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들어가기 전 아빠는 막내 삼촌의 교회 개척을 위해 우리의 생계인 개인택시를 엄마와 의논도 하지 않고 팔아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어그러져 있던 엄마 아빠 사이가 결정적으로 깨지게 된 사건이었다. 큰소리가 오갔고, 아빠는 그날로 할머니 집으로 나가버렸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새벽 첫 버스를 타고 할머니 집으로 갔다. 할머니는 문을 빼꼼히 열고 아빠가 없으니 돌아가라고 호통을 쳤다. 엄마와 할머니가 실랑이하는 동안 나는 엄마 뒤에 서 있다가 할머니 집 안에 있는 아빠를 봤다. 멀찍이 서 있던 나는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중학생이 되는 일 따위는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배정받은 학교는 짧은 커트 머리를 해야 했다. 6학년까지 배냇머리를 하고 한 번도 자르지 않던 머리카락을 잘랐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벼웠다. 이 느낌과 함께 새로운 시작과 함께 공부도 열심히 잘하고 싶었다. 시원할 줄 알았는데 내 마음은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웃으며 놀고 싶었고, 공부도 잘하고 싶었다. 죽고 싶기도 했다. 마음을 잡아맬 리본이 없었다. 이리저리 흔들렸다. 누군가가 필요했다.
중1 담임선생님은 도덕 선생님이었다. 나는 담임선생님께 매일 공부한 기록이 남아있는 연습장을 검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선생님은 따뜻한 분이었다. 그렇게 선생님과 내 마음을 나누는 노트가 오갔다. 검사를 받으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하지 못한 날도 선생님께 나의 상황을 전하면서 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내 마음을 아는 어른과의 대화는 처음이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학교 가는 것이 좋았다. 2학년으로 올라가며 선생님과 헤어지기 싫어 울었다.
해마다 나에게는 좋은 선생님들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최정균 선생님은 즐거운 유머와 몸짓으로 어려운 수학 시간을 재미나게 이끌어 주었다. 숨넘어가도록 웃었던 시간이었다. 한 번은 수학 공부를 많이 못 하고 시험을 봤는데, 100점. 엥? 진짜???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그냥 재미있게 웃었던 시간이었는데 이게 웬일이야? 점수가 잘 나오니 그 시간이 기다려지는 수업 시간이 되었다. 그 뒤로 교무실로 선생님을 찾아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기도 했다. 한 번은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정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들으신 선생님은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시켜 주었다. 아무런 말 없이. 소중한 대우를 받은 기분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결혼해서 영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내가 세상에 대해 신뢰를 하게 해 준 멘토였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최정균 선생님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발령을 받게 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이 발령받으신 고등학교로 나도 배정되기를 너무도 간절히 바랐다.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너무 절망적이었다. 내가 숨 쉴 수 있는 곳은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몰랐다. 고등학교를 배정받고도 몇 달 동안은 하교 후에 최정균 선생님이 계신 고등학교를 찾아가기도 했다. 선생님에게 인사를 드리기도 했지만, 멀리서 바쁘게 일하시면서 웃고 계신 선생님의 모습을 조용히 보고, 집에 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