쫑알쫑알 더 잔인하게 부모 탓하기
"왜 우리 집은 서울이 아닐까?"
매일 아침 7시, 집을 나서며 항상 생각했다.
회사는 선릉역에 있었다. 매일 아침 7시쯤 집을 나와서 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잠실까지. 잠실에서 지하철을 타고 9시 전에 내 자리에 앉았다. 퇴근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더 힘들었다. 집에 도착하면 9시쯤이 되고, 밥을 먹을까 하다 귀찮아서 누워있다가, 10시쯤이 되면 엄마에게 왜 아까 밥을 권하지 않았냐고 짜증을 내며 (어처구니없는 창의적 짜증이다) 뭔가를 먹고선 후회를 했다.
그렇게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며 생각했다.
왜 우리 집은 왜 서울이 아닌가.
아니면, 말만 하면 주변에서 알 수 있는 그런 경기도는 왜 아닌가.
왜 온통 논밭으로 둘러싸이고, 강남까지는 왜 이렇게 먼가!
수도권에 살았기에 누렸을 문화적 혜택, 정보 접근성, 어떤 면에서 경쟁적이지 않은 온화한 부모님의 성향. 그런 건 생각하지 못한 채, 그냥 하염없이 위와 아래만 보았다. 그 위아래도 내가 만든 것이지만 말이다.
게다가 당시엔 결혼 전 미혼인 서울 및 수도권 출신 사람이 혼자 독립해서 사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아예 그런 생각도 시도도 하지 못했다. (사실은 집이 편했겠지… 돈이 아까웠겠지…)
왜 나는 서울에 살지 못할까.
왜 우리 엄마 아빠는 서울에 자리를 잡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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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울에서 태어난 지 8개월쯤 됐을 때, 엄마와 아빠는 경기도 변두리로 왔다.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없어서였다. 내가 너무 울어서 집주인에게 구박을 받았고, 사글세를 못 내서 보증금을 까먹다가, 아빠가 군 생활 하던 경기도 변두리의 월세가 엄청나게 싸다는 것을 발견하고선 지금의 동네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지, 그냥 서울에만 있어도 이득이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젠 나도 매달 전세 이자를 내며 뼈저리게 깨닫는다.
심지어 자녀도 없이 그냥 강아지 1마리와 고양이 1마리, 그리고 인간인 나 하나의 집 이자를 내고 먹이고 씻기고 살게 하는 데 절대적 돈이 들어간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그 어린 부부가 서울에서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리고 얼마나 합당하고 다행인 선택지인가. 그 수도권 변두리 말이다.
엄마는 그 동네에서 1살도 안 된 나를 안고 작은 옷가게를 했다.
옷가게와 그 안에 딸린 방, 대충 막아둔 슬레이트가 벽이 되어 울타리를 이룬 안쪽을 부엌이자 욕실로 썼던 집이었다. 세면대는 당연히 없고, 쪼그려 앉아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서 씻고, 따뜻한 물을 쓰기 위해 물을 끓였고, 푸세식 화장실은 슬레이트 벽 밖에 있었다.
안에 있는 작은 방은 70센티쯤 높이 올라서 있는 아궁이 같은 곳에서 연탄을 때는 '구들방'이었다. 잠들기 전 엄마가 헌 연탄을 새 연탄으로 갈아두고선, 아침엔 다시 헌 연탄을 새 연탄으로 갈아 끼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5평 남짓한 방에서 나와 남동생, 그리고 엄마와 아빠, 총 4명이 지냈다. 지금 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싶지만, 4명이 일렬로 다리를 뻗고 누워서 온갖 소리를 내며 잠들었던, 그 와중에도 제일 아랫목을 나와 동생에게 내어주었던 – 나의 생후 8개월부터 11살까지의 우리 집은 그랬다.
엄마의 옷가게는 꽤 잘됐다. 동네가 군부대 주변이었으니 다방이나 주점, 노래방이 많았고, 그 가게의 주된 손님은 동네의 아가씨들이었다. 내가 4학년이 됐을 때, 엄마는 남성복도 시작하면서 바로 옆에 똑같은 크기의 가게를 하나 더 냈다. 그만큼 넓어지면서 우리에겐 방이 하나 더 생겼고, 그 방은 창고 방이자 내 방이 되었다. 그리고 책상이란 것을 가지게 된다. 옷가지가 잔뜩 쌓인 방 한 구석에 '테레비' 에서나 보던 책상이 - 물론 그것처럼 옆에 책장까지 달린 고급형은 아니었지만 - 내게도 생긴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만능의 동그란 밥상을 펼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다음 해에, 아파트에 가게 되었다.
엄마가 아파트에 당첨됐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나조차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 얼마나 기뻤고 행복했었는지를 여전히 말씀하신다.
이제 그때의 엄마보다 훌쩍 더 커버린 채, 엄마라는 인간을 이해하게 된 나는, 아마도 그때의 엄마는 본인의 자식들이 그 환경에 노출되는 게 싫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해에 남성복 가게는 접었을 거다. 어떤 일들이 있었을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렇게 엄마의 가게는 다시 여성복만을 중심으로 하고, 우리는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서울 친척 결혼식장에서나 타봤던 엘리베이터의 15층 버튼을 누르고, 제일 높은 층 우리 집. 나도 내 동생도 자신의 방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그 아파트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지나 직장인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도 아빠도 둘 다 자신의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을 거다.
나는 12살이란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내 방이 생긴 건데도, 그때의 기쁨은 잠시일 뿐, 뭐가 그렇게 오랫동안 불만이었던 건지, 뭘 그렇게 부모 탓을 하고 싶었던 건지 정말 아주 웃기는 짬뽕이다.
그렇게 웃기는 짬뽕인 20대 직장인이 되어 잔뜩 이골이 난 채 퇴근을 했다.
"많이 힘들었지?"
그럼 나는 얼마나 내 '기'가 죽었던 일이 있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은 부모님 탓이라는 듯, 내가 잘된 건 다 내 탓이라는 듯, 쫑알쫑알 더 잔인하게 얘기하곤 했다.
사실 그 기라는 건 내가 스스로 지켜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왜 그것이 다 배경과 부모에게서 온다고 여겼을까. 그러니, 앞에서도 말했듯, 나 스스로도 타인을 그렇게 판단하고 재단했던 거다.
하지만 사실, 그냥 나 역시도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란 것을. 내가 부러워하고 열망했던 배경을 가진 친구들도 동기들도 그냥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란 것을.
모두가 각각의 세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을 거다.
그래서 끊임없이 비교했던 시절을 지나, 주변 사람들과 환경에 포용성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모든 것을 겪고 생각하고 거치고 소화하고 내 것으로 모두 흡수하고 다시 정리하고선, 가치판단 없이 온전히 고유한 나의 이야기로 말할 수 있게 된 건 꽤나 나중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