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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드부스터 켄 Nov 15. 2018

못난 클라이언트는 어떻게
에이전시를 먹여살리는가?

목적지 없이 헤매는 자동차일수록 연료를 허비한다.

1.

어떤 업무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기업 내에 부족하거나 해당 업무를 해결할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싶을 때 

기업은 외주업체나 대행사(agency)를 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외주를 주는 목적은 어떤 문제(problem)가 생겼을 때 그 해결방법(solution)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기 위함이다. 광고, 브랜딩, 디자인, 경영컨설팅, 소비자 조사, 홈페이지, 심지어 사무실 청소까지 에이전시의 영역은 다양하다.


과거 내가 몸 담았던 광고업계에서는 클라이언트를 흔히 '광고주'라고 불렀다. 장난스럽게 부르면 '주님'이라 표현할 정도로 광고주의 권한은 막강하다. 요즘은 괜히 꿀리기 싫어서 클라이언트라고 부르는 경향도 보이지만 광고주라는 단어의 힘은 여전히 유효하다. 광고에 가장 많은 자원과 의지를 투자하고 의사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기 때문에 당연히 계약상 갑(甲)의 권리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오죽하면 '좋은 광고는 광고주가 만든다'라는 격언이 있겠는가.


광고주에게 어카운트 서비스(account service)를 제공하는 광고대행사의 광고기획자를 AE(Account Executive)라고 부른다. AE는 광고주와 광고대행사, 두 기업 사이에서 서로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조율자의 역할을 한다. 광고주는 AE를 통해 광고대행사에 자신의 의사, 의견, 피드백, 기타 불평불만을 전달하고, 광고전략, 크리에이티브, 매체, 리서치 등 광고대행사 내부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업무를 AE가 자신을 대신하여 통제해주길 원한다. 반대로 광고대행사는 AE에게 광고주의 신뢰를 받아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광고수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어카운트 서비스를 기대한다. 따라서 AE는 서로의 입장을 고려할 수 있는 세심한 균형감각을 발휘해야야 한다.


AE는 광고주 편도 되었다가 광고대행사 편도 되어야 하는 박쥐의 운명이다. 균형감각이 없는 AE는 생존하기 힘들다. 


보통 광고주가 좋은 AE로 인정하는 사람은 광고업무에 대한 전문지식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 봤을 때 같이 일하고 싶은 매력도 겸한다. 겉으로 보기에 광고주(기업)와 광고대행사(기업)는 기업 간의 거래관계지만, 한 단계 더 들어가보면 광고주의 광고담당자(사람)와 광고대행사 AE(사람)의 인간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AE가 처신을 잘못해서 광고주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광고대행사 실력이 그저 그래도 담당자와 AE의 인간관계가 좋아서 기업 간의 거래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많다.


2.

내가 AE로 재직하던 시절은 회사가 한참 성장하는 시기라서 정말 다양한 업종의 광고주를 만날 수 있었다. 많은 경험이 쌓이면서 광고주를 어느 정도 분류할 수 있는 기준이 자연스럽게 생겼는데 그 기준은 단 두 가지다. 광고대행사 AE입장에서 모든 광고주는 수익성과 똑똑함으로 분류할 수 있다.



ⓐ 똑똑한 투자자

AE님, 잘 봐요. 이렇게, 저렇게 해서 요렇게 해주시면 되요.


ⓐ와 일하게 된 AE는 정말 복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수익성이 좋으니 광고대행사도 성장하고, 똑똑한 광고주와 일하니 AE도 업무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는 기본적으로 회사는 비전이 명확하고 예산이 탄탄하며 업무방식이 통일되어 있어서 일하기 좋은 기업이다. 한 방향을 보고 일하기 때문에 실무진의 판단을 윗사람이 본인의 취향으로 뒤집는 경우가 적다.


ⓐ 같이  똑똑한 광고주는 그 영민함 때문에 AE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대다. 조금이라도 헛점을 보였다가는 바로 대행사 교체지만 뛰어난 능력을 입증한다면 안정적인 비즈니스 파트너가 될 수 있다. 광고주와 광고대행사가 같이 합을 맞추려면 서로를 잘 알아야 하고 시간이 필요하다. 신규 광고대행사를 만날 때마다 이런 비용이 들기 때문에 대행사를 바꾸는 건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는 시간과 애정을 들여서 좋은 광고대행사를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만드는 똑똑한 투자를 한다.


똑똑한 기업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모이는 법. 광고주 담당자도 일을 영리하게 하는 편이어서 광고대행사에게 요청하는 요구사항을 명확하게 정리하고 업무 퀄리티의 기준을 세울 줄 안다. 예를 들어 어떤 광고에 대한 회사 내의 기대치, 혹은 담당자의 기대치가 5라면 OT자리에서 광고대행사에게 5를 제시한다. 이는 일종의 기준이자 경고다. '나는 5까지는 생각했으니 당신은 최소 6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달라'는 의미다. 앞에서 밝혔듯이 외주는 내가 해결하지 못하는 업무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에 일을 맡기는 행위다. 퍼포먼스를 기준 이하로 내놓는 광고대행사는 ⓐ에게 필요없다.


항상 예산이 많은 프로젝트만 할 수는 없지만, 만약 ⓐ와 적은 예산의 프로젝트를 하더라도 다른 유형의 광고주보다 수익성이 좋다. 기계적 생산시설을 기반으로 하는 제조업과 달리 광고업의 생산력은 사람에 기반한다. 인건비 기준으로 인풋이 계산되기 때문에 일을 적게 할 수록 수익효율이 좋을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일을 적게 한다는 건 태업이나 게으름이 아닌, 쓸데없는 일이 아닌 꼭 필요한 일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광고대행사를 향한 디렉션이 명확하다. 광고대행사 입장에서도 광고주의 요청사항이 명확하면 갈팡질팡하지 않고 필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실력만 좋다면 ⓐ는 계속 일하고 싶은 훌륭한 광고주다. ⓐ와 일하는 광고대행사에게는 하나의 시안을 가지고 3일 동안 23번 수정했다가 결국 처음 시안이 제일 좋았다며 다시 돌아가는 슬픈 스토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는 마케팅 뿐만 아니라 광고 실행에도 능통하기 때문에 AE를 긴장시킨다. ⓐ는 대행사를 리드하며 리스크에도 관대하지만 무능력한 대행사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AE나 제작팀이 담당자보다 수준이 떨어지면 과감하게 교체를 요구하기도 하고, 심하면 경쟁PT도 마다하지 않는다.


ⓑ 가난한 영재

이 아이는 커서 훗날 똑똑한 투자자가 됩니다


ⓑ는 굉장히 안타까운 케이스다. 보통 예산이 풍족하지 않은 스타트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잠재력이 풍부한데 아직 성장하지 못한 아이다. 아이니까 돈도 잘 못 번다. ⓑ는 똑한 사람들이 모여서 꿈도 많고 하고 싶은 욕망도 가득한데 돈이 없다. 이런 회사의 담당자를 만나면 굉장히 난감하다. 뭔가 이 사업이 잘 될거 같고 도와주고 싶긴한데 이 회사가 돈이 없다. 수익성이 안보이는 회사에서 광고를 만드는 건 한계가 있다. 나도 회사의 월급쟁이라 수익성이 없는 일을 하자고 회사에 말하기도 애매하다.


누가 뭐라 해도 광고는 자본주의의 꽃이다. 광고 효과는 돈에 비례한다는 진리를 애써 무시하고 적은 돈으로 최고효율을 내고 싶다고 말하는 광고주 담당자의 얼굴은 애처롭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하다. 이런 경우는 AE가 재량껏 도와주는게 상대방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똑똑한 투자자(ⓐ)는 광고대행사에게 투자하지만 똑똑한 광고대행사는가난한 영재(ⓑ)를 똑똑한 투자자(ⓐ)로 키워낸다. 미래에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어린 광고주를 발굴하는 것도 광고대행사의 능력이다. 이런 광고주는 훗날을 대비해 마케팅과 광고의 효용성을 계속 주입해야 한다. ⓑ의 마케팅 예산이 늘어날수록 광고대행사의 통장도 비옥해진다.


스타트업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기업이다. 투자를 받으면 어차피 그 돈으로 마케팅을 해야 한다. 짧은 시간 안에 시장을 만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대대적인 광고다. 오픈마켓, 배달앱, 직장인교육, 신선식품 등 수많은 스타트업의 신규시장이 광고를 통해 급성장했다. 이때를 기약하고 초반에 관계를 잘 맺어놓으면 나중에 박씨를 물어다주는 까치를 만날 수도 있다. 물론 광고대행사가 그때 ⓑ가 요구하는 미션을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어야 박씨를 받을 수 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기 때문에 무조건 과거에 도와줬다고 해서 지금 같이 일하리라는 믿음은 금물이다. 비즈니스 세계는 생각보다 냉정하다.


ⓒ 트러블메이커

나는 너를 돈 주고 샀어. 내 말을 들어


광고대행사 입장에서 최악의 클라이언트다. 사실 ⓒ를 처음부터 거르고 아예 거래를 하지 않으면 상관없겠지만 생각보다 교활하다. 가장 흔한 방법은 광고대행사가 혹할 정도의 큰 예산으로 살살살 꼬셔서 대행계약을 맺은 이후 가차없이 광고대행사를 쥐어짠다. 예산이 줄었다는 간단한 이유로 처음 제시했던 예산보다 적은 예산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 예사다. 광고영상 하나를 가지고 의미없는 수정을 수십번 반복하고 말도 안되는 일정을 요구한다. 당연히 처음에 AE가 잡았던 수익성 체계는 형편없이 망가진다. 이는 광고주의 예산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닌, 광고대행사의 투입노동량이 절대적으로 비대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 담당자는 일을 비효율적으로 처리하고 자신의 디렉션에 무책임하며 비즈니스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무례하다. ⓐ의 담당자와 정반대라고 보면 된다. 책임소재를 남기지 않으려고 자신이 써야 하는 메일이나 문자보다 말만으로도 충분한 미팅이나 전화를 선호한다. 내가 만난 어떤 광고주는 월요일에 보고해야 하는 보고서를 당당하게 일요일에 요구했다. 심지어 본인이 작성해야 하는 보고서였다.


기업의 광고담당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 담당자는 멍청함의 화룡정점을 찍는다. 본인과 회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모른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도 못한다. 밥 뭐 먹을까 물어보면 '아무거나'라고 대답하고 냉면은 질겨서 싫고 삼겹살은 더워서 싫고 중식은 기름지다고 싫다는 친구와 비슷하다.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때가 되서야 기획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담당자는 그나마 양반이다.


ⓒ의 담당자는 자신이 책임지고 기업을 대변하여 광고대행사에게 요청하지 않는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르고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대신 광고대행사를 전문가라고 치켜세우며 자신에게 필요한 사항이 뭔지 파악해달라고 읍소한다. 광고대행사는 광고주와 소비자 사이에서 독립적인 제 3자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의의가 유의미하지만, 광고주 내부의 욕망까지 전부 파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광고대행사가 애써 고민하여 아이디어를 가져오면 그대로 윗사람에게 보고하고 그 와중에 성과는자기가 가지고 실책은 광고대행사를 탓한다. 이런 회사의 의사결정자 역시 명확한 업무기준이 부재한 상태에서 본인의 취향으로 판단한다. 대표부터 팀장까지 모두 자기 취향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의사결정의 수준이 엄마에게 사탕 사달라고 하는 유지원생보다 저렴하다. 


ⓒ는 돈도 안 되고 불만도 많고 500원 주고 빵하고 우유 사오고 300원 남겨오라는 디렉션이 많기 때문에 빨리 짤라내는 게 이득이다. 


ⓓ 돈많은 철부지

싸고 재미있는 영상을 빨리 만들어주세요. 우리 칸 광고제 갈 수 있겠죠?


대한민국 광고주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사실상 이런 돈많은 철부지 덕분에 광고업계가 먹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의 단점은 다 가지고 있으면서 돈은 돈대로 쓰는 부류다. ⓓ의 가장 큰 문제는 쓸데없이 광고비가 낭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는 마치 목적지를 못 찾고 헤매는 자동차와 같다. 여기저기 방황하는 자동차는 필요 이상으로 연료를 많이 먹을 수 밖에 없다. 목적지를 못 찾았어도 자동차가 움직여야하니까 연료 넣는 것을 멈출 수도 없다. 이 모든 부담은 고스란히 운전자의 몫이다.


부족한 제품력을 광고로 보완하려는 욕심이 광고업계를 먹여살린다. 혈기왕성한 AE시절, 나는 남들과 똑같은 제품/서비스를 가지고도 광고만 잘하면 어떻게든 매출이 올라갈 거라는 기대를 가진 광고주를 제일 경멸했다. '광고에 쓰는 비용은 혁신을 하지 않는 대가로 치르는 세금과 같다'는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경쟁사를 카피하거나 USP도 변변치 않은 제품/서비스를 광고 하나 잘 터지면 모든 게 잘 될거라는 식으로 말하는 광고주를 보면 동정심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광고주들이 있어야 우리 같은 광고대행사가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씁쓸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광고의 주인공인 제품/서비스가 혁신적이면 광고도 혁신적일 수 밖에 없다. 애플의 광고가 혁신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이미 제품부터 혁신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광고쟁이 입장에서 아이폰처럼 세상의 기준을 바꿀만한 힘을 가진 제품/서비스를 다루게 되면 부담스럽지만 묘한 의무감이 든다. 이 아이를 잘 다듬어 세상에 잘 보여줘야겠다는 책임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책임감을 느낄 확률은 거의 없다.


이런 광오한 표현을 쓸 수 있는 이유는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배경이기 때문 아니겠는가. 


물론 세상의 모든 제품/서비스가 애플처럼 혁신적일 수는 없다. 선발주자만큼 혁신적이지 않더라도 뭔가 더 나은 USP를 개발해서 차별화하려는 시도도 필요하다. 후발주자들이 선발주자를 따라서 시장에 진입해줘야 시장의 볼륨이 커지고 소비자들이 인지할 수 있다. 2007년 1월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세상에 내놓아 스마트폰 시장을 재정의했고 세상은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후발주자로 삼성전자의 갤럭시S가 따라오지 않았다면 스마트폰 시장은 이렇게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LG전자가 미국/유럽에나 있던 건조기의 개념을 들여왔지만 뒤따른 후발주자들이 없었다면 건조기 시장은 소비자들이 알지도 못한채 가라앉았을 것이다. 배달의민족 혼자 떠들지 않고 요기요와 배달통이 같이 떠들었기 때문에 배달을 모바일로 시키는 습관이 생겼다. 


제품/서비스 가치는 0이면서 광고가치를 5만큼 더하면 소비자에게 5만큼의 가치총량이 전달될거라고 믿는 ⓓ가 많다. 그러나 광고는 제품가치에 덧셈보다는 곱셈으로 연산하는 게 맞다. 좋은 광고는 제품/서비스의 매력을 몇 배로 빛나게 해준다. 단, 기본적으로 제품가치가 1 이상은 되어야 유효하다. 마케팅의 처음과 끝은 제품이다.


USP도 없고 특징도 없는, 그야말로 경쟁사와 별 다를 게 없는 제품/서비스는 시장의 미꾸라지 역할을 한다. 웅덩이의 미꾸라지는 꼬리를 흔들어 물을 흙탕물로 만든다. 흙탕물로 가득한 물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런 미꾸라지 같은 제품/서비스가 많으면 시장정보가 불투명하게 되어 소비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광고는 여기에 물장구를 더 보탠다. 비슷비슷한 제품/서비스 사이에서 광고주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과장과 포장을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현대인이 광고를 믿지 않는 건 수많은 현혹을 거듭했던 광고업의 원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제품/서비스에 집중하지 않고 시장에서의 성공을 광고에 의존하는 경향은 책임회피이자 헛돈쓰기에 가깝다.


특히 ⓓ 같은 광고주가 즐겨 요청하는 일이 '바이럴 영상제작'이다. 광고담당자가 OT자리에서 저예산을 들이밀며 '바이럴 영상하나 만들어주세요' 라고 말한다면 일단 광고주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무지하다고 보면 된다.


굳이 '바이럴 영상'을 따로 만들 필요 없이 모든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은 '바이럴'이 궁극적인 목표다. 바이럴은 바꿔 말하면 자연스러운 구전효과다. '야, 너 OOO 봤어?'라고 했을 때 OOO에 들어가면 성공이다. SNS가 생기고 모바일이 일상화되면서 바이럴의 의미는 구전뿐 아니라 공유와 전달까지 확장되었지만, 그 본질은 항상 같다. 바로 자발적인 확산이다. 굳이 영상이 아니더라도 바이럴은 가능하다.


애초에 광고매체에 돈을 쓰면서 광고영상을 집행하는 이유는 이 자연스러운 확산(Viral)이 자연스럽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광고를 지인에게 공유하거나 퍼트리지 않으니 일부러 돈을 써서 확산시키는 것이다. 


업계에 퍼진 잘못된 인식은 '바이럴 영상=디지털 영상=저예산 영상'이다. 수확체감의 법칙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래도 광고영상은 돈을 쓸 수록 퀄리티가 높아진다. 그리고 퀄리티 높은 영상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 영상을 보는 채널이 TV든, 유튜브든 마찬가지다. 바이럴 영상에 대한 판단은 예산이 아닌 공유할만한 정보, 재미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이 부분을 간과하고 넘어가버리면 오해가 발생한다. 숙제를 내주는 광고주 입장에서는 뭔가 저예산으로 영상을 확산시키고 싶어서 바이럴 영상을 요청했는데, 숙제를 푸는 입장인 광고대행사에서는 바이럴 영상을 영상 내용의 매력으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사람이 느끼는 매력의 척도가 다 다르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예산이 많지 않아서 고퀄리티의 매력은 무조건 제외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B급, 저퀄리티, 억지유머 등 뿐이다. 당연히 자발적인 공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집행하는 광고야 돈을 쓰니까 어떻게든 본다는 전제 하에 운영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디지털 채널에서 운영되는 바이럴 영상은 보지 않는다고 가정해야 한다. 광고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특정 광고를 좋아한다면 그건 광고가 아닌 '볼 가치가 있는 재미있는 콘텐츠'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광고매체에 집행하지 않는 바이럴 영상도 소비자는 광고의 일종으로 본다. 조금이라도 어색하게 광고성 정보가 들어가면 귀신같이 알아챈다. 그리고 이런 억지성 내용은 보통 ⓓ의 요청사항으로 적용된다. 바이럴 영상제작을 매력의 측면에서 보는 광고대행사 제작팀은 이런 짓을 지양한다.


제품/서비스 판매가 아닌 바이럴 그 자체에만 최적화된 영상을 만들고 싶다면 '어떻게 광고로 보이지 않을 것인가'가 아닌 '광고로 보이더라도 어떻게 재미지게 만들까'를 고민해야 한다. 놀랍게도 이런 바이럴 영상이 저예산일수록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전형적인 잘 되면 내 탓, 안되면 남 탓이다. 한쪽에서는 시도한게 중요하다며 서로 위로해주기 바쁜 촌극이 펼쳐진다.


혹자는 여러가지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 ⓐ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하지 않냐고 말할 수 있다. ⓐ와 ⓓ, 둘 다 여러가지 시도를 하는 건 맞지만 시도의 결이 다르다. 서울에서 부산을 간다고 했을 때 ⓐ는 기준을 준다. 시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광고대행사는 비행기나 KTX를 제안할 것이다. 기억에 남는 경험을 기준으로 한다면 광고대행사는 중간중간 휴게소에서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자동차나 자전거를 제안할 것이다. 저예산을 기준으로 한다면 무궁화호를 제안할 지도 모르겠다. ⓐ와 반대로 ⓓ는 부산 갈거니까 제안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달라고 할 것이고, 심지어 도착지를 설정하지 않아서 거꾸로 KTX를 타고 갈 수 있는 모든 여행지를 리스트업 해달라고 징징거리는 타입이다. ⓐ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3.

나는 광고대행사 AE에서 일반기업의 마케터로 이직했다. 마케터로서 여러가지 일을 하고 광고도 그 중 하나다. 광고주의 입장이 된 것이다. 이직한 가장 큰 이유는 AE시절에 ⓒ와 ⓓ를 숱하게 만났기 때문이다. 적은 예산으로 대행사를 통째로 산 것처럼 위세 부리는 사람, 다음에 큰 건이 있으니 이번 건은 봐달라고 하는 사람, 내가 너희들 먹여살린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들과 일하면서 그들의 무책임함과 무능력함에 분노했고 동시에 광고주 수준이 저 정도면 나도 하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이직하자 '광고를 그만뒀다', '편하게 살려고 업계를 떠났다' 라고 말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직접 만드는 입장이 아닐 뿐 나는 여전히 광고를 하고 있고 오히려 더 넓은 시각에서 광고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문제를 푸는 입장에서 문제를 내는 입장이기에 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대행사 출신 마케터에게 찍히는 낙인도 있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나는 '좋은 광고는 광고주가 만든다'라는 격언을 증명하고 싶다.


비트코인 거래소가 가장 잘 되는 때는 비트코인 가치가 상승할 때가 아닌, 비트코인 가치가 위아래로 미친듯이 흔들릴 때다. 매수와 매도가 거듭되면서 거래량이 많아지면 수수료로 이익을 얻는 비트코인 거래소가 가장 유리하다. 방향이 명확하지 않고 광고에 의존하는 ⓓ 같이 못난 클라이언트가 광고업계를 먹여살린다. ⓓ가 광고대행사 입장에서 수익성이 좋은 이유는 광고대행사가 사기를 치거나 속여서가 아니라 제품/서비스 개발에 써야할 돈을 광고에 쓰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기업이 브랜드 재활성화라는 명목으로 경쟁PT를 해서 대행사를 갈아치우고, 얼마나 많은 담당자들이 프로젝트를 기획이 아닌 취향으로 결정하는가. 다 돈 낭비,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다.


혹자는 광고주가 잘 모르고 광고대행사가 전문가니 맡기는 거 아니냐고 말할지 모른다. 맞다. 그런데 잘 모르는 건 광고제작의 실행까지다. 나무를 만들고 싶다고 해서 목재를 구해다가 대패질하고 못 박고 사포질하고 기름칠까지 다 할 필요는 없다. 원하는 디자인과 돈만 있어도 원하는 나무를 만들 수 있다. 고객의 요구사항에 맞춰 제작된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광고는 커스터마이징 제품에 가깝다. 광고대행사는 일종의 다품종 소량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공장인 셈이다. 원하는 요구사항, 디렉션이 분명해야 똑똑하게 돈을 쓰는 고객이 되는 것이다. 모르는 건 자랑이 아니다.


(출처: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2454889)


미용실에 갈 때 커트만 하더라도 자신이 명확하게 원하는 게 있어야 한다. 헤어디자이너가 보여주는 샘플을 고르더라도 결국 자기 탓이다. 커트 뒤에 자기 머리를 마음에 안들어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멋있으면서도 트렌디하고 아름다우며 클래식한 맛의 심플한' 헤어스타일을 원할 확률이 높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 않은가? 미용실이든 광고든 클라이언트의 입장이 되어 디렉션을 제공할 때 필요한 덕목은 결국 명료함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전문가라고 해서 자기 고민 없이 일방적으로 맡기는 건 실패의 지름길이라는 뜻이다. 돈 받고 일해주는 전문가는 디렉션에 노하우를 제공하는 사람이지 디렉션을 뛰어넘기 힘들다. 클라이언트와 에이전시의 역할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광고주가 느껴야 하는 광고에 대한 책임감에 대해 데이비드 오길비(David Ogilvy)는 이렇게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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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랜드 부스터

- 가끔 요리하고 글 쓰고 노래하고 운동하는 남자.

- 본능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날것의 언어를 사랑하는 기획자.

- 종합광고대행사의 AE였다가 브랜드 마케터로 전향한 직장인.

- 세상을 브랜드로 이해하며, 브랜드 부스팅 전략을 탐구하는 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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