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신기한 밤을 벚꽃과 함께 깨어 있자고 마음먹었다.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밤 벚꽃이 끊임없이 지고 있는 모습만이 마음에 스며들어, 뜨뜻미지근한 꽃비에 몸을 맡기고 있는 기분에 취해 있었다"
- [밤 벚꽃] 미야모토 테루
꽃이 피는 계절에 무작정 꽃으로 달려드는 존재들이 있다. 벌과 벌레는 공생의 더듬이에 꽃가루를 묻힌 대가로 원했던 달콤함을 얻지만, 나르시시즘의 안테나 셀카봉을 쳐든 인간은 꽃 무더기 앞에 필패다. 화려한 결과만을 탐하는 미소는 꽃의 배경에 모두 투명해진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말은 그 가사를 되뇌어볼 때, 줄기와 가지에 잎들을 무럭무럭 피워낼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샘솟는 사람에게만 유효하다. 그러므로 한 떨기의 꽃이라도 교만한 사람보다는 여전히 아름답다. 어떤 존재는 스스로가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 도무지 가질 수 없는 것, 월등히 위대한 것에 대해서는 그 품으로 쉽게 항복해버리고 만다. 나르시시즘의 안테나를 접고 꽃 앞에 멍하게 선 사람은 존재의 한계와 포기의 행복을 아는 아름다운 인간이다.
꽃의 시절이나 사람의 시절이나 절정의 순간을 절정의 순간에 자각할 수 있을까? 절정의 순간을 제 때에 안다면 다시 오지 않을 그 시절은 정말 아름다울 것이다. 그 시절을 알지 못하는 존재는 절정의 그 순간에도 더 화려한 때를 욕망하지만,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미망의 시간을 통과할 때야 비로소 빛나던 순간이 지나갔다는 사실만 점점 확실해진다. 벚나무는 1년을 준비하여 짧은 한철에 꽃을 피워내지만, 꽃이 흩날려지고 나면 누구 하나 쳐다보지 않는다. 가을의 나무가 만산홍엽의 빛깔을 뽐낼 때는 단풍이 낙엽으로 떨어지기 직전인데, 낙엽 이후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렇게 몇 년의 세상을 살아본 나무는 화려함을 잃은 나머지 계절에는 한결같이 겸손하고 과묵하다. 그래서 이런 위대한 것들의 씁쓸함이 드리워진 절정보다 꽃이 만개하기 전 지금의 이른 봄, 짧은 한 철이 나는 더 좋다.
벚꽃이 좋은 공원에 딸과 함께 봄 나들이를 나갔다가 지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던 분이 맥 빠진 채 움직이는 흰색 용달차 위에서 연설을 하고 다니는 모습을 봤다. 기호가 6번이라니, 이번 선거에서는 불행하게도 힘 있는 당의 공천에서 배제된 것 같다.
“저에게 다시 일할 기회를 주십시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 분은 저런 목소리들을 귀담아 처리해야 했던 주무 부처의 장관이었던 듯하다. 그 시절에 저분이 ‘사람에게 다시 일할 기회를 주는 것'에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아둔한 나는 기억해내기 어렵다. 선거 운동원으로부터 저분의 와이프라고 소개받은 사모님도 고생이 참 많아 보인다. 언제 길바닥에 서서 누구에게 몸을 굽혀가며 아쉬운 소리를 해보셨겠나?
일부 정치인들이 권력자가 된 후 사람의 소리를 귀담아듣는 것을 공통적으로 싫어하는 것은 아마도 선거 운동 때 겪는 이런 과잉스런 감정 소모에 대한 보상심리일지도 모르겠다. 고분고분 말을 듣던 사람이 승진을 하고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하는 욕구의 본질은 더 이상은 남의 말을 안 듣고 싶어서다. 어차피 너나 나나 오류투성이인 말들을 늘어놓고 사는데, 내가 더 말을 오래 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이 수첩 펴놓고 고개 끄덕이며 진심 어린 표정으로 받아쓰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기 원하는 것이다. 묵언의 경청을 강요하는 것이 권력의 본질이다. 하지만 이 용달차에 올라선 눈물겨운 부부는 지역 주민의 말을 앞으로도 계속 경청하겠다고 하니 나는 지나가는 길에 지나가는 말로 들어줄 뿐이다. 이 정치인의 권력자로서의 절정의 순간은 슬프게도 몇 년 전에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나무와 다르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으므로 인간으로서의 절정의 때는 항상 모를 일이다. 그것이 사람의 삶이다. 그리고 봄은 항상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