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아 옷장 속의 대중음악사'- 한국어문기자협회 발행 <말과 글> 中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노래의 제목으로 흔히들 기억하고 있는 ‘잊혀진 계절’의 가사이다. 1982년 발표된 이래 수십 년 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어느 때부터 10월의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라디오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곡이다. 봄이나 한여름, 한겨울에 ‘잊혀진 계절’을 듣기란 쉽지 않다. 그 시기에 이 곡을 선곡하기란 생뚱맞은 일이오, 이 곡을 듣는 일이란 낯설다. 이러한 곡을 흔히 시즌 송, 계절을 타는 음악이라 한다. 음악을 취하는 방식이 라디오와 같은 올드 미디어를 통해서건, 내 입맛에 맞게 저장했다 꺼내듣건, 흘려서 듣는 스트리밍이건 상관없다. 내 귀와 마음이 세뇌라도 당한 것인지 계절 타는 음악을 계절을 거스르며 듣기란 어색하다.
‘시즌 송’의 시작은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비롯됨직하다. 우리 대중가요에 여러모로 다양하고 큰 영향을 끼친 1950, 60년 대 주한 미군들을 위한 공연 가운데 가장 성대한 것은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시기, 미국 코미디언 밥 호프가 중심이 된 미국 연예인들의 내한 공연이었다. (밥 호프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해외 주둔 미군을 위한 크리스마스 위문공연을 꾸준히 진행했다. 그의 위문공연은 1974년 크리스마스에 중단되어 그 해 크리스마스는 ‘보브 호프 없는 크리스마스’라는 의미의 ‘호프리스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채 미 장병들이 쓸쓸하고 우울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냈다고 한다. -경향신문. 1974.12.15. 3면-)
그 공연에서 빠질 수 없는 레퍼토리는 ‘캐럴’이었다. 이국땅에서 그들의 명절인 성탄절을 맞는 미군들에게 캐럴은 많은 위안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점차 미군 주둔지의 담벼락을 넘어, 또는 AFKN과 같은 방송 전파를 타고 흘러나와, 종교적 이유와 크게 상관없이 성탄 즈음이면 우리 대중음악계에 울려 퍼졌다. 또한 크리스마스 시즌이야말로 훗날 ‘레코드 계의 한 대목’으로 자리매김하며 캐럴 뿐 아니라 다른 일반 ‘디스크’가 많이 팔리는 시기로도 자리매김한다. (우리나라 음반계에서 스테레오 녹음이 가능해졌다는 소식을 전했던 1964년 성탄 즈음의 기사에 따르면, 「크리스머스·시즌」을 「레코드」계의 ‘한대목’으로 특정하고 있다. 당시 「크리스마스·캐럴」 집에서 ‘언제나 비교적 많이 나간다’고 언급된 가수들은 「빙·크로스비」「패트·분」「폴·앵커」「카니·프란시스」「하리·벨라폰테」「냇·킹·콜」「보비·달링」「처비·체커」등이 있다.-경향신문, 1964.12.21.5면-)
그러나, 대표적인 시즌 송을 겨울에 울려 퍼지는 캐럴이라 단정 짓자니, 여름에 즐겨듣는 ‘시원한’ 대중음악들에 대단히 마음이 쓰인다. ‘시원한’ 이란 수식어가 붙는 가요는 언제 등장했을까. 여름철 시즌 송으로 어떠한 노래들이 들리기 시작했을까.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여름노래’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1964년 여름을 앞두고 있는 시기의 한 기사로부터, 당시 지난 몇 년 간의 「히트·송」이 여름에 ‘출산’되어 왔음을 언급하며 음악 시장의 「홈·런」을 기대하는 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다.
<히트의 시즌은 여름?>
全般的으로 演藝界가 不景氣에 허덕이는 요즘 「디스크」街도 昨今은 침울한 表情, 「홈·런」을 노린 新作들이 出廻하고 있으나 拔群의 傑作은 發見하지 못했다. 興行界의 「붐」을 이루는 「X머스」나 正初이 「히트」가 나올 것 같이 생각하지만 이것은 모르는 말이다. 「포프·송」이 「히트」하는 「시즌」은 夏渴期이다. 몇 해 전의 “DKHAFO 아모레” 나 “네버·온·선데이”가 麥酒거품을 즐기는 여름에 「히트」하였고 “노란샤쓰”도 여름이었고 지난해의 “검은 傷處”도 여름에 「히트」를 쳤으니 금년에도 「그레이트·히트·송」이 出産 되기를-. 경향신문, 1964. 4.11. 5면
우리나라 대표적인 여름 노래의 탄생은 ‘한국의 비치보이스’- 비틀즈 등장 이후에는 ‘한국의 비틀즈’- 를 표방했던 그룹, ‘키보이스’에 의해서였다. 1970년 6월 21일에 발표한 ‘키보이스 특선2집’이라는 앨범에 실린 <해변으로 가요> 부터라 할 수 있다. 이 노래는 발표 직후부터 매 해 여름이면 불리고 들리는 대표적인 여름노래가 되었다. 별이 쏟아지고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자는 직설적인 노랫말과 편안하고 단조로운 진행의 기타연주, 시원한 느낌을 줄 수 있는 편안한 화음이 더해진 이 노래는, 이후 세대가 바뀌어도 많은 가수들의 목소리로 계속해서 해변으로 가자고 할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지난 시기 미군 무대와 일반 대중들을 향한 무대를 넘나들며 모방과 섞임과 창조를 통해 음악적 역량을 키우고 꽃피웠던 많은 가수들의 뒤를 잇는 후배 대중음악인들이 다양한 경로로 등장한다. 그 중 하나가 가요제를 통한 입문으로, 1978년 7월 TBC의 ‘해변 가요제’도 기록에 남을 만한 것이었다. 그 가요제에서 대상 수상곡으로 탄생한 곡은 혼성 4인조 그룹 ‘징검다리’ 가 부른 <여름>이었다. 흥에 겨워 여름이 오면 가슴을 활짝 펴고, 산도 좋고 물도 좋은 여행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사랑이 오고간다며, 여름은 젊음의 계절이요, 사랑의 계절이라고 외치는 노래였다. 피서지인 해변에서 신선한 젊은이들의 목소리와 기타연주, 그에 더해진 방송악단의 시원한 드럼과 브라스 연주는 <여름>을 새로운 여름 노래로 충분히 각인시킬 만 했다.
이후 1980년대 초까지도 ‘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와 <바닷가의 추억>이 압도적으로 여름노래로 사랑을 받았고, ‘징검다리’의 <여름>, ‘4월과 5월’의 <바다의 여인>, ‘산울림’의 <바다의 교향시>, ‘송창식’의 <딩동댕 지난 여름>, <철지난 바닷가>,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 ‘윤형주’의 <라라라> 등도 많이 애창되었다.
1980년대 초 중반을 거친 이후, 경제적 발전과 대중매체의 확대, 향락문화의 산업화가 진행된 1980년대 말에는, 우리 대중음악 시장에 강력한 소비자로 ‘신세대’라 불린 10대 청소년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취향에 맞는 댄스음악이 여름음악으로도 돌풍을 일으킨다. 기존 여름 노래들이 여행을 떠나며 혹은 여행지에서 둘러앉아 목소리를 모아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이었다면, ‘신세대’ 등장 이후의 여름노래는 ‘듣기’보다는 ‘몸을 움직이기’ 좋은 노래들이었다.
1990년대에는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맞는 7월 경 부터 음반업계가 활기를 찾았다. 피서지로 떠나며 들을 만한 카세트테이프 등을 그 시기에 구매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고, 이에 맞춰 가요계는 ‘여름 시장’을 겨냥한 신작앨범을 내는 것이 일종의 공식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가요계에 댄스열풍을 몰고 왔던 댄스그룹들은 독특한 춤과 특이한 의상을 무기로 여름노래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쏟아지는 여름 노래 중 처음으로 사랑을 받았던 곡은 1994년 9월에 발표된 ‘듀스’의 <여름 안에서>였다. 그 즈음부터 확고히 자리 잡기 시작한 뮤직비디오를 통해, 남성 힙합듀오 ‘듀스’는, 하늘은 우릴 향해 열려있다고 그리고 내 곁에는 니가 있다고, 시원한 바닷가를 배경으로 노래하며 율동과 같은 춤을 곁들였다. 파도 소리로 시작하는 노래와 파란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한 뮤직비디오는, 이후 매 해 여름이면 밝은 태양과 시원한 바람을 느끼게 하며 시‧청각적으로 많은 젊은이들을 끌어당겼다.
<여름 안에서>가 당시 젊은 세대의 여름노래로 인기를 끌었다면, 그보다 2년 뒤에 나온 ‘클론’ 의 <쿵따리 샤바라>는 전 세대가 목청껏 “쿵따리 샤바라”를 불러 제치게 했다. 1996년 6월 발표 직후부터 주목을 받다 7월 폭염과 함께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쿵따리 샤바라>는 기존 낭만적이었던 여름노래의 고전들을 제대로 물리치고 여름음악, 피서지 음악으로 확고히 자리 잡는다. “쉽고 경쾌한 멜로디와 리듬, 쉬운 가사 등 댄스 음악의 전형적인 요소를 배합해 젊은 사람들에게는 ‘피서가’로, 기성세대들에게는 노래방에서의 ‘스트레스 해소가’”로 널리 불리며 말 그대로 ‘국민(여름)가요’가 되었다. 이후 많은 사랑을 받은 여름노래들 중 대표적인 곡으로 ‘DJ DOC’의 <여름이야기>(96’) ‘쿨’의 <해변의 여인> (97’) ‘UP’의 <바다>(97’) 등이 있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기존 여름 노래들에 더해져 ’박명수‘의 <바다의 왕자>(00’), ‘유엔’의 <파도>(01’), ‘윤종신’의 <팥빙수>(01’), ‘인디고’의 <여름아 부탁해>(02‘) 등이 있다. 이 노래들은, 10년이 훨씬 넘도록, 주로 여성 아이돌에 의해 여름에 발표되는 - 굳이 여름을 연상시키는 가사나 개연성이 전혀 없더라도 무조건 신나고 시원한 무대 퍼포먼스가 곁들여진- 다양한 노래들과 경합을 하면서도 꿋꿋하게 여름 ‘시즌 송’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단군 이래 최강 폭염을 겪어야 했던 2018년의 여름, 대중음악계의 나이테만큼 많아지고 다양한 시즌 송을 통해 그나마 청량감을 맛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올해 나온 여름 노래들 중 내년이나 내후년 여름에 다시 찾아들을 만큼 귀에 들어오는 노래조차 없었다. 애석하게도, 올 여름 가장 마음이 갔던 노래는, 서정주 시인의 시에 자신이 직접 멜로디를 만들어 ‘머리에 석남(石南)꽃을 꽂고 한 서른 해만 더 살아 볼거나’ 읊조리던 한 정치인의 생전 노랫소리에, 국민들이 저마다 다양한 반주를 얹었던 곡이었다. -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는 7월 24일 고 노회찬 의원을 추모하기 위해 생전에 그가 육성으로만 투박하게 부른 <소연가>를 들려줬다. 김어준씨는 “악보가 없는 걸로 아는데 악보를 누가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제안했고 이에 수 십 명의 청취자들이 악보를 만들어 보내거나 직접 연주한 음원을 인터넷에 올리며 노 의원을 추모했다.-
아무래도 내게 있어서는 그 노래가, 또다른 의미의 '시즌 송'으로써, 2018년 여름의 허망함과 불같은 더위를 애달픈 마음과 함께 상기시킬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