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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드부스터 켄 Oct 07. 2018

우리는 꼰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상대방을 너무 가볍게 꼰대로 판단하지 않았는지 검증이 필요하다.

1.

오글거린다는 말이 나오고 사람들은 들뜬 감정을 절제하게 되었다.

설명충과 진지충이라는 말이 나오자 사람들은 지식을 공유하지 않았다.

멘붕이라는 단어가 생긴 이후로 사람들의  멘탈은 하루 한 번씩 무너졌다.

앞장서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나대는 사람이 되었다.

썸을 탈 때는 사귀는 게 아니니 쉽게 연락을 끊어도 무방하게 되었다.

조금 다른 감성을 가졌을 뿐인 사람들이 모두 중2병자로 치부당한다.

잘 모르고 헤매는 후배가 걱정되어 몇 마디 하면 다음날 그 선배는 꼰대가 되어 있었다.


언어는 강하다. 어떤 대상을 정의하는 언어는 의사소통을 보다 명확하게 해주지만, 한편으로는 대상을 그 의미 안에 가둬두고 같은 생각을 하게끔 유도하며 다른 생각을 못하게 만든다. 같은 개념이라도 어감에 따라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이미지가 형성된다. 누군가를 언어로 규정했을 때 연상되는 이미지는 꽤 강력해서, 주변사람들로부터 낙인효과가 발생하고 당사자가 그 인식을 벗겨내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꼰대가 유행이다. 예전부터 점점 물이 오르더니 지금은 흔히 듣는 유행어가 되었다. 과거 아버지, 선생님을 지칭하던 범위를 넘어 꼰대는 고리타분한 직상상사, 명절에 온갖 질문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친척, 쓸데 없는 오지랖을 부리는 옆집 아저씨, 지하철에서 소리 지르는 노인, 청년에게 시대착오적인 답답한 말씀을 하는 정치인까지 가지각색이다. 심지어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대학선배에 직장선배까지 '젊은 꼰대'라고 불린다. 나이, 성별, 직업, 학력, 지역, 종교, 정치 등 꼰대가 출몰하지 않는 영역이 없을 정도다. 말 몇 마디면 쉽게 꼰대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과거의 꼰대가 일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만을 지칭했다면, 지금의 꼰대는 본인의 생각을 강요하고 경험과 나이의 비교우위를 과시하는 태도에 더 집중하는 듯하다. 


꼰대 얘기만 나오면 생각나는 미생의 마부장님. 이 분의 언행은 꼰대의 화신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출처: 미생, tvN)


사생활을 간섭하거나 천한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이 꼰대 1순위다. 과거의 영광에 빠져 허우적대는 양반들도 순위에 뒤쳐지지 않는다. 들은 사고가 경직되어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나만의 정답을 강요하며 본인의 성공경험을 공식화하여 인정받고 싶어한다. 

특히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직장은 꼰대를 제대로 겪을 수 있는 체험의 세계다. 신기하게도 어느 기업이나 꼰대는 꼭 한 명씩 도사리고 있다. 기업에 꼰대가 많으면 좋은 인재가 견디다 못해 나가고 같은 꼰대들이 빈자리를 차지한다. 이들은 보여주기식 절차를 중시하고 정치를 일삼는 등 회사에 해악을 끼친다. 하루만에 끝날 수 있는 보고가 한 달을 가고 업무를 창의적으로 하지 못해 일에 몰입하기 힘들다. 많은 기업들이 이러한 꼰대문화를 단절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다.


2.

꼰대의 유래는 두 가지로 추정된다. 첫 번째는 영남 사투리인 '꼰데기'다. 번데기처럼 주름이 많은 늙은이를 꼰데기라고 하다가 꼰대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또 하나는 친일파의 '꼰대짓'이다. 백작을 프랑스어로 콩테(Comte)라고 하는데 이를 일본식으로 부르면 '꼰대'가 된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완용 등 친일파들이 백작 등 작위를 수여받으면서 자신을 꼰대라고 칭하자, 그들의 못된짓을 '꼰대짓'이라고 비난했던 게 지금의 꼰대로 자리잡은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꼰대를 접했던 기억은 영화였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꽤 많은 영화에서 불량스러운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칭할 때 꼰대라고 하더라. 혹은 고등학교 학생이 지나치게 엄격한 선생님을 칭할 때도 꼰대라는 용어를 썼던 것 같다. 사전을 보지 않아도 맥락으로 단어의 뜻을 유추하듯이, 나는 '꼰대를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윗세대 남성'이라고 어렴풋이 정의내렸었다.

 

꼰대의 끝판왕은 이런 분 아닐까? 본인을 긍정하기 위해 역사까지 바꿔버리는 사람. (출처: 26년, 강풀 작)


요즘 꼰대라고 불릴만한 언행은 다음과 같이 나열할 수 있다.


'요즘 애들은~' 젊은 세대를 싸잡아 비난한다.

'내가 너만할 때는~' 본인의 우수함을 과시한다.

'예전에는 엄청 힘들었어.' 과거보다 지금이 편하니 그만큼 열심히 해야한다고 암시한다.

'막내면 이런 건 알아서 해야지~' 하위서열의 의무를 강요한다.

'까라면 까!' 상명하복을 당연하게 여긴다.

'애 낳을 거면 젊을 때 낳아야지.' 업무를 넘어 사생활까지 참견한다.

'선배를 보면 큰 소리로 인사해.' 괜히 똥군기를 잡고 예절, 말투, 표정, 태도, 외모를 지적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본인의 경험적 우위로 깔아뭉겐다.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후배의 반론을 회피하고 본인의 착각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게 뭐가 힘들다 그래?' 상대방의 아픔과 고민을 공감하지 않는다.

'자네가 자식(동생) 같아서 충고하는건데~' 업무를 초월한 부모애와 형제애를 발휘한다.


이 외에도 꼰대의 특성은 파도파도 끝이 없을 듯하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이런 언행이 특별히 지금 시대에만 있었을까? 이전에는 다같이 오손도손 평화롭게 살았는데 지금에 와서 마치 전염병처럼 꼰대들이 창궐한 걸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언행은 동서고금을 초월한다. 옛날에도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라며 아랫세대, 다른 계급, 하위 신분을 싸잡아 비난하는 언행은 존재했다. 미국에도 나이를 과시하고, 주로 과거 이야기를 즐겨하며,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는 부류를 칭하는 보시(bossy, 우두머리 행세를 하는)라는 단어가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 꼰대가 유행하게 된 이유는 높은 민감도와 넓은 확산력 덕분이다. 이전에는 꼰대짓을 당해도 그러려니 하고 참다가 내리꼰대짓을 하는 상황이었다면 지금은 꼰대짓에 대한 불편함을 바로 표출하는 사회적 민감도가 훨씬 높아졌다. 이미 우리는 불합리한 현상을 더 이상 참지 않고 성토해서 세상을 바꾼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노의 씨앗이 디지털 채널로 널리 퍼져서 무수한 공감을 일구어 냈기에 누구나 일상용어로 꼰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촛불집회로 사회를 바꾼 경험은 더 이상 불합리한 세상을 참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탄이 되었다. (출처: YTN)


나는 기성세대에게 억눌러왔던 불만이 꼰대라는 워딩을 통해 터졌다고 생각한다. 유행은 결핍으로부터 온다. 결핍된 사회의 욕망은 시대의 합의를 통해 유행이라는 거울로 구현된다. 꼰대가 유행하는 현상은 우리 시대가 그동안 사회적 강자가 약자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꼰대는 나이, 직급, 재력, 권력, 학력 등 상대방보다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는 점을 이용하여 억압해온 자들에게 내리는 철퇴다.


우리는 이제 내가 누군지 알아?(who), 뭘 안다고?(what), 어딜 감히(where), 내가 왕년에는(when), 어떻게 감히(how), 내가 그걸 왜?(why)라고 육하원칙을 가진 사람을 당당히 꼰대로 정의하여 그를 부끄럽게 만들 수 있는 언어적 방패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김과장님은 꼰대래.' 한 마디면 긴말 필요 없이 한번에 김과장에 대한 정보와 이미지를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꼰대 소리를 들은 김과장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3.

꼰대 열풍이 불기 전, 한때 멘토의 시대가 있었다. 재미있게도 동전의 양면처럼 꼰대의 반대편에는 멘토가 있다. 그때도 지금처럼 극악의 취업률, 치솟는 집값에 반값 등록금이 내내 이슈였던 시절이었다. 힘든 사회생활을 견디다 못한 청년들은 비명을 질렀고, 불투명한 미래를 보며 절망했다. 그들보다 먼저 사회에 자리잡은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멘토의 시대가 열렸다.


감히 다가가기조차 어려운 업적을 쌓은 스티브 잡스, 워렌 버핏, 빌 게이츠부터 대기업에 취업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대학 강단에 섰던 학과선배까지 청춘은 신보다 사회적으로 한 발 이상 앞서면 멘토로 대우해주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청춘은 그렇게 멘토의 조언과 위로를 가뭄 속 빗방울 마시듯 빠르게 흡수했다. 대학생 뿐만 아니라 직장인들도 멘토를 필수로 여겼다. 이때만큼 자기계발서, 청춘위로서가 미친듯이 나왔을 때가 없었을 것이다.


김난도 교수가 낳은 청춘의 아픔과 흔들림


김난도 교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를 연달아 써내면서 멘토 시대는 절정을 맞이했다. 책 내용은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의 청춘버전이었다. 이 두 권은 사회적 파장과 동시에 청춘세대뿐만 아니라 김난도 교수와 같은 세대의 분노까지 일으켰다. 청춘의 고생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내용이 멘토가 하는 말 치고 너무 꼰대스러웠기 때문이다.


청춘에게 고생을 권장하는 사람이 실제로 청년시절에 엄청나게 고생했던 사람이었으면 설득력이 있을 듯하다. 어렸을 때 고난의 시절을 살아온 박지성, 안정환 같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무튼 공감도 안되고 심지어 오만함이 엿보이는 이 책들로 인해 김난도 교수는 뜻하지 않은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나는 이 때를 기점으로 멘토의 시대가 점점 저물었다고 본다. 그렇게 시대는 선배들을 멋대로 멘토로 만들고 지웠다. 지금도 청춘들은 여전히 멘토를 찾고 있지만 이 때의 부작용으로 열기가 뜨겁지 않다.


같은 교수인 진중권 교수는 멘토와 꼰대의 차이를 재미있게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둘 다 충고를 하는 공통점이 있으나 멘토는 요청했을 때 경험을 바탕으로 참고할 수 있는 예시를 곁들어 조언해주는 스타일인 반면 꼰대는 요청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경험을 진리처럼 강요한다. 일부 맞는 말이긴 하지만, 꼰대를 설명하려고 멘토를 대척점에 놓다 보니 다소 억지스러운 설명이 된 것 같다. 일단 진중권 교수의 기준에 따르면 조언을 요청하지 않은 자식들에게 사사건건 잔소리하는 모든 대한민국 부모님은 꼰대가 된다.


진중권 교수가 말하는 멘토와 꼰대의 차이. (출처: 속사정 쌀롱, JTBC) 


기본적으로 멘토는 멘티와의 교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멘토는 멘티가 인정하고 따르는 사람이고 멘티는 멘토가 아끼고 존중해주는 사람이다. 즉, 서로 간의 신뢰가 성립된 관계다. 유명강사의 강의 몇 번 들은 걸로, 혹은 유명한 사람의 책 한 번 읽었다고 그를 멘토로 삼는 건 적절하지 않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들은 당신이 누군지 모른다). 진정한 멘토링은 멘티의 수준과 상황에 맞춤화된 조언이다. 내가 잘못된 길에 빠졌을 때 내 요청 없이도 멘토가 조언과 질책을 해준다면 당연히 고마워해야한다. 그래서 멘토를 찾으려면 나와 가까운 곳에서, 나를 잘 아는 사람들 중에서 찾는게 빠르다. 그런데 이런 감정적 교류도 없이 조언을 요청하는게 과연 바람직할까?


인간은 자신을 잘 알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우리는 거울이 없으면 얼굴에 붙은 밥풀도 인지하지 못하며, 남의 단점은 기가 막히게 지적하고 자기 단점은 남이 얘기해주기 전에는 모르는 불완전한 존재다. 자기에게 조언이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자기 문제도 모르는데 어떻게 충고를 요청할 수 있단 말인가?


멘토도 사람이기에 자신의 경험 내에서 대답해 줄 수 밖에 없다. 멘토는 조력자지 당신의 인생을 책임지지 않는다. 자신의 문제를 명확하게 인지한 상태에서의 질문이 필요한 이유다. 결국 당신이 질문에 따라 조언의 퀄리티가 달라진다. 흔히 "제가 앞으로 뭘 하면 될까요?"라고 묻는데 이건 너무 광범위하고 무책임하다. 명확한 질문이 분명한 대답을 이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질문은 효과가 없다.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하는 사람이 정말 본인에게 필요한 질문을 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입장을 바꿔서 멘토를 고려해보자. 요청할 때 조언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건 멘토의 입장을 생각 안하는 거 같다. 적절한 조언의 타이밍은 멘토가 더 정확하다. 멘티가 자신의 문제점을 인지하는 것보다 관찰자이자 경험자인 멘토 입장에서 보는 게 더 빠르고 분명하기  때문이다. 조언의 필요여부를 멘티가 정하는 것 자체가 황당하다. 자기가 듣기 싫을 때 조언하면 꼰대라고 여기면서 필요할 때 요청하면 무조건 조언해줘야 하는건가? 미안하지만 그런 사람을 멘티로 삼고 싶은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돈 주고 고용하는 것도 아닌데 '당신은 내가 필요할 때만 조언해.'라고 하면 어떤 선배도 유쾌할 것 같지 않다.


꼰대도 머리 좋은 사람 많다. 꼰대라고 해서 다 무능력하지 않다. 회사에서 자기 경험이 진리인 양 강요하려고 치밀한 논리와 근거와 예시를 만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상상도 못할 거다. 그들에게 회의실은 자기보다 잘난 후배를 심판하여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법원이며 보고서는 자신의 공적이 돋보이게  만드는 무대다. 머리 좋은 꼰대일수록 인사고과를 잘 받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사생활에 대한 쓸데없는 참견을 제외하고, 업무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 모든 명령과 지시를 꼰대짓이라고 막아버린다면 대한민국 기업 업무는 당장 마비될 것이다.


4.

얼마 전 어떤 SNS 게시물을 본 적이 있다. 누군가의 강한 의견이었고 그에 대한 반박댓글이 줄을 이었다. 게시물을 올린 분은 나이가 있는 분이셨는데 본인의 의견을 한결같이 고수했다. 누가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댓글은 통해 그를 '말이 안 통하는 꼰대'로 지칭하며 마녀사냥을 벌였다. 논리도 없는 감정적인 공격이었다. 벌떼처럼 달려드는 일방적인 공격에 결국 그 게시물은 없어졌다. 그 분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는 나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내심이 너무 약해졌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참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만큼 타인을 너무 쉽게 판단하고 재단한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라며 굳이 나를 싫어하는 친구를 참을 이유가 있냐는 말이 나오는 세상이다. 문학적 가치가 있는 시를 두고 '오글거린다'고 표현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멘붕'과 '대박'을 외치고,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은 '진지충', 설명하는 사람을 '설명충'으로 치부한다. 꼰대를 이런 유행어처럼 너무 가볍게 쓰는 게 문제다. 우리는는 아무런 부담 없이 상대방을 꼰대로 규정한다. 일단 판단해놓고 '아님 말고'의 심보가 크다. 잔소리 몇 마디 하거나 고집스러운 사람을 너무 쉽게 꼰대로 단정짓고 낙인찍고 파괴한다. 그 사람의 다른면모는 들여다 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만약 고집이 있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금방 꼰대로 판단하면 너무 성급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신만의 경험을 성벽처럼 쌓아가며 자아를 성장시킨다. 차곡차곡 쌓아온 자신의 성벽을 무너뜨리거나 바꾸지 않으려는 고집은 자기 인생을 긍정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 고집은 본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렇게 본인의 생각을 일관성 있게 추구하는 건 굉장한 용기 아닐까? 그 고집을 어떤 톤앤매너로 타인에게 표현하냐가 중요한 것이지 고집 자체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질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강하게 주장하기만 해도 쉽게 꼰대로 오해받는 현실에 살고 있다. 강한 고집과 꼰대질을 구분했으면 좋겠다.


물론 누가 들어도 저급한 언행은 꼰대의 전유물이고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혹여 꼰대라는 말에 상처 받는 선량한 선배들과, 그런 선배들의 조언을 얻을 기회를 놓친 간절한 후배들이다. 어차피 선배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활용하는 것은 본인의 몫이다. 듣기 싫은 소리 한다고 남 탓하기 보다 좋은 말 실컷 들어놓고 실천 하지 않는 내 탓을 먼저 하는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꼰대를 얻는 대신 멘토를 잃었을 지도 모른다. 이미 밝혔듯이 우리는 상대방의 쓸데 없는 오지랖에 부당하고 불합리한 언행에 맞서 '당신은 꼰대야!'라고 외칠 수 있는 언어적 방패를 얻었지만 동시에 인내심 없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후배를 아끼는 선배들이 입을 다물도록 총부리를 겨누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사려 깊은 선배들은 그 성격으로 인해 혹여 후배가 마음 다칠까봐 걱정해주는 조언조차 하지 않고 아예 관심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몇몇 못된 사람들이 기성세대를 비꼬고 희화화하려는 목적으로 꼰대라는 총알을 마구 쏘아대어 우리 주변의 참된 어른들을 상처 입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답 없는 사람들로부터 사회적 약자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었던 '꼰대'가 '진지충'이나 '설명충'처럼 가장 저급한 자들의 무기가 되었다.  


듣기 싫다는 말을 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쉽게 꼰대라고 몰아붙인다면, 과연 누가 꼰대인 걸까?


꼰대도 청춘이 있었다. 한때 그들도 꼰대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들도 당시의 꼰대를 만나서 고통받았겠지만 그걸 잊고 받았던 고통을 그대로 대물림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나이가 들거나 사고가 경직되면 우리도 꼰대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나는 꼰대짓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건축학개론에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고 했던가. 같은 맥락에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꼰대였다.'라고 볼 수도 있겠다. 누구나 꼰대가 될 수 있으며 나도 누군가에게 내 의견을 강요했다면 당연히 꼰대다. 이제 누군가에게 한 마디를 하더라도 예전보다 더욱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시대다.


미래가 없는 자는 과거를 찾고, 과거가 없는 자는 미래를 상상한다. 꼰대는 적당한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지 못하고 과거의 빛나는 역사를 뒤진다. 자존감을 높이기 어려우니 타인의 자존감 위에 올라타려 한다. 그들에게 만만한 상대는 나이가 어린 사람, 직급이 낮은 사람이다. 사회적으로 나보다 못한 사람이다. 자신이 지닌 존재감과 감정에 손을 들어줄 자기편을 찾는다. 자기편이 되지 않으면 나와 연결될 가치가 없으니 배척한다. 그렇게 못난 자신을 애써 포장한 채 가면을 쓰고 웃으며 고립되어간다.


그렇기에 나는 꼰대를 동정한다. 세월이 지나 어쩌면 꼰대가 될 지도 모르는 미래의 나까지 포함해서 동정한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보신하기 위해 애쓰는 그들을 가엾게 여긴다. 꼰대가 꼰대인줄 알았으면 꼰대였겠는가. 그들은 자기가 추구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을 질투하고 자기가 추구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목표를 비웃고 무시하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이다. 주변 사람에게 '나 꼰대 같아?'라고 물어보고 은근히 '아니'라는 답을 기대하고, 자신을 꼰대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즉시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는 뻔뻔함을 갖추고 있는 그들이 불쌍하다.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비극의 무대에서 관객 없이 독백을 하는 배우 신세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답답했던 그 꼰대가 다른 사람에게는 멘토가 될 수도 있다. 우리 역시 상대방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듯이, 꼰대도 그럴지도 모른다. 직장에서는 누구보다도 짜증나는 부장님이 집에서는 그보다 자상할 수 없는 아버지가 된다면 그 사람은 꼰대인가 아닌가? 애초에 태생부터 꼰대인 사람이 존재할까? 나한테만 꼰대라면 그 사람을 꼰대라고 부를 수 있는 판단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사람의 일부만 보고 그 사람 전체를 예단하는 게 바른가?


각자의 입장은 각자에게 옳다. 모든 것은 하기 나름이다. 내가 누군가의 멘토가 되고 꼰대가 되는 것, 누군가가 나의 멘토가 되고 꼰대가 되는 것은 상대방이 결정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나의 태도가 결정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같은 꼰대짓이라도 부당한 오지랖이면 흘리면 되고 의외로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멘토도, 꼰대도 될 수 있다.


나의 수준과 공감력, 나 자신에 대한 이해력을 뒤로 한 채 듣기 싫고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무조건 상대방을 꼰대로 몰아붙이지는 않았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나를 방어하기 위해 상대를 꼰대로 몰아붙인다면 과연 누가 꼰대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가 여물지 못해서 상대방의 수준 높은 조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잔소리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수준인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감정에 앞서 내게 도움 되는 말인지 판단하는 이성이 필요하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그 순간 내가 꼰대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잔소리를 하면 된다. 꼰대 소리 듣기 싫으면 관심을 끊으면 된다. 그건 그 후배가 당신에게 그 정도 가치라는 의미다. 정서적 교감이 평소에 형성되어 있다면 멘토의 자격으로 이야기하면 된다. 당신은 꼰대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를 꼰대로 만들 수도 있는 사람이다.


5.

어차피 칭찬이 아닌 잔소리는 듣기 싫은 법이다. 당신은 잔소리하는 사람을 전부 꼰대로 만들 생각인가? 말이 통하지 않고 답답하고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며 상대방을 꼰대로 판단해버린다면 당장 마음이 편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타인에 대하여 조금의 인내심도 발휘하지 않고 자기 편한대로 상대방을 저 멀리로 밀어내고 비웃기만 한다면 결국 고립될 것이다.


말이 안 통한다는 이유로 주변 모두를 꼰대로 만들어버리면 결국 나 혼자만 남게 된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 본인을 알아간다. 타인을 거울삼아 자신을 교정하고 성장시킨다. 타인의 장점과 단점을 구분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나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 실수, 그릇된 생각과 나쁜 버릇까지 이해해서 나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사실 어떤 사람의 단점이 유독 잘 보이는 이유는 내가 그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꼰대라고 하기 전에 나 자신을 파악하고 내게 꼰대스러움이 한톨도 없는지, 나는 어디가서 꼰대짓을 무의식중에라도 한 적 없는지 스스로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김난도 교수가 천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했지만, 사실 어른이 되어서도 흔들리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과 반대로 현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다. 비슷한 하루가 반복되면서 미래가 불투명하면 인정욕구와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방황하게 되고 그때부터 자신의 인생 중 가장 영광된 과거를 주변사람에게 어필하기 시작한다. 항상 주변에 꼰대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렇기에 꼰대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평범한 우리는 평범하기에 누구나 잠재적 꼰대다. 본인의 경험을 심하게 긍정하는 부류는 항상 있기 마련이고, 그 와중에 자신의 경험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도 먹힌다는 믿음을 가진 부류도 항상 존재할 것이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에 살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통해 권위를 세우려는 시도도 계속될 것이다. 이런 꼰대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언과 간섭을 구분하고 그들처럼 되지 않도록 타인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유행에 휩쓸려 듣기 싫은 말 하는 상대방을 '어? 꼰대다.'라고 반사적으로 너무 쉽게 꼰대로 몰아붙이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꼰대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판단할 때 더 무겁고 신중하게 생각하기를 희망한다. 이런 태도가 타인에 대한 존중이며, 나아가 스스로를 존중하는 방법임을 깨닫는 지름길이라고 믿는다. 이런 길이 모여서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에 꼰대기질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건강한 자생력이 생겼으면 좋겠다.


결국 타인과 공감하고 자기 내면의 방향을 찾아야 꼰대의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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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랜드 부스터

- 가끔 요리하고 글 쓰고 노래하고 운동하는 남자.

- 본능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날것의 언어를 사랑하는 기획자.

- 종합광고대행사의 AE였다가 브랜드 마케터로 전향한 직장인.

- 세상을 브랜드로 이해하며, 브랜드 부스팅 전략을 탐구하는 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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