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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브리나 Jul 14. 2016

생을 이어간다는 것에 대해서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시는 부모님 덕분에 우리 집엔 책이 늘 많았다.

특히 초등학교 중학교때부터 출판사 영업사원을 통해 엄마가 열심히도 구매하신 계몽사와 삼성출판사의 세계문학과 한국문학 전집들이 책꽂이가 부족할 정도로 그득그득하게 꽂혀있었다.

그 책들을 통해 독서의 즐거움에 눈을 뜨고, 나아가서는 수능에서 빛나는 효과를 발휘하길 바라는 부모님의 바람이 있었겠지만 오히려 내 경우엔 그것들로 인해 고전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 때 읽었던 <죄와 벌>,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등은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이렇게 어려운 게 소설이라면 영 재미없다고 생각해버렸다.


나이가 들어서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근현대사 문학 작품에는 흥미를 느끼기도 했지만, 친구들이 모두 헤르만 헤세와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얘기할 때만은 나는 그저 눈만 꿈벅꿈벅 할 뿐이었다.

내겐 히가시노 게이고나 더글라스 케네디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훨씬 더 재밌었다.


그런 내게 이 책의 선택은 의외였다.

육아에 지친 어느 날, 서점을 훑어보다 이 책이 베스트에 있었고 그냥 어디서 들어본 제목 같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다시 보니 로맹가리의 유명한 소설이었다.

희안한 건, 처음에 재밌게 읽다가 고전인 걸 알고나자 갑자기 흥미가 떨어지면서 책을 덮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거의 고전 트라우마에 가까울 정도 아닌가.






그러다 최근 들어 다시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는데,

우와. 

내가 나이가 든건지 어쩐건지, 이런 책이 다 있지 싶었다.

정말 보석을 발견한 느낌이 이런건가.


뒷 내용이 궁금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봤던 히가시노 게이고나 더글라스 케네디의 책과는 다른, 뭔가 깊은 맛이 있다. 뒤가 궁금해서라기 보다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천천히 읽으면서 느껴지는 감정이 있고, 슬픔이 있고, 유쾌함이 있다.

이런 게 고전의 매력인건가.

그 땐 이런 매력들을 발견하기에 내가 너무 어렸었나보다.      



                                




몇 몇 페이지에서는 곱씹으며 다시 읽기도 했고, 로자 아줌마의 감정에 빙의되어 눈물이 핑 돌기도 했으며, 작가의 유쾌한 표현력에 피식피식 웃기도 했다.

그렇게 꼭꼭 씹어가며 읽다가 결국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왈칵했던 마음이 일주일은 여운이 남았다.

그 때의 마음을 수첩에 적어놨었다.




조용한 오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서 다시 이 책 마지막 부분을 집어 들었다.

벌써 마지막이다. 나는 아직 이 이야기 속에서 헤어나올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벌써 끝났다.

마지막 장면은 곧 죽을 것 같은데 계속 생을 이어가던 로자 아줌마가 죽는 장면이다.

이건 흔히 상상해오던 어떤 사람의 죽는 장면과는 달랐다.

죽기 전에 손을 잡고 유언을 하고, 차마 감지 못한 두 눈을 감겨주고, 통곡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정말 죽은건가?', '모모의 상상인가?' 몇 번이나 되 읽어가며 살폈다.

그러다가 눈물이 터질뻔 했다.

슬프다. 

이 책은 정말 슬프다.

어떻게 죽음을 이렇게 슬프게 표현했나. 

모모는 죽은 로자 아줌마 옆에서 3주나 보낸다.

시체가 썩은 냄새가 점점 진동하자 아줌마가 좋아하던 향수를 사서 부어주고, 

아줌마가 점점 썩어서 흉측해지자 화장품을 사서 손수 화장을 계속 고쳐준다.

너무나도 무덤덤하게, 일상처럼.

그렇게 계속 모모는 아줌마 곁을 지킨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아줌마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모모는 이렇게 지킨다.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하밀 할아버지의 말을,

나중에 로자 아줌마와 이별을 하면서 모모는 그 말을 되새기게 된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슬픈 마음과 함께 내게도 그 말이 기억에 남는다.







엄마가 죽기 전에 집단학살이 있었다고 한다. 로자 아줌마는 그 얘기를 늘 입에 달고 살았다. 그녀는 교육도 받고 학교도 다녔다고 한다.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 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 년여를 매달려 있은 셈이니까.
더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넣어주는 것보다 더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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