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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이저 Oct 17. 2020

제법 안온한 날들


남궁인 작가의 다른 책처럼 응급실 이야기가 주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과 달리 초반부에 연애 관련 글이 많아 약간 당황했던 책. 연애에 대한 환상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 부분은 인스타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글귀처럼 느껴졌다. 

작가가 본격적으로 응급실 이야기를 쓴 다른 책들은 활자로 느끼기에도 버거운 에피소드들이 많아 이번 책은 소소하지만 밝은 병원 내 이야기가 채워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그의 글에서 등장하는 환자들의 끝은 대부분 비극이었다. 

책 한 권을 읽는 동안 연애 관련 글에서 한없이 무료했다 응급실 이야기에선 한없이 나락으로 내려앉는 기분이 수십 번 오갔다. 요즘 내 기분도 그랬는데. 오늘 하루는 더 밀도 있게 감정 소모를 한 기분이다.  




기억에 남는 글들은 연애 글도 아니고 응급실 환자들 얘기도 아닌 범주에 속하는 글들이다.  


"알지 못함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최악이다. 그래서 응급의학과 의사의 일에는 알지 못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 포함된다."-126p 


사람들은 실수를 하고 나서 "몰랐습니다"라고 변명하곤 한다. 실제로 모르고 저지른 죄가 더 면책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때론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위험하고 책망받아야 할 때가 있다. 모르고 저지르는 일은 내면에 브레이크가 없어 더 큰 실수를 낳기 때문일 것이다.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지혜이고 통찰일 것이다. 


" 머리를 새로 하면 사람들의 머리칼만 보이고 가방을 사면 사람들의 가방만 보이는 것처럼, (무릎을 다치고 난 뒤) 나는 동영상 속 사람들의 춤추는 무릎이나 달리는 무릎이나, 하여간 그 싱싱한 무릎들만 보였다."-112p


불확실한 미래가 이어질 것이라는 공포감에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사는 요즘, 무슨 일이든 만족스럽게 완결 내보지 못했다는 자책감, 부지런히 생산적으로 사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으로 가득한 나는, 온 세상 사람들이 부지런해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는 작가에 대한 질투가 어렸고 유튜브에 올라온 시답잖은 가짜 뉴스일지언정 열렬히 편집하고 올린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 든다. 하물며 컵 하나, 연필 하나를 봐도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들을 떠올려 나를 한심스럽게 여기는 짓을 멈추지 않는다. 누워있는 건 똑같지만 열정적으로 덕질을 하는 내 동생마저 부러울 지경이다. 내게 결핍된 것, 갈망하는 것을 온 세상에서 찾아냄으로써 내 결핍을 채우려는 건가 싶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전화를 걸지 않는다. 무엇인가 하고 있는 일상의 집중을 깨뜨리면서까지 누군가와 통화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은 많지 않다."-88p


엄청 부지런히 사시는구나.. 생각하며 이질감을 느끼다 처음으로 공감됐던 글. 작가는 부지런히 사는 자신의 일상을 깨기 싫어 통화를 하지 않는다지만 나는 단순 숨쉬기 운동만을 하고 있을 때에도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 콜백도 거의 안 한다. 카톡보다 전화를 좋아하는 몇몇 지인들은 이런 식으로 멀어졌으리라 짐작한다. 그들이 꽤 기분이 상했으리라 생각하지만 애써 변명을 하지도 않았다. 달리 내 유난스러움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는 친구들은 나를 '그냥 전화를 안 받는 애'라고 생각하고 달리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냥 이런 애'라고 받아주는 그들이 얼마나 고마운 지 모른다. 전화를 받지 않는 이유가 없진 않다. 숨만 쉬고 있든, 유튜브를 보고 있든,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예기치 않게 사회성을 내뿜어야 하는 일은 내게 꽤 버거운 일이다. 약속을 잡고 친구들과 만나고 노는 일은 좋아하지만, 내가 예정한 일상을 깨고 갑작스레 울리는 전화는, 막상 받고 보면 신변잡기로 몇십 분을 단 한 사람을 위해 감정노동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와도 같다. 그들이 심심한 시간에 나의 시간을 바치는 느낌이랄까.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그들에겐 더 큰 상처일 것이 분명하니, 나는 그냥 이해받지 못하는 쪽을 선택한다. (쓰고 보니 더 사회성 없는 히키코모리 같아서 더더욱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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