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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드부스터 켄 Dec 09. 2018

나도 좋은 사수가 될 수 있을까?(하)

지금도 어떤 젊은 시니어는 좋은 사수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1.

나쁜 사수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쯤에서 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의 첫 사수는 내 인생에 있어 유일한 사수이자 좋은 사수였다. 비록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그가 보여준 능력, 인성, 태도는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나를 훈육했으며 내가 올바른 직장인이 되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나는 운이 굉장히 좋은 편이다. 첫 사수가 나의 롤모델이었고 그 가르침 덕분에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다. 아마 그 사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도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상상하면서 판단의 기준을 잡는다.


그가 갑작스러운 개인사로 회사를 떠나자 나는 많은 혼란과 외로움에 휩싸였다. 사수가 없다는 건 모든 판단과 책임을 고스란히 내가 짊어져야 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몫에 허덕였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업무에 집중하려 하는데 내 밑으로 부사수가 한 명 들어왔다. 나와 동갑인 남자였다.


회사가 급작스럽게 사세확장을 하면서 첫 부사수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줄줄이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주로 남자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내가 일찍 입사한 덕분에 그들 대부분 나와 동갑이거나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사수로서 내가 처음 맞닥뜨린 어려움은 업무가 아닌 부사수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이 나이차였다.


남자 사수가 남자 부사수를 통제할 때, 제일 많이 쓰는 스킬은 브라더십(Brothership)이다. 브라더십은 흔히 학교 선후배, 군대 선후임 사이에 통하는 '남자들끼리의 코드맞춤'인데, 쉽게 말해 서로 형님동생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브라더십은 회사까지도 이어져서 군대문화와 형님동생문화가 짬뽕된 위계질서와 기강을 형성한다. 흔히 나이 많은 남자 선배가 어린 남자 후배에게 '형이 말이야...'라고 운을 떼는 모습이 브라더십의 산물이다. 보통 남자 사수는 이런 브라더십을 십분 활용하여 형과 선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남자 부사수를 다룬다.


이런 브라더십을 쓸 수 있는 기반은 먼저 입사한 회사선배가 후배보다 나이가 많은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나는 남자 부사수가 동갑이거나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이 흔한 스킬을 쓸 수 없었다. 그렇다면 가르칠 수 있는 업무지식이라도 풍부해야 하는 데 고작 1, 2년차 직원이 알아봤자 얼마나 알았겠는가? 내가 부사수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게 별로 없었다.


이러니까 서로 힘들었다. 나는 부사수를 통제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나이도 비슷하고, 그렇다고 가르칠 수 있는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반대로 부사수도 나를 따르기에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업무도 별로 배우지 못했으니까.


결국 인성적으로 부사수를 잘 챙겨주고, 불합리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더불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 뿐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청춘을 바쳐서 일하러 온 회사에 나 같은 사수를 만나는게 얼마나 불운한 일인가? 상황의 원인을 제공한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어쩌면 이때부터 내 마음 속에서 '좋은 사수'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싹을 틔웠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첫 부사수는 심성이 고운 사람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나의 미숙한 디렉션에도 열심히 따라와주었다. 그 뒤로 치열하게 공부하고 업무지식을 쌓은 결과 연달아 조기승진을 할 수 있었고 업무지식도 풍부해져서 부사수들을 많이 챙겨줄 수 있었다. 나는 약 5년간 무려 열명이 넘는 부사수를 만났다.


부사수 때는 '사수란 무엇인가?', 사수 때는 '부사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부사수일 때는 어떻게 하면 사수와 잘 지낼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성장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고 하면 사수일 때는 내가 뭘 해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다음은 사수와 부사수의 정의를 고민하다가 나온 키워드다.


사수선배, 상사, 천사, 사부, 친구 같은 사람, 형, 누나, 오빠, 언니, 보호자, 죽일놈, 악마, 원수, 꼰대, 조교, 욕쟁이, 꼼꼼하다, 덜렁댄다, 권력자, 합리적이다, 비합리적이다, 따뜻하다, 냉정하다, 이타적이다, 이기적이다, 열정적이다, 귀찮아한다, 무기력하다, 능력있다, 멋있다, 융통성 있다, 무능력하다, 믿음이 간다, 소매치기, 무책임하다.


부사수? 후배, 동생, 악마, 천사, 제자, 친구 같은 사람, 피보호자, 죽일놈, 애기, 원수, 바보, 꼼꼼하다, 덜렁댄다, 합리적이다, 비합리적이다, 따뜻하다, 냉정하다, 이타적이다, 이기적이다, 열정적이다, 게으르다, 무기력하다, 능력있다, 멋있다, 융통성 있다, 무능력하다, 믿음이 간다, 시켜야 한다.


2.

좋은 사수의 예는 SNS 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좋은 사수를 만난 부사수는 불만이 없기에 떠들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반면 나쁜 사수를 만난 부사수는 불평불만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부사수는 아래와 같이 나쁜 사수의 불친절한 태도를 지적한다.



나쁜 사수는 말한다. 모르면 물어보라고. 그 다음 사수는 질책한다. '이런 것까지 가르쳐줘야 하냐? 이 정도는 알아서 해야 할 거 아냐?' 부사수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다. 그나마 눈치가 빠르거나 요령 있는 다른 팀 동기는 적당히 비위를 맞추면서 배우는데 그런 재능이 없는 부사수는 하루하루가 답답하다. 이 절망의 알고리즘에 빠지면 답이 없다. 가르쳐주지 않아서 알아서 잘하는 부사수만 사랑받는다.


이런 악순환은 유교사상, 군대문화, 빨리빨리, 근면성실 등이 섞인 우리나라 특유의 기업실태 때문이다. 의견이 수직적으로 위에서 아래로만 내려가며 그 반대는 용납되지 않는다. 개개인에게 너무 많은 업무량이 할당되어서 야근에 특근까지 해야 겨우 업무량을 소화한다. 자기 할 일도 바빠 죽겠는데 언제 부사수 관리를 하겠는가? 여유가 없으면 그만큼 짜증이 날 수 밖에 없고 애꿎은 부사수만 욕받이가 된다.


사람의 능력과 성격은 다 달라서 어떤 사람은 초반에 두각을 나타내지만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이 있듯이 후반에 재능의 꽃을 피우는 사람도 있다. 이런 대기만성형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알아봤다 하더라도 당장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어린 직원을 여유롭게 기다려주지 않는다. 일 배우는 속도가 느리다고 신입 시절부터 타박받으면, 큰 그릇이 되려다가 그릇 자체가 깨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결국 좋은 사수와 좋은 기업문화를 가진 기업을 만나는 것도 행운이다. 


흔히 나쁜 사수라고 불리는 사수들의 주요특징은 다음과 같다.


어서와, 나쁜 사수는 처음이지?


트래쉬 토커

욕설, 음담패설, 인격모독 등 업무와 관계없는 언사를 구사하는 선배들이 있다. 트래쉬 토크는 농구경기에서 상대방의 파울을 유도하기 위해 쓰는 도발이다. 부사수를 도발해서 뭐가 바람직한가?


소매치기

부사수가 쓴 기획안, 아이디어, 잘한 짓을 지위를 활용하여 가로채고 공과 인센티브를 획득하는 선배들이다. 잠깐은 효과적일지 모르나 기업은 바보가 아니다. 만약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 기업은 망할 것이다.


롤러코스터

기분의 오르내림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대로 부사수에게 표현하는 선배들. 오전에는 방긋 웃다가 오후에는 싸늘한 나날이 반복되면 그 밑의 부사수는 멘탈의 아노미를 겪는다. 기분이 태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핑거프린스

부사수를 전용일꾼으로 착각하는 선배들. 본보기를 보이지 않고 입과 손가락으로 지시만 내림. 부사수는 독립적으로 일할 때까지 사수를 보조하는 사람이다. 보조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선배들이 있다.


투 페이스

팀과 타팀의 이미지가 다르다. 주로 팀장급에서 나오는데, 팀원들끼리 있는 회의실에서는 온갖 만행을 다 부리다가 다른 팀 앞에서는 천사다. 어설프게 뒷담화했다가는 팀원들이 나쁜 사람들로 오해받는다. 


빨간펜 선생님

스티브 잡스를 들먹이며 마이크로 매니징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선배. 기획서에 빨간 소나기를 내린다. 문제는 오답을 지적할 뿐 해답은 주지 않는다. 매니징과 위임의 차이를 모르는 선배다.


배달부

경영진의 지시, 혹은 상사의 지시를 그대로 부사수에게 전달한다. 메일을 통째로 전달하거나 카톡 대화창을 캡쳐해서 보낸다. 심하면 지시사항 없이 그대로 보낸다. 배달의 임우에 충실한 배달부의 기상을 지녔다. 


나르시시즘

자기 말곤 아무도 못믿는다. 혼자서 일을 잘 할 수 있으나 업무분배는 못한다. 모든 일이 자신을 거쳐야 하며, 업무 공유에도 미숙하다. 그러다 업무량이 넘치면 자연스럽게 부사수에게 넘길 때도 있다. 


매너리즘

타성에 젖어 논리력과 사고력, 진취력을 잊은 사람. 어떤 일을 물어보면 '원래 그래왔어', '당연히 그렇게 하는거야'라고 하며 아예 고민할 여유를 주지 않음. 동기부여는 커녕 동기하락을 불러일으키는 타입


젊은꼰대

윗 세대의 꼰대질을 대물림하는 선배. 내가 당했으니 너도 당해봐라. 부사수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음. 업무의 잘못됨을 지적하지 못하고 사람을 공격함. 권위주의. '내가 예전에는...'을 시전하기 좋아한다.


무능력자

부사수보다 아는 것도 없고, 배울 생각도 없다. 부사수가 봐도 월급루팡인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나쁜 사수만 피해도 좋은 사수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누구나 타인의 롤모델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부사수의 인격을 존중하고 동기를 부여해주며, 함께 성장하는 선배라면 좋은 사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3.

몇몇 이기적인 부사수는 선배라면, 사수라면 다 챙겨주고 모든 업무 가이드를 세심하게 줘야 하지 않냐고 불평할 수도 있겠지만 얌전히 앉아서 떠먹여주는 건 사지를 제대로 못 놀리는 아기때까지만이다. 사수의 가르침은 자생적으로 걷기 힘들 때 쓰는 아기보행기에 가깝다. 아기를 멋어나서 밥값을 하려면 적어도 자기 손으로 밥을 떠먹고 요리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회사는 일하는 곳이지 동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사수란 어렵고 힘들다. 나 혼자 좋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부사수가 좋아해주는 사수가 좋은 사수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사수, 부사수가 다 다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원칙을 세워서 지켜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 같은 경우도 좋은 사수의 10가지 원칙을 정해서 실천하고 있다.


우리 모두 좋은 사수가 되어보면 어떨까? 살면서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가 쉽지 않다. 내 가족, 친지, 지인 뿐이다. 어제까지 남이었던 타인을 오늘 부사수로 맞이하여 그의 성장을 도와 한 사람의 어엿한 회사원으로 길러낸다면 그만큼 뿌듯한 일도 없을 것이다. 먼 훗날 그 부사수가 찾아와 한 마디 해준다면 그 순간은 살아온 인생에 대한 조그마한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선배, 선배가 내 롤모델이었어요.
고마워요.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랜드 부스터

- 가끔 요리하고 글 쓰고 노래하고 운동하는 남자.

- 본능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날것의 언어를 사랑하는 기획자.

- 종합광고대행사의 AE였다가 브랜드 마케터로 전향한 직장인.

- 세상을 브랜드로 이해하며, 브랜드 부스팅 전략을 탐구하는 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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