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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과의사 호빵맨 May 11. 2021

타과의뢰



“한때는 의사로서 가장 힘든 싸움이 기술을 터득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깨달은 바로는 의사라는 직업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는 능력 안의 일과 능력 밖의 일을 아는 것이다.”

-. 아툴 가완디 2007 『어떻게 일할 것인가』


"그리고 다른 병은 어떤 게 있으신가요?"

"15년 전에 당뇨병이 진단됐고, 10년 전에는 협심증이 왔고, 5년 전에 뇌경색이 와서 오른쪽이 마비가 있습니다. 제 몸이 종합병원입니다."


종합병원 오는 환자들과의 흔한 대화다. 수술을 위해 입원한 환자의 경우, 기저에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진 경우에는 1개의 진료과의 능력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배를 수술을 해야 하는데, 뇌졸중 병력이 있다거나, 협심증으로 관상동맥 스텐트를 해서 항혈소판제를 복용 중이라거나 하는 경우다. 수술 진행에 방해가 되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을 해야만 현재 문제를 풀 수가 있다. 그래서 병원 내에는 협의진료라고 불리는 절차가 있다. 줄여서 협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타과 의뢰라고 하기도 하고, 영어로는 컨설트(consult)라고 부른다.


이런 타과의 문제를 해결할 때는 젊은 교수들이 주로 동원된다. 전공의들 사이에서는 이 문제를 친절하고 간편하게 해결해주는 '유능한' 교수들의 명단이 나돈다. 문제는 매우 긴 주관식 형태인데, 출제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간결하게 답을 써줄 때 환영받는다. 전공의 시절 외과의 원로교수님께 산부인과에서 날아온 매우 복잡한 재발성 골반 종양 환자에 관한 컨설트가 있었는데, 그 답은 매우 간단명료했다.


"외과로 전과 바랍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옛날에는 당연히 편지를 썼다. 물론 종이에다 펜으로 썼다. A4 용지에 질문이 절반, 나머지는  빈칸이다. 이렇게 의뢰서를 쓰면 병동의 사원님들이라는 직원이 정규 시간에 잘 모아서 해당 교수들의 방문에 붙여놨다. 급한 컨설트의 경우에는 이런 절차를 밟고 있을 여유가 없으므로 전공의들이 직접 컨설트 용지를 직접 들고, 외래 진료실에 찾아가기도 했다. 이때에는  '오늘 오후에 꼭 수술해야 하는 환자가 있는데, 진행해도 된다고 써주십시오'라는 단호한 표정이 드러나는 것이 중요하다. 더 급한 컨설트의 경우에는 출근하는 교수의 방앞에서 기다렸다가 출근 선물로 안겨드리기도 했다. '수술 후 간부전으로 환자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교수님 같은 명의가 봐주셔야 환자가 기사회생할 것 같습니다.'라거나 '수술 후 폐렴으로 인공호흡기를 하고 있는데, 저희처럼 무식한 것들이 배나 쨀 줄 알지 이런 환자를 어떻게 보겠습니까?'라는 절실함을 잘 연기해야 한다. 협상이 파국으로 끝났을 때에 대비해서, 다른 교수님께 쓰는 의뢰서도 미리 출력해서 소지하고 있어야 함은 기본이다.


컨설트 끝은 대개 이런 말로 끝났다. '고진 선처 앙망하나이다'. 고진 선처(苦盡善處)란 '고생이 되더라도 잘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뜻이고, 앙망(仰望)이란 '자기의 요구나 희망이 실현되기를 우러러 바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참 어려운 말들이었지만, 이런 말을 써야 격식에 맞는 타과의뢰라고들 했다. 한자말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작일(어제), 금일(오늘), 명일(내일), 익일(그다음 날) 같은 말들도 썼는데, 요즘에도 이런 말들을 쓰는 전공의들을 보면 크게 비웃어 주곤 한다. 바르고 쉬운 우리말을 쓰면 되지, 왜 자꾸 스마트폰에 어려운 말의 뜻을 쳐보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이런 쓸데없는 말들보다 중요한 것은 감언이설이다. 수신자가 기분이 좋아져야 한다. 그 분야에 자기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해야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역시 믿을 만한 의사는 나밖에 없구나 하는 착각으로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타과의뢰야 말로 명문이다.


컴퓨터와 전자 의무기록이 보편화된 지금이야, 이런 타과 의뢰를 컴퓨터로 작성해서 전송을 누르면 간편하게 해결이 된다. 다른 진료과에도 복사하여 붙여 넣기를 하면 되므로 일이 정말 편해졌다. 의뢰를 받는 수신자도 의무기록 시스템에 로그인을 하면 타과의뢰가 왔다고 알림이 뜨고, 그 내용을 바로 확인할 수가 있다. 더 적극적인 의사들은 타과의뢰가 수신되면 문자메시지로 실시간 알림을 받기도 한다. 문제는 밤에 일하는 전공의들 덕분에 시도 때도 없이 문자 알림이 온다는 점이다. 


사람이 편지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인정이 사라진 세태이지만, 딱딱한 의뢰서에 더해서 직접 전화를 하거나 따듯한 내용의 읍소를 담은 문자를 추가로 보낼 때는 마음이 더 쓰인다. 한 시간이라도 일찍 환자 진료를 봐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딱한 사정이 있으니 우리 과로 데려와야겠구나 하는 심약한 생각도 든다.


타과의뢰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적절하거나 예의 없는 회신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왜 바쁜 나한테 의뢰를 했냐는 차가운 말, 무슨 무슨 검사도 안 하고 의뢰를 하냐는 내용, 이렇게 기본적인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환자를 보냐는 훈계까지. 타과 의뢰서도 환자를 중심에 둔 명백한 의무기록인데 사사로이 주고받는 메시지로 여기는 분들을 보면 안타깝다. 환자도 잘 봐주지 않으면서 이렇게 까칠하게 질척대는 교수들은 전공의들 사이에서 피해야 할 명단으로 정리되어서 나돈다. 


타과 의뢰를 받고 환자를 진료하러 가는 길은 시간과 공력이 꽤 든다. 다른 병동에 있는 환자를 사전에 파악하고, 이동, 진찰, 상담까지 하려면 대략 30분 정도가 드는데, 혹시 병실 자리에 부재중 이기라도 하면 이런 낭패가 없다. 가끔은 연로한 환자만 있고, 보호자가 없으면 원활한 의사결정이 되지 않는다. 대장암으로 이번에 진단되어 수술이 필요하다는 의뢰를 받고 병실에 가보면, 환자는 아직 검사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해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면 서로 당황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외래 진료 시간에 맞춰서 내려오시라고 미리 답변을 써놓기도 하는데, 환자도 보호자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차분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어서 괜찮은 것 같다.


건강보험에서 정한 수가의 우리말 이름은  '협의진찰료'인데, 보험수가로는 2020년 기준으로 14,230원이다. 이중 환자 본인이 내는 본인부담금은 이 중 20% (약 3,000원)이고, 암 등 중증질환일 경우에는 5%(약 700원)가 청구된다. 병원에서는 타과 의뢰의 회신이 신속하게 처리되어야 재원기간을 줄일 수 있으므로 빠른 회신을 독려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24시간 이내에 회신을 쓰는 경우에는 해당 의사에게 대략 3000원가량의 '특별' 인센티브가 붙고 있다. 10명의 타과의뢰를 보면 없던 돈 3만원이 생기는데, 아마 하루가 다 가고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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