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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드부스터 켄 Oct 21. 2018

우리는 소확행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작고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바람직한지 검증이 필요하다.

1.

행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디에도 없으며 동시에 어디에나 있구나.
우린 앞만 보고 살도록 배웠으니까.
주위에 남아있던 행복을 놓쳐 빛나지 못하는 거야.
(김하온&이병재 - 바코드)


행복이란 무엇인가? 고등랩퍼2의 우승자 래퍼 김하온부터 고대 그리스의 현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논할 정도로 행복은 인류가 스스로 출제해 놓고 지금까지 풀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다. 과거 행복은 주로 철학자의 연구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일상의 대화, TV프로그램, 영화, 책 심지어 SNS에서도 행복을 탐구하고 있을 정도로 모두의 숙제가 되었다.


행복은 누구나 말하는 보편적 개념이지만 독립적 개념으로도 볼 수 있다. 똑같은 스테이크를 먹었다고 모두가 똑같은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위장이 얼마나 채워졌는지를, 어떤 사람은 고기의 질감을 우선순위로 세우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은 나의 성격과 취향에 따른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기에 계량할 수 없고 타인과 완벽하게 동일할 수 없다. 따라서 행복은 우열이 없으며 자기가 느끼기에 행복하면 그게 정답이다.


행복을 느끼는 기준은 시간과 환경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똑같은 '나'라도 자라면서 인생의 가치관이 변하기 때문에 어릴 때와 어른일 때 행복을 판단하는 기준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어렸을 때는 그저 좋아서 그림을 그렸었는데, 지금은 디자이너로 밥벌이를 하다보니 그림은 꼴도 보기 싫고 자기 아이는 디자이너 절대 안 시킬거라는 한 선배의 고백을 들으면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행복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건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생의 행복과 어른의 행복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출처: 고등래퍼2, Mnet)


그래서일까? 어렸을 때 누군가 행복을 이야기하면 항상 거대한 뜬구름을 잡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넌 언제 행복하니?'라고 질문을 받으면 허공을 노려볼 때가 많다. 뭔가 멋있는 말을 하고 싶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대답은 없었다. 사실 고기 먹을 때 가장 행복한데 왠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를 먹는 것만 좋아하는 단순한 아이로 볼까봐 두려웠다.


지금은 어떨까? 누군가 행복을 묻는다면 나는 당당하게 이야기 한다. 요리하고 글 쓰고 노래하고 운동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 해도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최근 들어 행복을 보는 사회적 관점이 점점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요즘 유행하는 '소확행'은 우리 사회가 행복을 '내가 느끼는 최소단위의 기쁨'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트렌드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선언이다. 행복은 적금같이 차곡차곡 쌓아놨다가 나중에 인출할 수 없다. 행복을 위해 굳이 거창한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이 매일매일 내가 작은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를 위해서는 나의 일상 속 기쁨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소확행의 창조자,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소확행의 창시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고,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을 보고, 청결한 하얀 셔츠를 입을 때 행복하다고 썼다.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관점은 무엇이 행복인지 정의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행복도 있어.'라고 일종의 가이드를 제시한다.


주변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 외에도 많다. 일상의 행복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이미 존재하는 개념이다. 먼 옛날 고대 로마 시인 퀸투스는 <송가>에서 '카르페디엠(현재를 소중히 하라)'을 노래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이 담긴 <랑겔한스섬의 오후>는 일본에서 1986년에 출간되었고 우리나라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1989년에 개봉했다. 스웨덴의 라곰(lagom), 프랑스의 오캄(au calme), 덴마크의 휘게(hygge) 등 소확행과 비슷한 라이프스타일을 해외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각종 기록을 보면 우리 조상님들이 산과 강의 멋진 경치에 취해서 그림에 담고 술 한잔 걸치고 한층 더 취해서 노래와 시조를 흥겹게 뽑아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주목받는 이유는 일상의 행복을 매력 있게 표현하여 현대인과의 공감대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럼 행복의 단위를 작게 보는 소확생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지금까지의 행복이 크게 멀리뛰기를 한 번 해야 닿을 수 있는 개념이었다면 소확행은 이런 멀리뛰기에 익숙치 못한 사람들을 위한 연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에 서투른 사람도 소확행을 통해 자주 작은 행복을 맛본다면 본인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


한창 달리기를 연습했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 연습장소는 한강이었는데, 1회 연습량을 5km로 정하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처음 1km정도 뛰고 아직도 한참 뛰어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이를 악물고 겨우 완주했지만 다음날 앓아누웠다.


몇 번 뛰다가 지쳐서 체대 출신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친구는 석촌호수의 조깅코스를 추천해주었다. 연습거리도 굳이 줄이지 말고 그냥 평소처럼 뛰라는 조언도 함께였다. 영문도 모르고 친구 말대로 같은 5km를 완주했는데, 신기하게도 한강만큼 힘들지 않았다. 그 사이 실력이 급성장했을까? 두 코스의 차이를 물어보니 친구는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거리를 알면 자기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어.


한강은 1km마다 거리가 표시되어 있어서 5번을 확인해야 연습이 끝나는 반면, 석촌호수는 100m마다 거리를 확인할 수 있어서 5km 기준으로 거리표시를 50번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강은 1km를 뛰기 전까지 내가 얼마나 뛰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석촌호수에서는 100m 단위로 확인할 수 있어서 내가 얼마나 뛰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달리기 초보인 내가 얼마나 뛰었는지 아는 것 자체가 앞으로 얼마나 달려야 하는지, 달리기 속도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고 뛰면서 체력을 관리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100m 표식을 확인할 때마다 작게나마 성취감이 생겼다. 달릴 수록 성취감이 쌓이니 신이 났다. 단지 뛴거리를 세는 단위가 짧아졌을 뿐인데 이 차이가 연습의 성과를 훨씬 높여주었다.


뛰다 지치면 러버덕이 응원해주었다...


동일한 거리를 뛰더라도 거리확인을 짧게 하면 성취감이 자주 생기는데 하물며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시간 위에서 달리는 우리도 행복의 기준이 작아질수록 자주 행복해지지 않을까? 행복의 크고 작음을 구분할 줄 안다면 인생이 훨씬 리드미컬 할 테니까. 리드미컬한 인생은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3.

일각에서는 소확행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본다. 비평가들에게 소확행이란 경쟁을 습관처럼 포기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삶을 선택한 나약한 청춘의 변명이다. 어떤 사람은 소소한 행복을 찾는 태도가 나쁘지는 않지만, 청년층이 큰 행복과 성취감을 누릴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렸다고 한다. 누군가는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를 하며 취업, 연애, 결혼 등 포기하는 부분이 많은 N포 세대가 오히려 취업, 연애, 결혼을 비웃는다고 본다. 마치 여우가 저 포도를 신맛이라며 자신의 포기를 합리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불행을 느낀다면 그 불행을 직면하고 고민해서 맞서야 하는데 회피하고 숨어서 거짓 평화에 만족한다면 발전이 없다고 한다.


전부 동의하지 않지만 일부 비판은 생각해볼 만한 의견이다. 소확행의 창시자 무라카미 하루키가 추구했던 소확행과 수입국인 우리나라에서 소확행이 탄생한 배경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소확행에 대한 몇몇 비판은 나름 일리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새벽 4시에 일어나 6시간 이상 글을 쓰고, 10km 정도 달리기를 한 다음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저녁 일찍 자는 생활을 엄격하게 반복한다. 지독할 정도로 집필에 몰입하다가 지쳤을 때 서랍 안의 깨끗한 순면의 내음은 본인에게 부여하는 작은 선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소확행이란 치열한 일상 속 잠깐의 휴식이자 일탈이었다. 인생의 균형감을 이루기 위한 자신만의 의미부여를 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자신에게 엄격한 목표관리형은 해야 할 목표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이루지 못하면 자신에게 혹독한 평가를 내린다. 하루하루 규칙적인 삶을 살면서 성취를 쌓는다. 큰 숲을 이루기 위해 나무부터 심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답답하기 때문에 자신만의 작은 행복단위를 찾는다. 자전거를 타거나, 식물을 기르거나, 요리를 하거나, 사진을 찍는 등 방법은 다르지만 자신의 활력을 재충전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런 사람들은 소확행이란 개념이 나오기 전에도 이미 일상의 행복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소확행의 유행이 지나가더라도 인생의 항상성을 유지한다.


우리나라의 소확행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성실한 삶에서의 재충전을 위해 탄생했을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소확행은 열심히 노력한 나에 대한 보상보다, 미래의 큰 행복이 어려우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일상의 행복으로 대신하자는 의식 속에서 탄생했다. 우리나라의 사회구성원 전부가 목표관리형 인간이 아닐뿐더러, 소확행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개념이 아니다. 소확행은 시대정신의 변화를 배경으로 한 청춘의 위로를 상징하는 단어다.


혹자는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힘들게 일하고 퇴근해서 맥주 한잔 먹는 게 소확행이며 하루의 낙인데, 이게 왜 재충전이 될 수 없나요?' 소확행만 보면 맞는 지적이다. 이미 하루의 재충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은 그 기준을 소확행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진 의문은 '일본에서 1986년에 출간된 <랑겔한스섬의 오후>의 소확행이 30년이 지난 지금, 왜 하필이면 대한민국에서 유행하는 것일까?'이다.


4.

왜 '지금' 소확행인가?


사회적 이슈가 된 언어는 나름의 맥락을 가진다. 소확행이 유행하는 이유를 위해 그 맥락을 더듬어보면 이전 유행어인 '힐링'과 '욜로'가 보이는데, 이 유행어 셋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 단어를 차근차근 들여다 보면 행복에 관한 우리 사회의 관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양권, 농경사회, 유교문화에 뿌리를 둔 우니나라는 해방 이후 어려운 나라경제를 살리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국가의 성장을 위해 근면성실하게 노력했다. 사실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급했기 때문에 국가의 성장이 절실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개인의 행복보다 집단의 행복이 더 우선시되는 시대였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 희생하는 국민부터 회사의 이익을 위해 야근하는 직원, 가족의 생계를 위해 취미생활도 없이 일만 했던 부모님까지. 집단의 행복을 위해 개인의 행복을 접어두는 게 당연했다.


IMF를 거쳐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치솟는 집값, 높은 물가, 높은 실업률, 불안정한 노년생활 등 살기 힘들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누군가가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당연한 줄 알았던 일상이 무너지고 N포 세대가 생겼으며 상처입은 사람들이 위로와 회복을 원했다. 자연스럽게 힐링(Healing)이 유행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작은 기쁨도 힐링이라고 여기는 이때부터 사실상 일상의 행복이 인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 가거나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 한잔만 마셔도 힐링이다. 저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함께 '#힐링'을 달기 시작했다. 이전에 '이 맛에 산다', '이런 게 내 낙이야'라는 표현이 종종 있었지만 힐링만큼 강렬하지 않았다. 모두가 힐링을 외치며 여행을 떠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자신의 행동에 치유의 의미를 부여했다. 이때다 하고 수많은 책과 노래와 영화와 TV프로그램이 힐링과 위로를 주제로 만들어졌다.


삼시세끼는 힐링 프로그램의 끝판왕이자, 훗날 소확행이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출처: 삼시세끼, tvN)


힐링은 어디까지나 불행을 치유하는 개념이기에 순수하게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표현이 필요하게 되었다. 마침 캐나다의 래퍼 드레이크(Drake)가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를 외쳤다. 뒤이어 오바마가 욜로를 언급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에 수입되었고 점차 '한 번 사는 인생 뭐 있어? 즐기자!'라는 모토를 바탕으로 한 욜로가 뜨기 시작했다.


힐링과 욜로 역시 소확행과 마찬가지로 비판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위로를 위한 신조어', '청춘의 변명', '약한 의지를 숨기려는 철없음', '앞날 생각 안하고 놀고 먹는 한량의 언어' '한 번 사는 인생을 헛산다' 등 비평가들의 혀와 펜은 날카로웠다. 마케터인 나 역시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힐링', '욜로', '소확행', 이 라이프스타일 삼대장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에서 광고컨셉으로 삼거나 광고카피의 키워드로 쓰기에 좋다. 주로 저관여 소비재 브랜드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에서 활용하기 좋은 소재인데, 소비자가 흔히 가질 수 있는 가성비에 대한 의심을 지우고 제품 혜택을 행복으로 치환하는 데 적합하다. 가격까지 합리적이면 구매가 더 빨리 이루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어가 순수함을 지키려면 무관심의 대상이거나 금전의 가치가 없어야 한다.


"인생 길어? 짧잖아! 야, 놀자!" 욜로를 컨셉으로 한 야놀자 광고 (출처: 유투브)


소확행은 욜로가 너무 현실에 매몰되어 돈만 쓰도록 부추긴다는 비판을 딛고 탄생했다. 힐링에서 욜로로, 욜로에서 소확행으로 각각 결핍된 부분을 보완하여 지금의 소확행이 된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행복을 강렬하게 추구하는 욕망은 힐링부터 뿌리내려 욜로라는 가치를 거쳐 소확행까지 가지를 뻗었다.


시대의 흐름이 개인의 행복을 존중해주는 방향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세 단어는 '청춘의 위로어'라는 탄생배경 때문에 모든 세대에게 공감받지 못하고 그 가능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일부 사람들이 철학적인 접근이 아닌 일순간의 유행으로만 판단해서 사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유행어로 사용한다면 세 단어는 의미가 비슷하다. 아래와 같이 아프리카의 케냐 밤하늘을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에 세 단어를 각각 응용한 글을 써본다면 다음과 같다. 단어만 바꿔도 충분히 의미가 통한다.




























ⓐ 와..진짜 케냐 하늘이다. 별 엄청 많아ㅠㅠ

우울해서 큰 결심하고 여행왔는데 제대로 #힐링


ⓑ 퇴사하고 퇴직금으로 케냐 여행왔는데 대박이다.

오길 잘 했다. 이게 진정한 #욜로


ⓒ 케냐 봉사활동.. 오지에 와서 씻지도 못하고 힘든데

하늘보니까 괞찮네. 이게 #소확행아닐까?



5.

비평가들의 비판이 그럴듯하고, 탄생배경이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소확행'을 무조건 배척의 대상으로 봐야 할까? 그저 언젠가 사라지는 유행어에 불과할까? 그러기에는 소확행의 잠재력이 아쉽다. 언어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인간이 언어를 다뤄야지 언어에 갇혀 지배당하면 안된다. 비평가들의 지적대로 '소확행'을 핑계삼아 자포자기의 삶을 정당화하는 사람, 자신의 행복기준이 뭔지 모르고 남의 SNS를 보고 그대로 따라하며 거짓행복을 과시하는 사람, 마케팅의 영향으로 자신의 소비패턴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전부 언어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이다. 리 사회가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소확행을 통해서 찾고 싶다.


먼저 언급했듯이 소확행은 불분명하고 거대한 행복을 쪼개서 작고 확실한 행복을 누린다는 뜻이다. 행복을 크기 단위로 재해석한 발상의 전환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관점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행복의 주인을 '나'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과거의 행복은 사회적 관점으로 판단하는 사회적 행복이었다. 즉, 나의 행복을 판단하는 주체는 '사회'와 '타인'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이견 없이 인정할만한 수준의 성취가 아니면 나도 남도 나의 행복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사업성공, 취업, 승진, 연애, 결혼, 내 차 마련, 내 집 마련 등 사회적으로 성취를 이뤘다면 누구나 행복하다고 느끼고 인정했다. 반대로 평균적인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면? 공부 못하고, 좋은 대학 못가고, 연애 못하고, 결혼 못하고, 취업 못하고, 아기 못 낳고, 그럴 듯한 집 못 구하면 부모님이, 친척들이, 이웃들이, 친구들이, 선후배들이 잔소리한다. '너 어쩌려고 그러니?', '빨리 해야지. 남들보다 뒤처지면 안돼.' 이런 말을 들으면 내가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지금도 그런가? 아니다. 공부 안하고, 대학 안가고, 연애 안하고, 결혼 안하고, 취업 안하고, 아기 안 낳고, 집 안사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내 삶의 방식은 내가 정하고 책임지는 것이지 이 방식에 대고 뭐라 하면 꼰대 소리 듣기 딱 좋다. 굳이 타인을 납득시키지 않아도 되는 시대다. 과거 사회적 성공을 통한 행복은 '타인의 기준'이거나 '타인과의 비교'였지만, 지금은 '나의 기준'이고, '과거의 나와 비교'다. 물론 아직까지도 타인의 판단에 갇히는 사례는 많다. 이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에 가깝다.


6.

라캉이라는 양반이 있다. 이 양반이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예를 들어 어떤 유치원생이 장난감으로 놀고 놀이가 끝나자 장난감을 한쪽에 정리했다. 유치원 선생님이 기뻐하며 칭찬한다. 집에서 똑같이 해봤더니 부모님도 칭찬한다. 칭찬받으니 기분이 좋다. '아 장난감을 치우면 기분이 좋구나.'라고 느끼고 그 다음부터 장난감을 열심히 치우며 칭찬을 기대한다. 수학시험을 100점을 받아오자 부모님이 기뻐한다. 공부를 잘하니까 부모님과 선생님이 칭찬해준다. '아, 공부를 계속 잘해야겠다. 그럼 칭찬받아서 기분이 좋겠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1901~1981)


왜 장난감을 치워야 하는지, 왜 공부를 잘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가 없으면 주변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게 된다. 장난감과 공부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 착각은 훗날 취업, 결혼 등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와 직결된다. 좋은 직장 취업하고, 멋진 연애하고, 누군가와 결혼하고 아기를 가지는 것 또한 이 범주에서 멀지 않다. 우리 대부분은 본인의 의지를 100% 관철하지 않고 주변의 기대감을 적절히 충족시켜 주는 타협의 삶을 살고 있다. 이런 방식이 무난하게 사는 방법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쯤은 남들 사는대로 비슷하게 사는 인생이 정말 나의 행복을 위한 기준인지 사회가 요구하는 행복기준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주변 기대에 부응하며 자랐다면 어른이 된 다음에도 나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고 오히려 타인의 기준을 따르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런 사람은 정작 어른으로서 독립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때 판단을 하지 못한다. 왜?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고 내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는 소리다. 욕망이 충족되어야 행복이 따라오는 건데, 결국 욕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자신의 행복기준을 모른다는 말이다.


소확행이라는 언어를 사용할 줄 안다고 해서 본인이 일상의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단정짓는 건 이른 판단일 수 있다. 흐르는 시대 안에 산다고 해서 나도 덩달아 흐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내가 노력해서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지 않으면 물 속의 돌처럼 가라앉을 뿐이다. 본인이 정말 자신만의 소확행을 가지고 있는건지, 아니면 남의 소확행을 모방하면서 행복하다고 자기최면을 걸고 있는건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희안하게도 주위의 욕망을 모방하는 사람들은 꼭 따라할 수 있는 만만한 상대만 모방하려 한다. 나를 잘 아는 것은 스스로에게 기쁨을 주고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준을 아는 것이다. 자신이 행복하고 싶은지, 행복해보이고 싶은지 구분해야 한다.


소확행의 기준이란 곧 내가 느끼는 최소한의 기쁨을 아는 것인데, 이는 사회적 행복을 아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모두가 인정하는 평균적 행복은 다 인지하고 있지만, 내가 언제 제일 행복한지는 자신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객관적이라는 핑계로 타인은 그렇게 잘 평가하면서 정작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자신을 객관화하여 오직 1대 1로 상대한다고 상상해보자. 여기서 속임수는 필요없다. 내가 아니까. 나 자신을 진실로만 대해야 나의 욕망 깊숙한 곳까지 파헤칠 수 있다.


자신을 마주보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나 자신과는 오직 진실로만 대해야 되기 때문이다.


7.

광고대행사 인턴 시절, 회사일이 익숙해져서 나도 모르게 나사가 풀어지고 방만했을 때였다. 신문광고를 만드는 프로젝트의 마지막 교정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광고주의 확인을 받고 데이터를 신문사에 넘겨도 좋다는 말을 제작팀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한참 지나도 데이터를 넘겼다는 대답이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해서 제작팀에 찾아갔더니 한 디자이너 선배가 신문광고 이미지를 모니터에 띄워놓고 작업하고 있었다.


"선배님, 수정할 게 있나요? 광고주 컨펌 끝났는데요?"

"아, 별 건 아니고 이미지 퀄리티를 조금 더 높이고 싶어서."

"네? 지금요?"

"응, 이미지 작업할 시간이 촉박해서 적당히 작업했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네."

"이거 이미 광고주가 승낙한건데 그냥 넘겨도 되지 않을까요? 누가 안다고 그러세요?"


신문사에 광고데이터를 전달하는 마감시간은 아직 멀었다. 나는 그냥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광고집행을 허락해주는 클라이언트가 수락을 했는데 뭘 더 한다는 말인가?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내 말투에 약간 짜증이 섞여 있었는지 디자이너 선배는 눈을 크게 뜨면서 나를 가만히 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알잖아.


그 때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업무를 사수의 기준, 회사의 기준, 광고주의 기준으로만 판단했던 나로서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그 디자이너 선배는 재직하던 내내 그렇게 자신만의 기준을 고수했다. 프로젝트의 데드라인 때문에 시간이 모자라도 남의 탓 없이 묵묵히 자신의 아이디어와 작업물의 퀄리티를 유지했다. 그는 타인의 기준을 위해 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속이거나 합리화하지도 않았고 본인의 취향에 맞춘 기준이 아닌,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결과물을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다. 적어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는 욕망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불행하게는 만들지 않았던 것 같다.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는 집은 없지만 생각과 취향은 명확한 사람이다. 삶의 낙은 담배와 위스키와 남자친구. 이를 위해서는 집도 포기할 수 있다. 타인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을 지키며 사는 미소의 모습은 이름 그대로 미소가 지어진다.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서 그녀 혼자만이 판타지로 느껴진달까. 시대는 변하지만 그 속의 개인의 일상은 변함 없는 모순 속에서 본인이 옳다고 믿는 단단한 신념이 있다면 주변상황에 상관없이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할지 알 수 있다. 영화 소공녀는 미소를 통해 소확행에 공들이는 여자의 표본을 보여주고 싶었던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염치, 염치가 없어. 나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
미소야, 나는 네가 염치가 없다고 생각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이 술담배라는 것도 솔직히 진짜 한심하고
그것 때문에 집도 하나 못 구해가지고 우리집에 지내면서
그런 것들까지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네가 뭐가 좀 잘못됐다고 생각 안 하니?


주변에 휩쓸리지 않으며 자기만의 삶을 일군다고 생각하지만 그 방식이 오히려 주변에게 불편함을 끼칠 수도 있지 않을까? 주인공에게 쏘아붙이는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착잡했다. 미소의 인생은 응원하고 싶으나 막상 나보고 그렇게 살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3초 안에 긍정의 대답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소확행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확고해질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되물어보게 된다.


8.

소확행이든 행복이든, 내가 무엇을 확고하게 원하는 인간인지 파악하는 게 1단계다. 이는 결핍감과도 연결된다. 뭐가 부족한지 아는 결핍감과 모르는 결핍감은 다르다. 내 욕망의 주인이 되려면 자기 객관화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뭔지 기억을 못한다. 따라서 자신이 무엇에 흥분하고 자극을 받는지 알아내야 한다. 여러 가지 상황에 나를 노출시키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있을 때 새로운 것을 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자발적인 고립생활이다. 잠깐이나마 나를 사회와 단절시키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이다. 펜과 종이로 메모를 해도 좋다. 만약 좋아하는 걸 적지 못했다면 싫어하는 걸 적어도 상관없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중요하다.


모험이 부족하면 어른이 될 수 없다. 하루만에 성공하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너무 이기적이다. 서른 살이 되서야 자신을 돌아본다고 30년을 통째로 볼 수 있을 것 같은가? 그 말은 30년 동안 찐 살을 하루만에 빼겠다는 소리와 같다. 스스로에게 양심이 있어야 한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려면 다른 환경에 나를 던져야 한다. (출처: 숲속의 작은집, tvN)


자신의 행복기준을 파악하는 과정에는 불행도 포함된다. 불행 또한 우리 인생의 일부분임을 인정해야 행복의 기준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는 탤런트 박신양의 이야기가 가장 좋은 사례가 될 것 같다.


러시아 유학 1년차, 유학생활이 힘들었던 박신양은 '선생님, 나는 왜 이렇게 힘든가요?'라고 러시아 연기지도 선생님에게 투정을 부렸다. 선생님은 대답 대신 이것을 공부하라며 러시아 시집을 줬고 박신양은 책의 한 구절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힘들지 않은 인생만이 행복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알고보면 힘든 인생도 우리 인생이다. 어쩌면 즐거울 때보다 힘들 때가 더 많을 수도 있는 게 인생인데, 만약 나의 힘든 시간을 사랑하지 않으면 나의 인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박신양은 당신의 가장 힘든 시간까지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면 좋겠다고 담당하게 이야기한다. (박신양 영상보기)


박신양은 인생의 불행까지 사랑하라고 조언했다. (출처: 스타특강, tvN)


행복은 당연하지 않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은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닌, 과거의 나에게 빚진 것이다. 사회적 행복은 물론이고 내가 소확행이라 부르는 일상의 행복조차 과거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하다. 지금의 나는 지금까지 나의 합이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했기에 대학에 들어와서 친구들과 즐겁게 놀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취업준비를 열심히 했기에 직장에 다니면서 퇴근 후 좋아하는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은 의식하면 오히려 멀어진다. 행복을 원한다면 행복을 위한 노력과 과정까지 포함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는 청년 세대에게 자신 있게 행복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빛나는 미래를 보여줘야 행복을 찾아 노력할텐데 아직은 준비가 덜 되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압박으로 인해 힐링에서 욜로로, 욜로에서 소확행으로 점점 행복의 기준이 하향조정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예 누구도 뭐라할 수 없는 성역인 '자신만의 행복'으로 말이다. '이게 내 소확행인데 무슨 상관이에요? 굳이 큰 행복이 없더라도 전 충분히 행복하니까 내버려두세요.'


사회가 청춘에게 희망을 주기보다 미래가 불확실하니 너희가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요정도라고 체념을 권장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짜증이 날 수도 있겠다. 왜 우리 세대만 이렇게 힘드냐고, 기성 세대는 이 고통을 모른다고 할 수도 있다. 절박하지 않은 세대는 없다. 20살의 고민이 10살짜리 아이 두 명의 고민과 같지 않다. 각 세대에는 세대만의 고유한 고민이 있다. 갓난아이조차도 살아남으려고 목 놓아 울며 엄마 젖을 찾는다. 데이터로 비교하면서 우리 세대가 더 힘들다고 하는 건 편가르기 밖에 되지 않는다. 본인세대가 더 힘든 거 증명해서 동정이라도 받을 생각이 아니라면 굳이 세대끼리 비교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비교한다면 다른 나라가 가진 행복의 관점을 보는 게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인들이 일상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유가 죽음을 기억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어로 메멘토모리(Mememtomori)는 번역하면 '죽음을 기억하라'다. 나는 반드시 죽으며 이는 피할 수가 없고 따라서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사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프랑스 사람들이 죽으면 다 사라진다고 체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하루하루 소중하게 보내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한 번 뿐인 인생 뭐 있어?'와 같은 뜻이 아닌 '한 번 뿐인 인생이기에 나를 사랑하며 제대로 살겠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프랑스인들에게 배울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애인을 사랑하게 되면 애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알게 되듯이,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잘 알게 된다. 자기 사랑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다. 이는 자존감하고도 연결되어 있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나를 존중하는 심적 상태가 자존심이라면, 남과 상관없이 나 자신을 긍정하는 감정이 자존감이다. 100억 원 자산가가 자신의 재력에 자존심을 가진다면, 이 자존심은 1,000억 원 자산가 앞에서 무너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재산이 중요할리가 없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는 사람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고 행복의 지름길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상황에서 방탄소년단이 UN총회에서 자신을 사랑하라고 진정성을 담아 전달한 메시지는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을 준다.(방탄소년단 연설 전문보기)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누구이고 싶은지를 모두 포함해 나를 사랑하세요.
(방탄소년단 UN연설 中)


9.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각각 다르다.'라고 썼으나 소확행의 시대에는 맞지 않는 말이다. 각자가 추구하는 행복은 제각각 기준이 다르며, 행복을 얻는 속도도 각자 다르다. 어떤 사람은 쉽게 행복을 느끼는 성격이지만, 어떤 사람은 큰 행복을 위해 우선 작은 행복부터 연습할 필요가 있다.


한강에서 힘들게 뛰다가 석촌호수에서는 수월하게 뛰었듯이,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데 서툴고 항상 불행에 예민하다면 일상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자신만의 소확행을 찾아보길 권한다. 물론 그 소확행은 남이 정한 기준이 아닌 나의 마음이 시키는 방향을 따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에서 벗어나 나만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작고 확실한 행복을 마음 속에 계단처럼 쌓다 보면 훗날 그 계단을 딛고 더 큰 행복을 수월하게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런 방식이 남들보다 뒤쳐지는 인생은 아니냐고? 살다보면 걷는자도 있고 뛰는자도 있다. 각자의 속도에 맞춰 리듬감 있게 살면 된다. 일상의 행복을 하나씩 부지런히 만나다 보면 작은 행복이 서로 연결되어 결국 인생의 큰 행복에 닿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가 소확행에만 머무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확행은 더 큰 행복을 얻기 위한 일시정지의 개념이지 완전 정지가 아니다. 삶은 오케스트라고 우리는 마에스트로이며, 아직 곡은 끝나지 않았고 하이라이트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이 음악을 끝내기에는 아직 우리 인생은 길다.


달리는 게 힘들면 걷거나 쉬어도 된다. 각자에게 알맞은 리듬과 속도가 있다. 단, 그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한다.


소확행이 유행한다고 해서 고통을 포함한 큰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의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있고 현실의 불행과 고통을 자기 인생의 일부로 인정하고 인내하여 훗날의 행복을 기대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도 있다. 사막을 건너는데 생수통을 목마를 때마다 마시는 사람과 참았다가 마지막에 마시는 사람은 각자의 인생관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어느쪽도 틀리지 않았다. 다를 뿐이다. 단, 자기 물 다 마셔놓고 남의 물을 달라고 하지는 말아야 한다. 한 번도 목말라본 적 없으면서 자신의 물을 지키느라 고생한 사람을 탓하는 건 비겁한 행동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행복이 자기 내부의 삶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토록 치열하게 행복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걸지도 모르겠다. 만약 한 사람에게 허락된 행복의 총량이 존재한다면, 그 행복을 어떻게 분배하여 내 삶을 꾸려나갈지는 결국 본인의 선택이다.


결국 나에게 맞는 행복리듬을 알아야 내 인생의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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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랜드 부스터

- 가끔 요리하고 글 쓰고 노래하고 운동하는 남자.

- 본능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날것의 언어를 사랑하는 기획자.

- 종합광고대행사의 AE였다가 브랜드 마케터로 전향한 직장인.

- 세상을 브랜드로 이해하며, 브랜드 부스팅 전략을 탐구하는 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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