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어떤 젊은 시니어는 좋은 사수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1.
직장인이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할 때, 나는 주저 없이 '좋은 사수'가 되어보라고 권한다. 대부분은 단어의 무게에 흠칫 놀라거나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좋은 사수란 부사수의 '롤모델'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누군가의 롤모델(Role Model)이 된다는 건 가슴 벅찬 순간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무리 속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끊임 없이 검증하면서 확장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롤모델이라는 단어는 집단 내의 바람직한 역할모델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긍정할 수 있는 타이틀이나 다름없다.
자본주의의 첨병인 기업 역시 무리의 일종이다. 회사 후배로부터 롤모델로 불린다는 건 자신이 속한 무리 속에서 괜찮은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는 증명이자 회사생활의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달콤한 속삭임이다. 특히 회사에서 가장 롤모델로 불리기 쉬운 사회적 지위는 흔히 사수-부사수로 부르는 선후배 파트너 중 사수다. 내 부사수가 나를 롤모델로 부르며 나의 기획서, 나의 말투, 나의 업무태도를 학습하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나 감동할 수 밖에 없다.
부사수는 사수를 동경하고, 사수는 부사수를 이끌어주는 훈훈한 광경이 넘치는 곳이면 좋겠지만 회사는 그렇게 이상적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직장생활하면서 보고 들었던 여러 가지 고충을 종합해봐도 사람관계에 대한 고민이 압도적으로 많고, 특히 사수-부사수 사이의 갈등은 단골소재다. 업무여건 상 일처리를 같이 해야 하는 사수와 부사수는 서로의 합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그만큼 불편함이 뒤따른다. 기계가 아닌 사람이기에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성인이 호흡을 맞추는 건 큰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좋은 사수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좋은'이라는 단어가 가진 범위가 워낙 넓고 사람마다 정의가 다르지만, 상술했듯이 부사수의 롤모델이 된다면 좋은 사수라 불릴만 하다. 롤모델은 내 미래의 기준점이자 닮고 싶은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다. 내가 뛰어넘고 싶은 목표이며 나의 성장동기를 부채질 하는 원동력이다. 부사수의 선배이자, 동료이자, 사부인 사수에게는 롤모델이 최고의 찬사다.
여기서 사수의 좋음과 나쁨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의 단 한 명뿐인 부사수라는 라는 점을 주목하자. 주변에서 아니라고 해도 심지어 사수가 부정해도 부사수가 '당신은 좋은 사수에요.'라고 한 마디만 하면 게임은 끝이다. 애초에 '좋은 사수'라는 단어 자체가 부사수의 관점과 입장이 진하게 반영될 수 밖에 없는 말이다. 실제로 내 지인은 좋은 사수가 되려면 결국 부사수에게 업무를 맞춰야 하냐고 물었다.
부사수에게 업무를 맞추는 사수를 한 번 상상해보자. 원래 업무지시의 방향은 사수에서 부사수로 향한다. 원래 사수는 부사수를 책임진다. 원래 지시받는 부사수가 지시하는 사수의 스타일에 맞추는 게 자연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수가 부사수에게 업무를 맞출 수 있을까?
어떤 사수는 부사수의 눈치를 보는 쪽을 택한다. 야근하라고 하면 싫어할 게 뻔하니까 자기가 대신 야근하고, 기획서 다시 해오라고 하면 싫어할 것 같으니까 자기가 수정한다. 지시해야 할 내용을 전달하지 않는다. 부사수가 싫어할 것을 신경쓰느니 차라리 본인이 하는 게 마음이 편한 것이다.
가뜩이나 젊은 꼰대라는 신조어가 생기고 워라밸이 중요한 화두가 된 요즘에는 사수가 혼내고 야근시키는 게 꼰대질로 인식되고 있다. 선배의 명령이 추상 같았던 몇 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일 못한다고 혼내는 것도 혼나는 쪽이 쉽게 납득하지 못하니 혼내는 것도 쉽지 않다. 일이 없는데도 야근하는 사수따라 자연스럽게 같이 밤을 새는 부사수도 이제 당연하지 않다.
이런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능숙하고 후배들과의 정보교류도 활발해서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팀장이거나 팀에서 시니어급인 젊은 선배들이다. 이들은 윗 세대의 억압을 경험한 세대로서 당시에는 그것이 억압인지 몰랐거나 당연히 참아야 하는 줄 알고 가만히 있었지만, 자기 후배에게는 윗 세대의 억압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선배와 후배 사이에 낀 샌드위치 세대라서 그런지 롤모델로 보이고 싶은 욕망만큼 리더십 없는 젊은 꼰대로 보이고 싶지 않은 욕망도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한 마디로 욕 먹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부사수의 눈치를 보는 사수가 과연 좋은 사수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기업에 직책과 직위가 있는 이유는 업무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의 사수가 된다는 건 자신의 가용자원 내에서 부사수의 성과, 성장, 동기를 책임지는 것이다. 계도해야 할 대상의 눈치를 보는 건 계도를 포기한 셈이다. 부사수의 눈치를 보는 건 어디까지나 인격적 모독이나 사생활 침해까지만이지, 부사수의 기분에 따라 업무가 좌우되는건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사수나 부사수나 다 같은 직장인이다. 엄격하게 따지면 사수는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부사수를 배려할 필요도, 의무도 없다. 억울하고 비인간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자기 시간, 자기 비용을 들이면서 부사수를 와 합을 맞추려는 사수는 둘 중 하나다. 선천적으로 남을 배려하는 품성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업무를 정말 잘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유형이다.
지금은 과도기라서 아직도 사수로부터 핍박받고 여전히 사수가 퇴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퇴근하지 못하는 부사수가 많지만, 적어도 인식만큼은 달라졌다. 예전이면 쉬쉬하던 이야기도 이제 SNS를 통해 자유롭게 공유되면서 일종의 방어여론이 형성된다.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이 생기면 인간은 자신감을 얻기 마련이다. 서로 나쁜 사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바람직한 사수상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 덕분에 사수의 부속품으로 취급되기 보다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우받기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부사수가 늘고 있다.
2.
그래서인지 부사수에게 아예 인간적인 관계를 허락하지 않는 사수도 있다. 일명 냉혈사수라 해서 일체의 친분을 배제하는 타입이다. 사수와의 호흡을 맞춰야 하는 의무감에 힘들어하는 부사수만큼 사수도 부사수에게 쏟는 감정을 노동으로 여기고 회피하고 싶어한다. 냉혈사수는 부사수와의 관계에서 감정을 아예 삭제하고 최소한의 책임만 진다. 부사수를 잘 키워서 얻는 보람, 업무협조 등의 성취를 포기하는 대신 부사수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이다. 냉혈사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사적으로 친하게 지내지 않음
점심, 저녁 같이 안 먹음
업무시간 외 연락은 하지도, 받지도 않음
부사수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거나 묻지 않는 한 먼저 도와주지 않음
업무 자체를 분리하여 책임영역이 겹치지 않게 설정
이런 사수를 좋아하는 부사수도 있다. 감정 소모 없이 일만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얘기하는 부사수는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자기 혼자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감정소비를 하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이라면 냉혈사수가 적합하다.
신입사원에게는 냉혈사수는 최악이다. 한창 부푼 꿈을 안고 회사에 입사했는데 싸늘한 냉기를 풀풀 풍기며 업무를 지시하는 사수를 보면 누구라도 풀이 죽을 수 밖에 없다. 자리가 가시방석이 따로 없고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걱정이 넘치고 수동적으로 변한다. 주어진 업무에서 실수라도 한 번 하면 냉혈사수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고 움츠러들고, 계속 악순환이 반복된다. 게다가 냉혈사수는 업무도 최소한의 필요한 부분만 알려주는데, 후배에게 필요한 지식과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마치 호텔에 찾아온 관광객에게 투숙가이드를 알려주는 식의 정보전달에 가깝게 알려준다.
냉혈사수는 보통 후천적으로 탄생하는데, 대부분의 원인은 배신감이다. 부사수에게 잘해줬는데 그만큼 부사수가 감정을 되돌려주지 않았던지, 사수의 친절을 악이용하는 상황을 겪으면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릴 수 밖에 없다. 거의 모든 냉혈사수는 영화 <부당거래> 주검사의 대사를 인용하며 자신의 변화를 합리화한다.
실제로 부사수의 배신을 겪은 지인은 술자리에서 폭음하며 울먹였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신입으로 들어온 부사수를 업어주고 먹여주고 챙겨줬더니 머리가 굵어져서는 사사건건 대들고 고마운 줄 모르고 결국 다른 팀원들에게 자기 뒷담화를 해서 암암리에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고 있단다. 나 역시 많은 부사수를 겪어본 입장에서 지인의 푸념이 낯설지 않았다.
좋은 사수가 되고 싶어서 밥도 술도 사주고,
일 많아 보여서 같이 야근하면서 도와줘도 아무 소용 없더라.
몇 달 후에 만난 지인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부사수에게 감정 없이 대했더니 자기가 상처 받을 일도 줄었다고 했다. 오히려 자신의 업무성과도 좋아졌다고 한다. 그 때의 괘씸한 부사수는 이직했고, 새로 부사수를 받았는데 이전과 다르게 철저하게 멀리하고 최소한의 대화만 한다고 한다. 심지어 하루종일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냉혈사수가 부사수의 동기부여를 일으킬 확률은 0%에 수렴한다. 회사에서 보내는 하루 8시간은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이 시간 동안 아무런 감정교류 없이 기계처럼 업무만 주고받는게 과연 부사수의 성장에 도움이 될지, 부사수에게 동기부여는 될지 의문이다.
우리는 흔히 직장인을 평할 때 인성과 능력을 거론한다. '그 사람은 사람은 좋은데 일처리가 별로야', '능력은 좋은데 성격이 제멋대로야.' 기업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익집단이면서, 감정을 가진 인간들의 모임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인성과 능력은 둘 다 중요하다. 따라서 냉혈사수는 스스로를 보신(保身)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르나 부사수의 능력성장과 인성함양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좋은 사수라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처음 제시했던 좋은 사수의 조건인 롤모델과 거리가 한참 멀다.
인성만 좋고 능력 없는 사수도 문제다. 기업에서 일을 못한다는 건 학교에서 공부 못하는 것, 악단에서 악기 못 다루는 것, 주방에서 칼질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특히 사수는 부사수보다 업무력이 높아야 한다. 선배의 기본 덕목은 후배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경험과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날 선배의 경험과 지식이 갑자기 쓸모가 없다면 어떨까?
과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변화의 속도가 느린 과거에는 연차가 곧 업무력과 비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 글 '요즘 마케터는 왜 회사 밖에서 사수를 찾을까?'에서 언급했듯이 사수라고 해서 무조건 부사수보다 일을 잘하는 시대는 점점 저물고 있다. 회사 시스템 활용이나 결제 체계는 경험 있는 사수가 확실히 앞설지 모르나 급변하는 트렌드에 적응하고 많은 정보량을 단시간에 소화시키는 능력이 부사수보다 낮은 사수는 부사수보다 높은 업무력을 가질 수 없다. 더 이상 연차와 업무력이 비례하지 않는 것이다.
배울 게 없는 사수의 권위는 추락할 수 밖에 없다. 전통적인 사수-부사수 간의 권력구조가 파괴되고 있다.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이면 모를까 점점 업무에 익숙해지는 부사수는 일 잘하는 선배와 일 못하는 선배를 구별할 수 있게 되고 그 일 못하는 선배가 나랑 같이 일한다면 한숨과 짜증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파헤쳐본 결과 좋은 사수가 되려면 인성도 좋아야 하고, 능력도 좋아야 한다. 이쯤되면 좋은 사수가 되려면 슈퍼맨이 되란 말이냐! 라고 외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슈퍼맨이 아니더라도 좋은 사수는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물음표를 띄워본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은 사수가 될 수 있을까? 몇몇 사수의 예시를 통해 그 답을 찾아보자.
3.
예시 하나. 하비스펙터-엘리트형 사수
한국에서 리메이크 된 적 있는 미국 드라마 슈츠(SUITS)는 엘리트 변호사 하비 스펙터와 천재 변호사 마이클 로스의 브로맨스를 다루는 법정 드라마다. 슈츠는 개성 있는 캐릭터, 멋진 패션, 매끄러운 시나리오 등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하지만 제일 눈길을 끄는 요소는 두 선후배 변호사 사이의 브로맨스다. 둘 사이의 감정변화에 따라 흘러가는 스토리의 변주가 제법 맛깔스럽다. 직장인의 관점으로 보면 더욱 흥미로운데, 이 브로맨스를 사수-부사수 관계로 해석하면 우리가 한번쯤은 상상할 법한 이상적인 관계에 가깝다.
하비 스펙터를 기업의 시니어 마케터로 대입해보자. 극 중에서 그는 승소율이 100%에 가까운 최고의 능력을 가진 변호사다. 외모, 언변, 지식 등 변호사가 갖춰야 할 자질을 모두 갖췄다. 마케터로 치면 기획력과 발표력, 실행력 삼박자를 고루 갖춘 회사가 좋아할 수 밖에 없는 A급 인재다.
부사수 입장에서는 어떨까? 슈츠에서의 하비 스펙터는 원래 후배를 받지 않는 성격이다. 후배에게 일을 시켜서 10시간 동안 기다리느니 1시간 안에 본인이 처리해버리는 스타일이다. 혼자 일하고 혼자 성과를 독차지하는 전형적인 독불장군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자신을 긴장시킬 정도의 출중한 후배가 없을 거라는 오만함도 있다.
하비 스펙터는 차근차근 가르쳐주기 보다는 일단 정글에 밀어넣고 가끔 몇 가지 팁만 감질나게 던져준다. 자신은 그렇게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사수도 당연히 살아남을 거라고 기대한다. 일반적인 능력의 부사수라면 하비 스펙터와 같은 엘리트 사수와 하루도 같이 일하지 못한다. 한번 보고 법전을 외워버리는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마이클 로스 정도가 아니라면 하비 스펙터의 하드 트레이닝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스포츠에서 천재선수로 불리다가 감독이 되면 이상하게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엘리트는 보통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은 한번에 시도해서 성공한 기술을 왜 열 번 넘게 연습해도 하지 못하는가? 왜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해서 골을 넣으면 되는데 왜 못하는가? 슬럼프에 빠진다는 건 어떤 것인가? 보통 사람들이 간신히 하는 것을 간단히 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감독의 첫 번째 덕목은 선수관리인데, 선수들의 마음을 알지 못하니 관리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예시 둘. 채치수-열정형 사수 / 변덕규-서번트형 사수
우리가 오래도록 사랑하는 만화 슬램덩크를 살펴보자. 채치수와 강백호는 흥미로운 사수-부사수 관계다. 처음에는 성실한 채치수와 불량한 강백호가 불협화음만 냈지만 나중에는 서로를 성장시키고 마음을 알아주는 관계로 발전했다.
채치수 같은 사수 마케터는 어떤가? 농구를 지극히 사랑하는 채치수라면 마케팅 역시 사랑할 것이다. 채치수는 마케팅 이론을 달달 외우고 기획에 몰입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정을 전파하는 인물이다. 누군가는 그 열정에 숨막혀 하며 동참하고 싶어하지 않겠지만, 성격만 맞는다면 채치수는 마른 장작에 불을 붙여주는 동기부여의 화신이라 할 만 하며 항상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무작정 돌진하는 타입이다. 모르긴 몰라도 '시장점유율 1위!', '전국 제패!'라고 외치지 않았을까? 천성이 낙천적이고 맷집이 강한 강백호였기에 채치수를 감당할 수 있었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지쳐서 나가 떨어졌을 것이다.
채치수와 라이벌 관계인 변덕규는 오히려 반대다. 일찌감치 채치수와의 대결에서 본인 능력의 한계를 알아차린 변덕규는 윤대협이라는 걸출한 선수를 보고 그를 뒷받침하기로 마음 먹는다. 주장이지만 시합에서 언제나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후배들이 마음껏 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변덕규는 채치수와 똑같이 목표를 크게 잡아도 채치수처럼 후배의 멱살을 잡고 끌고가기 보다는 목표를 공유하고 후배들의 성장을 모도하는 스타일이다. 자기가 할 일을 먼저 해내는 모범을 보이기에 후배들이 따른다. 단점이 있다면 사수의 능력이 보장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 팀장이 맨날 옆 팀장에게 지고 돌아오면 처음에는 마음이 짠하겠지만 나중에는 실적이 안 나와서 짜증나지 않을까? 어쩌면 능력이 없기에 선택의 여지 없이 부사수에게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자율권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시 셋. 일보-노력형 사수
만화 더파이팅에서 일보는 어부의 아들이다. 선천적으로 마음이 착해서 일진의 심부름꾼 노릇을 했지만 복싱에 입문하여 성실하게 훈련한 결과 일본 복싱 챔피언까지 올라선 전형적인 노력형 캐릭터다. 더파이팅에서 표현하는 일보의 훈련은 그야말로 처절하다. 재능 있는 상대방을 물리치기 위해 언제나 기초, 또 기초적인 훈련을 미련할 정도로 반복한다. 반복을 통해 축적된 훈련은 시합에서 여지없이 효과를 발휘해 상대방을 무참하게 때려부수는데, 일보가 승리하는 장면은 항상 감동을 넘어 경탄을 자아낸다.
후배 마나부는 천재 복서다. 타고난 동체시력에 운동능력이 더해져 상대를 마음대로 요리한다. 그는 일보를 만나기 전까지 뜻밖의 패배로 인해 본인의 재능을 깨닫지 못하고 열등감에 시달렸지만, 라이벌과의 재경기에서 승리하여 재능의 꽃을 피운다. 먼저 챔피언이 된 일보를 존경하고 따르면서도 그의 자리를 탐내고 있어서, 상반된 두 욕망 사이에서 방황한다.
마나부의 시합이 끝난 후, 구경하던 일보는 시합을 뛰고 싶어 근질근질한 나머지 이리저리 몸을 풀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마나부가 말을 걸었다.
"일랑 씨와 마시바 씨의 시합이 상당히 자극이 된 모양이네요."
"둘만이 아니야. 네 시합도야."
"제 시합이요? 전 한 수 아래의 상대랑 했는데도요?"
"그런 것 상관없이 각자가 점점 계단을 올라가는 것 같이 보여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걸."
"하지만, 나만 타이틀 매치가 아니었잖아요. 선배는 챔피언이니까 다른 두 명만 칭찬해도 되요."
뭔가 씁쓸하고 자괴적인 말에 가볍게 뛰고 있던 일보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며 묻는다.
"나랑 네 차이가, 뭔데?"
"음... 선배랑 나요? 일본 챔피언이랑 일본 랭커, 왕이랑 그 외 다수 중 하나."
"아니야."
일보가 단호하게 말한다.
"나이가 많은 것 뿐이야. 내가 너보다 조금 먼저 태어났다는 것 뿐이라고. 반대로 네가 먼저 태어났다면 넌 지금쯤 일본 챔피언이고 네가 나를 따르는 것처럼 내가 널 따르고 있었겠지. 연상이라고 잘난 게 아니고 먼저 태어나서 순서가 먼저 돌아왔을 뿐이야. 현재 나는 네 복싱을 흉대 낼 수도 없고 존경하고 있어. 마나부가 대전 상대가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을 늘 해."
나는 언제나 이 대사를 마음에 품고 있다. 먼저 밝혔듯이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선배라고 불린다면 왠지 후배에게 뭔가를 가르쳐줘야 할 것 같고 지도해줘야 할 것 같다. 후배가 자신을 인정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이런 본능을 이겨내고 그저 먼저 태어났기에 기회를 먼저 잡았다는 일보의 담담한 표현은 그 사람이 얼마나 자기객관화를 잘 하고 그릇이 큰 사람이며, 상대방을 인간적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말을 해주는 사수를 만났다면 부사수 입장에서는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예시 넷. 오 차장-부모형 사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만화 미생의 오차장은 사수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장그래의 직속사수는 김대리지만, 사실 장그래의 사수로서 모범을 보여준 사람은 오차장에 가깝다. 윤태호 작가가 밝혔듯이 오차장 같은 사람은 아마 세상에 없을 것 같다. 오차장은 기본적으로 사수가 가져야 할 지식, 태도, 인성을 3박자를 가지고 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사내정치를 못 한다는 것.
미생의 오차장을 보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후배를 위한 마음 씀씀이였다. 장그래를 위해, 팀을 위해 자신의 신념과 불일치하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모습은 좋은 사수를 고민하는 젊은 시니어 직장인에게 귀감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런 오차장의 따뜻한 성격이 만화 미생의 인기에 큰 뒷받침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좋은 사수는 복합적인 존재일지 모르겠다. 하비 스펙터의 능력과, 채치수의 열정, 변덕규의 모범, 일보의 존중, 오차장의 마음씀씀이를 모두 지녀야 좋은 사수가 될 수 있을까? 과연 좋은 사수는 어떤 존재란 말인가? 이를 우리는 좋은 사수의 대척점에 있는 나쁜 사수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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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가끔 요리하고 글 쓰고 노래하고 운동하는 남자.
- 본능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날것의 언어를 사랑하는 기획자.
- 종합광고대행사의 AE였다가 브랜드 마케터로 전향한 직장인.
- 세상을 브랜드로 이해하며, 브랜드 부스팅 전략을 탐구하는 마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