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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과의사 호빵맨 Feb 03. 2019

접대기

 

외과 전공의 시절일이다. 4개월간의 병실 주치의 생활에 지쳐가던 날, 그렇게 원하고 또 기다려왔던 N병원에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N병원은 내가 의사로서 환자를 봤던 첫 병원이다. 새하얀 담요, 컴퓨터, 비디오 비전, 냉장고, 수건, 수술복(잠옷) 등의 호텔용 어매니티들로 채워진 당직실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고 있노라면, 여기서 사막에 오아시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N병원은 암환자들만 있는 병원이다. 층마다 각종 암환자들을 장기별로 구분해서 치료하는데, 나는 그중에 한 곳에서 한 달을 보냈다. 같이 파견 나온 카운터 주치의도 나 만큼이나 태도가 범상치 않아 "과장"이란 별명을 공유했다. 내 별명이었던 ‘오과장’의 기원은 회진 때 시작되었다.  어느 날 어떤 환자의 보호자가 회진 중 나를 보고 치프 선생님, 윗년차 선생님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저분이 너네 아버지 봐주시는 과장님이야!" 하면서부터였다. 윗년차 선생님들이 이해한 숨은 뜻은 주치의 답지 않은 건방진 주치의란 뜻이었다...

시스템은 많이 다르지만 일은 참 편하다.

담당 환자수도 절반으로 줄었다. 고로 수술도 하루에 한두 개 정도 들어가고 점심시간도 있다. 이런 식으로 하루 세끼씩 먹다가는 내 몸을 못 가눌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봐야 할 환자가 아니고 빌려놓은 비디오에 시간이 쫓기는 날도 있으니 원.... 높으신 선생님(스탭 선생님, 대학병원의 교수님들급)들도 참 좋으신 분들이다(약간의 정치적 수사임). 회식의 메뉴도 딱 3가지로 아랫사람을 배려해서 객관식이다. 


1) 삼겹살 2) 감자탕 3) 순댓국

일주일 만에 세 가지를 다 해봤으니 선발 로테이션이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본원에서 그렇게 날 옥죄었던 주치의로서의 책임감이 덜하다는 게 편한 한편 그만큼 환자와 멀게 느껴진다는 게 허무하긴 하다. 수술동의서를 받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결정을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환자와 스탭 선생님들과 간호사들 사이에서 적당한 심리적인 거리를 두고 일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수술장에서는 3년 차형들도 치프 선생님들도 없기 때문에 스탭 선생님과 나와 인턴 선생만 수술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물론 높으신 선생님들은 주니어 스탭 선생님이 수술의 제1 조수 (First assistant)를 하시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내가 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옆에서 보기만 하던 것들을 직접 해볼 수 있어서 가슴설 레이지만, 나의 엉성한 솜씨로 환자가 수술 후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는 집도의(Operator)들도 집에 가서 편하게 자기 힘든 팔자일것테지..


외과 의사들은 일반적으로 수술방에서의 품행이 예측 불가능하다. 회진이나 회의 중에는 관대하고 신사적인 분들도 수술방에서만큼은 매우 엄격한 나머지 심지어는 폭언을 하는 분들도 있다고 알고 있다. 수술 분위기는 수술의 난이도와 범위와 주로 상관이 있지만, 멤버들의 면면도 중요한 요소다. 그중에서도 제1 조수(first assistant: 대개 4년 차 레지던트)는 참 많은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집중해야 한다. 물론 수술 진행이 최우선이다. 서너 명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좁은 수술대 앞에서 유능한 조수는 인턴이 졸고 있는지 주치의가 똑바로 하고 있는지 집도의의 그날 컨디션과 손놀림에서 느껴지는 멘틀이 어떤 상황인지를 종합하고 실시간으로 분석한다. 그래야 선문답에 답을 한다던 지, 졸고 있는 사람을 깨운다던 지, 아니면 보다 공격적인 자세로 시사적인 문제나 유머를 날리는 일을 수행할 수가 있다. 이 바닥에서는 이런 일련의 행위들을 잘하는 레지던트를 소위 "정치적" 인물로 평가한다.

 

전공의 1년 차 시절에 겪은 B 선생님에 대한 회상을 해본다. 이 분에게 밉보였을 때 세 가지 이어지는 멘트가 있으니 그것은 "건방진 놈, 외과의사의 기본은 성실한 자세야. 그게 에터튜드 야. 넌 에터튜드(attitude)가 안되어있어.."

 

해당 파트 1년 차였던, 나와 S 선생은 하루에 한 번씩은 번갈아 가면서 꼭 이 말을 듣고 살았던 거 같다.

평소 제2 조수를 하시던 펠로우 선생님은 휴가였다. 더불어 평소 B 선생님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제1 조수를 자임하시던 L 선생님도 무슨 일인지 월차휴가를 낸 날이었다. 그러나 평소 제2 조수 자리에도 못 들어가고 인턴 자리나 뒤에서 관람만 하던 나는 불행하게도 휴가도 월차도 아니었다. 그날 날 대안 없는 유일무이한 제1 조수였던 것이다. 그 공포의 시간이 점점 가까워질 무렵 같이 파견 나온 2년 차 선배들에게 내가 무사히 고난을 빠져나갈 계책을 여쭈었더니 다들 묵묵부답 한숨만 교환했다. 그만큼 그분의 수술방에서의 카리스마와 명성은 참 유명했던 것이다. 더욱이 전날 밤은 중환자실 환자 덕분에 새벽 내내 심전도만 눈 빠져라 보고 난 시점이라 몽롱한 상태로 눈만 감으면 심전도 파형이 지나가기만 했었던 날이다.

 

수술은 환자를 마취한 다음 소변줄을 끼우고 베타딘이라는 소독약으로 배를 잘 닦고 무균 환경을 만들기 위해 수술 부위를 제외하고 여러 가지 의료용 커튼들을 둘러쌓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바보 인턴과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수술 필드를 정리하고 절망의 한숨을 늘어놓던 찰나 드디어 B 선생님이 특유의 남성적인 자세로 위풍당당하게 입장하셨고 10번 메스와 약간의 피로 수술이 시작되었다. 기억해보면 그날 선생님의 기분이 굉장히 좋았던 날이었거나 아니면 아예 우리에 대한 기대를 스스로 포기하고 들어오신 듯하기도 했다. 큰 무리 없이 약 2분간 진행되던 수술은 선생님의 기억할 수 없는 썰렁한 농담으로 잠시 주춤했다. 그분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난 고개를 살짝 들어 가슴까지 올려다본 순간 아니나 다를까 “넌 수술할 때 배만 들여다봐야지 어딜 올려다보는 거야..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이후 생략)”. 그렇다. 난 함정에 걸려든 것이었다. “네”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다시 고개를 처박고 오만 잡념들에 화이트 칠을 해가며 집중을 다해 수술에 임했다. 그날따라 큰 무리도 큰 사고도 없이 무난하게 수술이 진행되고 클라이맥스를 지날 무렵, 뜻하지 않게 B선생님이 자기가 잡고 있고 장기가 장인지 간인 지도 모르는 바보 인턴 선생에게 묘한 칭찬을 날리셨다.

 

"인턴 선생, 처음 하는 것 치고는 장 잘 잡는데...."

 

난 이 순간에 목숨을 건 도박을 하고야 말았다. 작전은 하나 운명은 둘..

 

"선생님, 우리 인턴 선생이 외과 프러퍼(Proper intern, 레지던트 지원자)입니다."

"오 그래? 자넨 외과 왜 하려고 하지? 언제부터 하려고 했어??..???? "

 

그는 아직 과를 못 정한 상태였고 막연히 외과 계열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친구여서 소질이 돋보여서 시간 있을 때마다 외과 하라고 권유하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누가 물어보면 "그냥 뭐 외과계열 쪽으로 생각 중인데요.."라고 답을 하던걸 여러 번 봐서 그런 대답이 나오면 분명히 "건방진 놈! 계열은 뭐고 쪽은 뭐야,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지..." 하실 게 분명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X 선생님의 관심에 우리 정직하고 우직하게 돌변한 인턴 선생이 입을 열려고 하는 찰나 나의 왼손이 그의 오른손을 뜨겁게 부여잡았다. 그도 나의 절박한 마음을 알았던지 잠시 머뭇거리더니

 

"네 선생님, 학생 때부터 외과를 하고 싶었습니다......"

"오...... 그래.. 요즘 애들은 힘든 거 안 하려고들 하던데, 기특하네... 외과의사의 기본이 뭐지?"

"네 선생님... 에터듀듭니다..."

"오... 그래 성실한 자세만이 훌륭한 외과의사를 만들 수 있지... 으름.."

 

그 이후로 부드러운 질문공세는 이어졌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수술은 이미 끝나버렸다. 정규 멤버가 할 때보다 1시간은 더 길어졌지만 선생님도 그럭저럭 만족하신듯한 표정으로 수술장을 나가셨다. 작전은 성공했고, 그날 밤 팀 회식 때 그 인턴을 위해 난 순댓국에 특별히 순대볶음까지 시켜줬다. 10여 년이 지난 후 그 인턴은 외과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과 전문의로 맹활약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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