 것이고 마케팅 팀장과 경영기획 팀장의 사이도 어색해졌을 것이다. 시간이 해결하겠지만, 당분간 이들의 불편한 관계는 업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만약 대표가 자신이 금요일에 경영기획 팀장에게 담배 피면서 한 말이 그대로 마케팅 팀의 기획안이 되었음을 파악한다면 두 가지를 단행해야 한다. 첫 번째, 경영기획 팀장에게 자신과의 사담을 함부로 퍼뜨려서 내부 소통을 어지럽힌 점을 문책해야 한다. 같은 사람이라도 대표의 말이라면 피고용자 입장에서는 움찔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대표의 말은 지시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퍼뜨리면 안된다. 대표의 측근이 되려면 입이 무거워야 하는 법이다. 두 번째, 회의에서 합의한 사항을 공식적인 지시 없이 변경하여 주말 내내 팀원들의 노동력을 함부로 쓴 마케팅 팀장도 문책해야 한다. 이런 일은 선례가 되어 다른 팀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업무는 지시와 보고로 이루어진다. 업무지시자가 업무를 수행하게 될 사람에게 지시하는 걸 가상의 선으로 표현하면 지시라인이 되고, 업무수행자가 업무를 지시했던 사람에게 보고하는 걸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면 보고라인이 된다. 모든 업무는 이 지시라인과 보고라인이 일치할수록 업무가 효율적이며 효과적이다.
문제는 위 사례와 같이 심복이 업무지시자의 지시를 대행하게 되는, 지시라인과 보고라인의 불일치하는 경우다. 아무리 심복이 업무지시자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엄연히 다른 생각을 가진 타인이다. 아무래도 지시사항에 심복의 생각이나 관점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심복은 직접 보고하지 않기 때문에 지시를 대행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위 사례의 경영기획 팀장 에반처럼 지시 인듯 지시 아닌 지시 같은 대표의 복심을 비공식적인 루트로 전달할 경우 심복은 더욱 책임을 지지 않는다.
지시를 전달하고 직접 보고하지 않아 책임이 없는 심복이 활개치는 건 마치 소통을 독점하는 환관에 의해 국정이 어지러워지는것과 같다. 지시와 보고가 불일치하면 열심히 일하는 실무자가 아닌 입만 잘 놀리는 심복만이 인정 받는다. 이런 심복에 기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때부터 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교활한 리더는 한 술 더 떠서 심복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자신이 공표하거나 공언하거나 지시하면 그만큼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심복을 통해 의사를 표현한다. 공개적인 장소가 아닌, 심복으로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는 사람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지시아닌 지시를 하는 것이다.
리더 입장에서는 공식적인 지시가 아니기에 '지시의 책임'을 면할 수 있고 심복이 중간에서 알아서 필터링할 것이니 공식적인 표현보다 의견을 보다 '날 것'으로 피력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지시에 대한 즉각적 반발도 회피할 수 있다. 심복이 지시를 대신 전달하면 불문곡직 리더에게 찾아가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국사회 통념상 그런 행위는 어렵다. 아직까지도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행위를 한국사람은 어려워 한다. 질문 자체를 무례하게 여기는 통념은 아직 존재한다.
혹자는 이런 비공식적인 소통이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조직의 운영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윤활유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사람 사이의 소통이 공식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겠냐는 것이다. 때로는 밀실에서, 담배 피면서, 술 마시면서, 밥 먹으면서, 퇴근길에, 전화하면서 더 좋은 의견이 나올 수도 있고 리더가 더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이유를 덧붙여서 말이다.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이해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오직 밀실에서, 담배 피면서, 술밀실에서 마시면서, 밥 먹으면서, 퇴근길에, 전화하는 상황 외에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에 책임질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일 뿐이다. 흔히 정치에서 유력한 정치인의 '복심'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이런 물밑 작업을 많이 한다. 하지만 회사는 정치판이 아니다. 이런 비공개적인 소통이 많아지면 회사 조직은 명확한 정보가 아닌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이 떠도는 동아리 수준보다 못하게 된다. 밀실의 논의는 밀실에서 두고 나와야 한다.
불확실성은 불필요한 비용을 발생시킨다. 불확실한 정보는 혼란을 만들고 혼란은 조직원을 불안하게 하고 수동적으로 만든다. 업무지시자가 아닌 심복을 통한 지시 전달은 아무리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달했다고 해도 당사자가 아니므로 그 의도까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불확실하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혼란 덩어리일 뿐이다.
리더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불확실하고 명확하지 않은 지시를 해석해야 하는 비용이 발생한다. 회계 장부에 표시되는 숫자만이 비용이 아니다. 리더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도 파악해서 아낄 줄 알아야 한다. 이걸 못하면 나쁜 리더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리더에게서 야금야금 복심을 빼내어 독가스처럼 퍼뜨리는 심복도 문제다. 리더도 인간이기에 본의 아니게 자신의 비위를 잘 맞추는 심복에게 흉금을 털어놓을 때가 있다. 이런 사사로운 말과 감정을 심복은 자신의 무기로 삼는다. 한참 회의 중인데 심복이 불쑥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던데요.'라는 말을 하게 되면 자연히 그 사람이 회의실의 왕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때부터는 정상적인 회의가 어려워진다. 대표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피고용인들은 자연스럽게 회사의 이익이 아닌 리더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집중하게 된다.
심복은 지시라인과 보고라인에서 자유로우며 권한만 있고 책임이 없다. 모든 기업은 동일한 책임과 권한을 가진 직원들이 모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을 되새긴다면, 심복은 암적인 존재다. 그리고 이런 심복을 방치하거나 알면서도 활용하는 리더는 확실하게 '나쁜 리더'다.
지금 당신은 리더의 지시를 직접 받고 있는가? 혹은 책임 없는 누군가로부터 대신 받고 있는가? 남의 일이 아니라 당장 자신의 일터부터 살펴봐야 할 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