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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티브스 Jan 16. 2019

황금말(金馬) 타고 별이 된 국민 할아버지 전풍

 (田豊, 田丰, 본명 : 田毓錕, 전육곤, 1928~2015)

이제는 오래된 영화 <영웅본색> 1. 송자호(적룡, 아호)와 송자걸(장국영, 아걸)은 우애가 좋은 형제였다. 그러나 형인 아호는 암흑가의 핵심 멤버이고 동생인 아걸은 경찰학교 학생이다. 그리고 아걸은 형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사실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정반대의 행보를 걷는 두 아들의 불행한 조우를 예감한 듯 아호에게 이제 그만 어두운 뒷골목을 떠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호의 손을 어루만지는 아버지. 얼마 후 아호는 함정에 빠져 경찰에 체포되고 아버지는 괴한에 살해당한다. 아걸은 아호의 정체와 아버지가 형으로 인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를 증오하게 된다. <영웅본색> 1편의 핵심 모티브 중의 하나인 아버지의 죽음. 자호와 자걸의 아버지를 맡은 이가 바로 전풍이다. 1986 <영웅본색>에서 손을 맞잡았던 아버지와 장남의 인연은 사실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9년에 개봉된 장철 감독의 <독비도왕(돌아온 외팔이, 獨臂刀王)>에서 적룡은 여자 고수의 칼을 맞고 쓰러지는 순진한 청년의 단역이었고, 전풍은 외팔이 역의 왕우와 최후의 일전을 겨루는 악역의 주연이었다.

영웅본색에서의 전풍 : 장남의 손을 잡고 차남에 안겨 죽는다
돌아온 외팔이의 적룡(21세) : 임가(오른쪽)의 칼에 죽는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 연기 인생의 전성기를 그 유명한 소씨형제유한공사(沼氏兄弟有限公司, 이하 쇼브라더스)에서 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쇼브라더스는 전무(國際電影懋業有限公司,電懋, 후에 國泰로 이름이 바뀜) 영화사와 더불어 홍콩 영화의 초석을 세웠으며 이한상, 호금전, 장철 등의 감독과 왕우, 적룡, 강대위 등의 스타를 배출한 홍콩 최고의 영화사였다. 1925년 천일공사(天一公司)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한 쇼브라더스는 소인매, 소일부 형제가 일찌감치 영화 사업은 배급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화교 문화권을 타깃으로 설립한 배급사였다. 사업의 성공으로 1958년부터는 자체적으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는데 전풍은 이 시기 쇼브라더스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쇼브라더스의 전신 천일공사와 소일부(왼쪽) 소인매 형제
쇼브라더스의 로고 (워너브라더스의 로고와 매우 닮았다)

전풍은 홍콩 출신이 아닌 내륙의 후난 성 사람이다. 그는 연극을 좋아하여 학창 시절부터 다수의 무대극에 출연한다. 1949년에는 국민당의 공중활극단(空中活剧團)에 합류하였고 당이 대만으로 건너감에 따라 대만에서 활동하게 된다. 대만으로 건너간 지 얼마 안 되어 상해의 국태전영공사(홍콩의 국태와는 다른 회사)가 대만의 전설적 인물인 오봉을 주제로 한 오봉전을 찍으러 오는데 배우가 부족하여 현지에서 배우를 조달할 때 전풍도 초빙 배우로 처음 상업 영화에 입문한다. 이 영화는 후술 할 장철 감독의 첫 연출작으로 타이틀이 <아리산풍운>으로 바뀌었고 대만 최초의 국어 영화(북경어 영화)로 기록된다. 그러나 대만은 영화 제작이 많지 않았고 시스템도 대륙에 비해 많이 낙후할 수밖에 없었다. 전풍은 50년대에는 생계를 위해 배우보다는 부연출, 제작 등의 스텝 활동을 많이 했으며 영화감독 백극과 함께 영화 이론을 공부하며 기본기를 다졌다. 50년대 말 호황기를 맞은 홍콩 영화계는 대만 로케이션을 빈번히 하게 되는데 이때 한 독립영화감독과 촬영을 하던 전풍은 결국 그를 따라 홍콩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 감독은 <철관음>, <정무문>, <비도권운산>의 라유였다. 홍콩으로 넘어온 전풍은 1960년 쇼브라더스에 합류한다. 부감독 계약을 체결한 그는 전구부(田九部)’라는 별명을 얻으며 두 달 동안 9편의 영화를 맡는다. 첫 영화는 이한상 감독의 <양귀비>로 그는 부연출과 카메오를 겸했다. 경극에 능했던 전풍은 그 후 1962 <야반가성>에서 극장의 괴짜 노인 역을 맡으며 정식으로 홍콩 영화계에 연기자로 데뷔하게 된다. 1961년부터 63년 사이에 쇼브라더스는 무수한 영화를 생산해내며 전성기로 진입했으며 영화는 흑백에서 컬러로 옷을 갈아입는다. 이 시기에 전풍은 1963 8, 1964 6편의 개봉 영화에 출연하며 쇼브라더스의 주축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아리산풍운의 전풍과 야반가성(1962)의 포스터(전풍 있음)

한편 쇼브라더스는 1958 <강산미인>, 1962 <양산백여축영태>, 1964<스잔나> 리칭의 데뷔작이자 중국의 ‘춘향전’ 격인 <옥당춘>, 1965년 정패패의 우아함이 돋보인 <대취협> 등을 내놓으며 선전하나 감독인 이한상, 호금전과 결별한다.  이때 위기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이가 바로 장철이다. 사극으로 인기몰이에 성공한 이한상,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를 추구한 호금전과 달리 장철은 남성성의 극대화와 영화의 기계적 생산화를 꾀했다. 일관된 연출과 비슷비슷한 스토리로 자기 복제라는 비판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는 홍콩 영화계에 최초로 스타 시스템을 도입한 인물이다. 1기 왕우, 2기 적룡, 강대위, 3기 부성, 진관태 등의 스타는 장철의 시스템에서 빛을 발했다. 불혹이라는 나이와 마주하게 된 전풍은 장철의 <독비도(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獨臂刀)>, <독비도왕>, <대자객>, <단장검> 등에서 왕우의 스승, 악당, 아버지 등으로 출연하며 조연으로 연기 인생 최전성기를 맞는다. 1967년에는 무려 15편의 그의 영화가 개봉됐다.

장철의 페르소나 : 왕우, 강대위(왼쪽)와 적룡
장철 감독과 돌아온 외팔이에서 왕우와 대결하는 전풍

그러나 쇼브라더스는 1970년을 앞두고 영화판에서 서서히 침몰해갔다. 사장이었던 추문회의 자리를 소일부의 애인인 방일화가 대신했으며 영화에서 벌어들인 자본을 가지고 TV로 눈을 돌렸다. 추문회, 하관창 등은 이에 반기를 들고 골든하베스트(嘉禾娛樂有限公司)사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장철은 잔류하였으나 라유, 정창화 등의 감독은 골든하베스트로 이적한다. 쇼브라더스가 자신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고 키워주었으며 쇼브라더스만이 최고의 회사라고 생각해왔던 전풍은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방일화의 시기로 접어들자 회사의 지원은 급감하였으며 예전 같지 않은 분위기와 박탈감 등으로 전풍은 힘든 시기를 보낸다. 1971년 첫 연출작인 <금인구>를 찍기도 했지만 두 아이의 유학으로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진 그는 결국 골든하베스트에 합류하고 만다. 전풍은 쇼브라더스를 떠난 일을 매우 아쉬워했다. 노년에 그는 동년배이자 자신과 비슷한 배역으로 커리어를 쌓아왔던 배우 곡봉(谷峰)이 쇼브라더스에 끝까지 남아 최다작 배우로 기록된 것을 높이 평가하며 부러워했다. (영화만 350)

골든하베스트의 로고와 유성호접검의 곡봉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홍콩 무협 영화는 새로운 트렌드를 맞는다. 이를 주도한 사람 역시 장철이다. 창과 칼이 쉴 새 없이 맞서는 피바람의 미학을 만들어낸 그는 이전의 영화에서도 파격적이었다. <금연자(심야의 결투, 金燕子)>에서는 암기를 등장시켰고 <독비도>에서는 주인공에게 단도를 휘두르게 하며 금도쇄 같은 신무기를 꺼내더니 급기야 <독비도왕>에서는 칼 끝에서 독가스를 뿜어낸다. 병장기의 길이를 점점 줄여가던 장철은 1970년에 개봉한 <복수>를 찍으면서는 칼을 배제한다. 같은 해 개봉한 장철의 1기 페르소나였던 왕우의 감독 데뷔작 <용호문(용호의 결투, 龍虎門)> 역시 칼이 아닌 주먹으로 인물들이 대결한다. 두 영화는 이후 이소룡, 성룡의 등장으로 홍콩 영화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권격 영화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전풍이 골든하베스트로 이적할 당시 이소룡은 미국에서 홍콩으로 돌아온 후 골든하베스트에서 <당산대형>으로 이미 한 번의 센세이션을 일으킨 상태였다. 주목되었던 그의 차기작은 1972 <정무문>이었다. <정무문>은 픽션과 논픽션을 적절히 섞어 만든 영화로, 쇼브라더스에서 넘어온 라유 감독이 조연과 연출을 맡았고 그와 인연이 있던 전풍이 이소룡의 사형으로 출연한다. 같은 해에 전풍은 한국 출신으로 쇼브라더스에서 <천면마녀>로 홍콩 영화 유럽 수출 1호를 기록한 정창화 감독과 <죽음의 다섯손가락(天下第一拳)>을 촬영하고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는 등 안정적인 연기 시기를 보낸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의 금도쇄, 짧아진 검의 길이, 돌아온 외팔이의 독가스가 나오는 칼
정무문에서 처음 쌍절곤을 든 이소룡과 죽음의 다섯손가락의 라열

경제 부흥과 더불어 홍콩 자본의 힘이 커지고 이소룡, 성룡 등의 등장으로 홍콩 영화의 전성기가 도래하자 1970년대 말, 80년대 초에 홍콩에는 광둥어 영화의 붐이 인다. 그간 홍콩 영화의 부흥에 일조했던 전풍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역풍을 맞는다. 광둥어에 약한 그에게 맡겨지는 배역이 점점 줄었던 것. 호금전의 <산중전기>, <공산영우>, 성룡의 <용소야> 등을 끝으로 그는 잠시 미국으로 떠나 휴식기를 갖는다. 그러나 다섯 살 때부터 연극을 접하며 평생 무대를 사랑한 그에게 휴식이 길어질 리가 없었다. 쇼브라더스에서 인연이 있었던 대만 감독 임복지의 요청으로 돌아온 그는 1983 대만전시공사(湾電視公司, TTV) TV 드라마 <성성지아심(星星知我心)>을 통해 연기에 복귀한다. 5남매의 장녀인 왕수수를 입양하는 할아버지 역으로 카메오 출연한 전풍은 드라마의 인기로 국민 할아버지의 칭호를 얻으며 재기에 성공한다. 1987년까지 매년 1편 이상의 드라마에서 연기한 그는 <영웅본색1>, <호소자3> 등으로 영화계에 복귀하였으며 89년부터 1993년까지는 <중환영웅>, <청사> 등에 출연하며 영화에 전념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고령으로 많은 활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2000 <공시인생극전-풍차>의 안교수역, 2002 <공시인생극전-노위>의 노위 역으로 대만 금종상(TV드라마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며 연기 인생 마지막을 불태웠다. 2004 <애신>, 2005 <정탐물어>의 영화와 드라마를 끝으로 전풍은 80세에 은퇴를 선언한다. 노년임에도 이메일과 페이스북 등을 즐기며 젊음을 잃지 않았던 전풍은 2014년 대만 금마장(영화 부문) 평생 성취상을 받고 나는 너를 반세기 동안이나 기다려왔어라는 귀여운 수상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2015 10 22 87세에 타계한 그는 중화권 영화계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장철의 쇼브라더스 무협 시대, 이소룡-성룡의 권격 시대, 주윤발의 느와르 시대를 거치며 흑백과 컬러, 대만과 홍콩, 영화와 TV 드라마를 넘나들었다. 인기 있는 주연 배우는 아니었지만 꾸준함으로 거목이 된 그가 금마장 수상식 무대에서 읊은 자작시는 다음과 같다.

‘금마, 친애하는 금마, 기다리던 금마, 50년을 기다리던 금마, 65년 동안 연기하던 87세의 한 늙은 개구쟁이가 51호 금마를 타고 줘수이강(탁수강, 타이완 중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에서, 옥산(타이완의 최고봉)에서, 아름답고 보배로운 섬(타이완, 관용적 표현)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네.’

(金馬,親愛的金馬,等候的金馬,等待了50年的金馬,一個從影65年,87歲的老頑童,乘51號金馬,在濁水溪,玉山,在美麗寶島,飛騰)

노년의 전풍과 금마장을 치켜든 전풍
전풍의 작품들 (총 17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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