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생님들에게 의지했던 이유는 엄마의 말 때문이었다. 혼자 우리를 키우던 엄마는 열심히 애쓰고 애썼다. 엄마는 자주 이렇게 이야기했다.
“날 힘들게 하지 마. 엄만 이미 너무 힘들어.”
내가 사춘기의 시간을 보내면서 짜증도 내며 마음이 복잡할 때 엄마는 나에게 잔소리를 했다.
“왜 너까지 그러는 거야?”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거나, 내 처지를 대변해 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짐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든 힘들지 않게 하는 딸이 되려 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다면 이해하려 했다.
엄마의 세계, 오빠의 세계, 아빠의 세계까지...
중학교 시절에 난 아빠를 찾아갔다. 아빠가 외로울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가족이 함께 잘살고 싶다는 내 마음도 전하고 싶었다. 서로 연락하지 않고 보지 않으면 멀어지기에 함께 할 기회를 놓치는 것 같았다. 친구들처럼 아빠 사랑도 받고 싶었다. 갈 때마다 주는 아빠의 용돈도 좋았다. 아빠가 나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빠는 나의 성적과 단정한 모습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야기 중에 아빠는 다방 아주머니와 함께 살고 있고, 그분에게 아들이 있다고 했다.
‘그 아줌마랑 아들까지 챙기면서 지내고 있다고?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데 챙겨주지도 않으면서?’
혼란스러웠다.
'아빠가 외로울 것 같아서 왔는데...'
나처럼 그리워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빠가 그 말을 한 것이 나보고 이제 오지 말라고 하는 건가? 다방 아주머니가 싫어해서?’
엄마 몰래 아빠를 만나고 온 것이었는데 엄마에게 들켰다. 엄마는 내가 돈 받고 싶어서 아빠를 만났다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다행히 고등학교에는 좋은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있었다. 새로 사귄 친구가 방송반을 지원한다고 해서 나도 따라갔다. 방송반보다 그 친구랑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나는 붙고, 친구는 떨어졌다. 미안한 마음도 잠시, 그렇게 시작한 방송반은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했다. 방송반을 하러 학교에 갔다. 아나운서로 발음도 좋아졌다. 신문방송학과를 간 선배가 와서 발음훈련도 시켜주었는데, 내가 좀 더 나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내가 선곡한 음악으로 채운 점심 음악방송도 친구들이 좋아해 주었다.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애국조회시간, 사회를 맡으며 자신감도 조금씩 생겼다. 내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 3이 되면서 나는 신문방송학과를 가고 싶었다.
“엄마가 혼자 돈 벌기가 힘들어. 오빠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신학교에 간다고 하니 돈 벌러 가라고 할 수가 없어. 내가 나 잘 먹고살자고 이러는 거 아니잖아. 가족이면 힘든 시간을 같이 해야지. 취업 반에 가서 직장에 가라. 대학교에 가도 등록금을 해 줄 수 없어.”
엄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꿈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무슨 대학이야. 항상 오빠가 먼저지. 엄마가 고생하니 가족이니까 같이 해야지. 열심히 노력하면 뭐 해. 다 소용없는걸.’
학교선생님들은 나보다 더 안타까워하시며, 대학진로를 권하셨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지한 대화를 해 주시면서.
갈등하지는 않았다. 진로를 선택해도 등록금을 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