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라는 강에서 디자인이라는 배를 타고 건너다
꽤 긴 시간 동안 디자이너로 일해왔지만 ‘디자인을 한다’는 행위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때로는 그래픽 작업으로, 때로는 심도 있는 대화만으로 디자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일방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콘텐츠와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상호적인 결과물이다. 따라서 대화를 통해 디자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언어와 말도 좋은 디자인일 수 있겠다.
디자인에 대한 정의는 사회 변화와 함께 다양해지고 세분화되었다. 스타일, 도구, 제작과 같은 가시적인 요소뿐 아니라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나 가치처럼 근본적인 개념조차 시류에 편승하고 있다. 강물에 떠 있는 배는 단지 출렁거리고 흔들릴 뿐이다. 강 건너 나무나 건물처럼 고정된 기준이 있을 때 비로소 내가 탄 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느낄 수 있다. 변하지 않는 기준이 있어야 변화를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의 학생 시절은 구명보트에 노 없이 올라탄 것 같은 나날이었다. 디자인을 어떻게 할지 배우는 데만 신경 쓰다 보니, 오히려 디자인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못하고 흘러갔던 것 같다. 계획에도 없던 휴학을 하고 참여한 해외 워크숍은 내가 얼마나 무심히 떠밀려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기회였다.
당시 도쿄 ggg갤러리에서는 일본 신인 디자이너 작품을 선보였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디자이너들이었지만 다들 대단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부스에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조합되는 모듈 일러스트레이션 영상이 있었고, 그와 상반된 불규칙한 손글씨로 작업한 북디자인이 함께 전시되고 있었다. 전혀 다른 결과물이지만 하나의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바로 이 책의 지은이인 요리후지 분페이의 작품이었다.
전시에는 많은 부분을 모듈 일러스트레이션을 보여주는 데 할애하고 있었지만, 그가 이번 전시를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참여한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일러스트레이션이 필요한 많은 일을 적당한 수준의 완성도를 가지고 빠르게 처리하기 위한 일종의 ‘디자인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사회의 변화에 논리적으로 대처하는 그의 작업을 보며 나는 디자인에 관해 다시 생각했다.
요리후지 분페이는 국내에 잘 알려진 디자이너는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이미지 검색이 자유로워질 때쯤에서야 공공장소 매너 광고로 선보인 위트 있는 그림이 먼저 알려졌다. 그런 이유로 그의 일러스트레이션만 집중해서 소개되었고, 다른 작업들이 소개되더라도 적은 비중이었다. 그리고 몇 해 전, 그가 쓰고 그린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일러스트레이션이 먼저 국내에 소개된 탓에 역시 일러스트레이션이 주를 이루는 책들이었다. 그렇게나마 그의 눈으로 보는 세계를 접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한동안 국내에서 그의 저서를 만나지 못했는데, 이번에 그 기회가 생겼다. 더욱이 디자이너로서의 요리후지 분페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은 그가 학창 시절 데생을 배우기 시작했던 때부터 아트 디렉터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다. 사회라는 강에서 디자인이라는 배에 올라 종횡무진 나아가는 그의 '항해일지'다. 흔들리는 배를 타고 나아가지 못하던 나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뱃멀미 정도는 참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조금 더 노력한다면 변화에 떠밀리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건너갈 수 있지 않을까.
추가1. 안그라픽스에서 얼마 전 출간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의 추천사를 썼다. 좋아하는 디자이너의 글을 읽고 추천사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고 덮썩 쓰겠다고 약속하고 얼마 뒤 두툼한 원고 상태의 책이 배달되어 왔다. 추천사 원고 기한을 조금 넘겨 졸필을 보냈는데 책에 실린 것을 보니 그래도 독자들이 읽을 수 있게끔 편집이 잘 되었다. 이 자리를 빌려 편집자님께 감사드린다.
추가2. 추천사를 힘들게 쓰게 된 것과 별개로 남보다 먼저 요리후지 분페이를 만날 수 있어 매우 기뻤다. A4용지에 뽑은 아직 편집이 덜 된 상태의 원고였지만 읽는 내내 미소를 지으며, 인상을 쓰며, 과거를 회상하며, 미래를 상상하며 읽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에 내가 처한 고민 덕분에 책을 덮어놓고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하는 일을 '좋아했던'과거형으로 밀어내지 말고 계속해서 좋아하며 일하고 싶다.
p.48 나는 스스로 지금 정말 즐거운 일을 하고 있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실제로 “분페이 씨는 참 즐겁게 일하네요?”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좋아, 즐거워 보인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렇게 마음먹고 오로지 해야 할 일에 응했다. 너무 정신없을 때는 우울해질 여유조차 없는 법이다.
p.85 내가 나로 존재하는 이유는 차이와는 다른 독창성이다. 독창성에는 ‘차이’와 ‘실존’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이 둘을 양자택일하지 않고 하나로 볼 수는 없을까? 차이에 주목해 그 질이 향상되는 방법을 ‘레버리지’, 실존에 주목해 그 질을 높여가는 방법을 ‘이퀄리티’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p.205 사회에서 규정한 ‘직업’은 마스크나 깃발처럼 기능이 나뉘어 있다. 하지만 상황이 시시각각 변하고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시대에는 ‘오늘은 마스크였지만, 내일은 망치가 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p.210 A에서 B로의 변화가 아니라 ABCD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다. 변화에 대응하는 것과 변화가 보편화된 일상에서 사는 것은 다른 문제다. 새로운 일상 속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은 나이와 상관없이 매한가지다.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서 있는 것이다.
저자: 요리후지 분페이 (Bunpei Yorifuji,よりふじ ぶんぺい,寄藤 文平)
북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아트 디렉터, 저술가. 재치 넘치는 작업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무사시노미술대학 시각전달디자인학과를 중퇴하고, 광고회사 하쿠호도에서 일했다. 1988년 요리후지 디자인 사무실을 열고, 2000년 유한회사 분페이 긴자를 설립했다. 2008년 『생활잡담수첩』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이너』로 제29회 고단샤출판문화상 북 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다. 카피라이터 오카모토 긴야岡本欣也와 함께 제작한 일본담배산업의 포스터와 신문광고로 도쿄 ADC상과 일본 타이포그래피연감 대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 『죽음 카탈로그』 『원소 생활』 등이 있으며,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지진』 『숫자의 척도』 『쾌변 천국』 『낙서 마스터』 등이 있다.
저자: 기무라 슌스케 (Shunsuke Kimura,きむら しゅんすけ,木村 俊介)
인터뷰어이자 저술가. 도쿄대학 재학 시절 일본의 지성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의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인터뷰어의 길로 들어섰다. 카피라이터 이토이 시게사토?井重里 사무실을 거쳐 독립했다. 전문 인터뷰어로 활동하며 20년 동안 1,000명 이상의 이야기를 듣고 정리했다. 지은 책으로 『인터뷰』 『좋은 서점원』 『만화 편집자』 『기인 하니야 유타카의 초상』 『일을 하는 작은 행복』 등이 있다.
역자 : 서하나
건축을 공부하고 인테리어 분야에서 일했다. 직접 디자인하기보다 감상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경외어전문학교에서 일한통번역 과정을 졸업한 뒤 일본의 좋은 책을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기획하고 제안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가리모쿠60 스타일 매거진 <K>를 번역했다.
주1. [by THANKSBOOKS]에 게재되는 글은 홍대앞 동네서점 땡스북스에 제가 써서 올렸던 에세이/리뷰를 다시 정리한 글입니다. 이번 글은 안그라픽스에서 출간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의 추천사입니다. 필요에 따라 처음 게재되었던 글과 다르게 편집/각색되거나 내용이 추가될 수 있습니다.
주2. 위 내용은 개인적인 감상으로 출판사 및 땡스북스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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