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다고 생각될 때는 정말 늦은 거다.(튼튼이의 모험)
'사람이 어디 가서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야 된다고. 쓸모.’
– 영화 <델타 보이즈> 중, ‘일록의 매형’
알면서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 살찌는 걸 알면서도 밤에 라면을 먹고 싶고, 화낼걸 알면서도 친구를 약올리고 싶고, 비웃음 당할 걸 알면서도 허세를 부리고 싶다. 남도 알고 나도 다 알지만 가끔은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
나쁜 것이 아닌데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의에 의해 못하게 되면 오기가 생겨 더욱 그러고 싶다. 고봉수 감독의 영화 <튼튼이의 모험>은 해체 위기의 레슬링 부를 살리려는 ‘충길이’와 친구들의 분투를 코미디로 그려냈다. 어린 나이지만 퍽퍽한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은 이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레슬링을 삶의 탈출구로 여긴다. 요즘 같은 세상엔 이런 아이들이 되레 문제아로 보인다.
정말 그래서인지 어른들 말을 참 안 듣는다. 특히 ‘충길이’가 제일 그렇다. 학교에서 재개발로 체육관을 없앤다는데 거기서 숙식을 해결하며 훈련한다. 비록 매일 술에 취해 있긴 하지만, 아들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아버지가 그렇게 밉단다. 레슬링 매트 대신 버스에서 운전대를 잡고 착실히 살고 있는 코치 선생님을 계속 찾아가 운동을 하게 해달라며 귀찮게 한다. 심지어 그나마 철이 들어 공사판에서 맘 잡고 열심히 살아 보려는 ‘진권이’에게도 수시로 찾아가 레슬링을 하자며 부추긴다. 다들 싫다고 아니라고 하는데 지겹도록 설득한다. 정말 끈질긴 녀석이다.
팔랑 귀 ‘진권이’도 문제이기는 마찬가지다. 첨엔 똑똑한 것 같았다. 그런데 못된 ‘충길이’의 꾀임에 홀랑 넘어갔다. 돈도 안 되는 레슬링을 다시 시작하는 바람에 필리핀을 보내드리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당분간 지키지 못하게 됐다. 훈련은 열심히 했지만 기본 중의 기본인 계체량도 통과하지 못한다. 실력도 모자라서 초등학생 선수와의 연습 경기도 두 판을 번개같이 내준다. 코치에게도 레슬링을 또 다시 안 하겠다고 한다. 두 번째 포기다. 거기다 ‘혁준이’의 ‘블랙 타이거’ 선배에게는 왜 무례하게 굴었는지 혼쭐이 나고 다쳐서, 정식 경기에는 아예 뛰지도 못했다. 줏대도 실력도 없는 민폐 같은 녀석이다.
반면 철이 들어 일찍 자신의 남성적 매력을 발견한 ‘혁준이’는 마음이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보낸다. 누나가 맛있는 거 사먹으라며 꼬박꼬박 용돈도 준다.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형이 좀 문제이긴 하지만, ‘블랙 타이거’친구들이 있어서 든든하다. 재능을 잃지 않도록 가끔 주먹 쓰는 일도 잊지 않는다. 남보다 앞서가는 ‘혁준이’는 어른들이 그렇게 마셔대는 초록 병에 든 음료수의 맛을 벌써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너무 앞서가면 안되니까 머리는 90년대말 유행했던 <별은 내 가슴에>의 ‘강 민 (안재욱)’ 스타일로 밸런스를 맞춰준다. 답답한 형과 대학가는 게 소원인 누나의 비위를 그냥 한 번 맞춰주려고 레슬링 부에 들어가 보지만, 그것은 ‘혁준이’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재능 낭비일 뿐이다. 갓 들어온 ‘혁준이’는 5년 동안 레슬링을 해 온 ‘충길이’보다 훨씬 뛰어났다. 여러모로 훌륭한 녀석이 아닐 수 없다. 또 얼마나 자신의 미래를 통찰하는 녀석이냐 하면, 레슬링 부에 가입 전하기 전부터 집에서 ‘Royal Rumble’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Royal Rumble’은 WWE (World Wrestling Entertainment), 미국 프로레슬링 협회에서 개최하는 경기로 여러 레슬러가 한꺼번에 대결해서 링 안에 남은 최후의 한 명이 승리하는 경기다. 물론 ‘충길이’가 하는 레슬링과는 다른, 일종의 쇼인데 ‘혁준이’는 이미 레슬링의 묘미가 무엇인지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렵게 성사된 ‘함평 골프고’와의 도 대회 예선에서 천재 ‘혁준이’는 레슬링은 쇼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었다. ‘혁준이’의 깊은 뜻을 알 리가 없는 심판은 물론 퇴장을 선언했지만 말이다.
고봉수 감독은 전작 <델타 보이즈>에서 보여준 기법들을 여전히 유지한다. 극의 빠른 진행을 위해 컷과 컷 사이를 짧게 끊으며 여운을 배제한다. 또 인물들 간 대화에서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를 자주 사용한다. 한 대의 카메라로만 촬영한 한계를 만회하고, 화면에 입체감을 불어넣기 위함이다. 레슬링 부 세 친구 중 ‘진권이’만 거울에 비친 모습이 없는데 이는 나머지 두 친구가 특히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델타 보이즈>와 <튼튼이의 모험>은 시리즈라고 해도, 둘을 한 편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주제, 출연진, 디렉팅 모두가 닮아 있다. 그러나 <튼튼이의 모험>은 조금 더 진지하다.대회를 준비하는 ‘충길이’의 훈련 모습은 <델타 보이즈>에서 볼 수 없었던 비장함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튼튼이의 모험>에서는 드디어 대회에 참가하는 진화를 보여준다. 갈등 구조도 <튼튼이의 모험>이 조금 더 입체적이다. <델타 보이즈>에서는 대회에 참가할 수 없음을 아는 ‘일록’의 내적 갈등이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준세’와 ‘지혜’ 그리고 ‘대용’의 외적 갈등은 소멸하고 만다. <튼튼이의 모험>에서는 모두가 레슬링 부에 미래가 없다는 갈등을 기본으로 깔고 간다. 거기에 ‘충길이’ 한 명이 여러 명을 설득하러 다니는 일대다의 갈등은 ‘블랙 타이거’ 아이들과 벌이는 파국으로 중심이 이동한다. 스포츠를 주제로 한 코미디 독립영화 <족구왕>과 비슷해 보이지만 끝내 꿈을 이루는 판타지로 그려지는 <족구왕>과 미완성으로 현실적인 결말을 맺는 이 영화는 결이 다르다. <델타 보이즈>와 마찬가지로 <튼튼이의 모험>은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주제는 익숙하지만 익숙해서 또 새롭다. 두 영화는 삶의 관점을 바꾸어 보라고 부언한다. 심지어 문제아 ‘충길이’도 말한다. 감동은 촌스러운 데서 오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