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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정연주 Jan 02. 2023

지금도 그리운 그 날 그 술자리

취후 작문

  틀림없이 밤하늘에 빽빽할 별빛이, 흔들리는 지금 나의 시야엔 잘 들어오지 않듯, 30년 가까이 가졌던 술자리 가운데 그리운 시간이 당최 떠오르질 않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SNOOT 글쓰기 학교의 소중한 마지막 수업을 위해 ‘지금도 그리운 그 날 그 술자리’라는 주제로 1,000자의 글을 써내려면 기억을 짜내야만 하는데 어쩌지? 그동안 어떤 경험들을 했던가. 그래, 생후 처음으로 만취했던 대학 신입생 환영회 때를 떠올려보자. 쓴 소주에 레몬향 입혀 만들어낸 것의 뒤 끝, 엉망이었지. 새벽 녘, 아빠 엄마 침대맡에서 횡설수설했던 그 때, 내 기억 속의 부모님은 황당함에 눈이 커지다 못해 방금까지 내가 손에 쥐다 왔던 소주잔 만한 눈망울로 서로를 향해 “쟤, 뭐래니?” 하며 어이없어 하셨어. 내가 대성통곡을 했다지? 여중 여고를 거쳐 여대까지 와 있는 게 한심하다며 재수를 하겠다고 했다나? 거기까지는 내 머릿속에 입력 안돼 있으니, 기억도 충실하지 않고 그립지도 않은 술자리라 주제에서 탈락.  

또, 어떤 술자리가 있었으려나. 롯데 팬인 남자친구와 엘지를 응원하는 내가 주도했던, 야구 보며 (퍼)마시던 술자리? 상대 팀이 1루타를 날리면 소주 3분의 1잔, 2루타는 반 잔, 홈런은 원 샷을 했던 술자리. 경기가 끝나기도 전 이미 누구도 제정신이었던 적이 없던 날들. 오호, 그건 좀 그립네. 그 시절도, 그 때의 나도. 그 친구와 지금까지 함께였다면, 올해도 야구보며 그 시절 술 게임도 하고, 이대호 선수 은퇴 경기 가서 같이 울고, 가을 야구 시즌에는 한없이 놀려줄 수 있었을텐데. 잘 있을까 그 친구? 그 기억을 더 들춰볼까? 아냐, 딴 생각으로 한참 헤맬 것만 같아. 그럼 어떤 걸 써야하지? 아, 맞다! 방송 프로그램 진행하며 만난 코너지기들과 함께 했던 회식자리들. 방송에 최적화된, 간결하고 재치있는 입담의 전문가들과 나눈 이야기에 희열을 느꼈던 경험들도 있었지? 먹고 마시는 기능과 더불어, 대화하고 웃기 위한 입의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들과 함께 한 그 때, 가만히 귀만 열고 있어도 충만했지. 딱 하나, 언젠가 그 자리에서 내가 했던 말이 너무도 생생한 나머지, 지금은 그 시간을 떠올릴수록 아쉬움이 커지는 점만 빼면 완벽하네.


“피디님, 우리 술자리 느낌으로 TV프로그램 하나 만들어봐요. 이런 분들이랑 스튜디오 말고 편한 곳에서 밥 먹고 술 마시고, 여행도 같이 하면 더 좋겠다! 그런 자리에서 각자 전문성 드러내면서 수다 떨고 정보 나누고, 어때요?”


  그로부터 십년 후, ‘알쓸신잡’이라는 요상한 제목의 프로그램을 보는데, 나, 부러움에 손까지 떨며 오밤중에 그 때 그 피디한테 문자를 날렸지. 왜 내 말대로 하지 않았느냐고. 그 때 당신도 꽤 진지하게 기획해본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 피디, 한마디로 정리했어. “여기? not tvn, 나? not 나영석!” 이후 대화창을 ‘ㅋ’으로 수놓고 닫았던 기억이 나네. 어허, 그러니 이 기억도 그리움보다는 아쉬움이 더 배어나와 안되겠다. 우핫! 어떡하지, 벌써 1,000자를 훌쩍 넘겼어.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하건만, 그리운 술자리를 못 잡아냈네. 아냐, 그러고보니, 오늘 이 글을 쓰기 직전, 와인잔 부딪히며 시작해 막걸리잔 들어 올려 마무리한 자리가 있었잖아? 선을 넘나드는 대화도 재미있었고, 나를 향한 은근하니 색다른 눈빛들을 얼핏 본 것도 같아. 무엇보다 지금 불콰한 낯빛에 한들대는 몸을 양 손목에 의지해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나, 너무 기특한걸? 이렇게라도 기록해야겠다. 언젠가 그리워할 오늘 술자리와 이 시간을. 진하고 깊은 대신 경쾌하고 얕을수록 더 합당한 그리움을.    


*밑줄 친 표현은 '이충걸' 교장 선생님께서 덧붙여주신, 찬사해 마지 않을 문장이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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