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Joon May 15. 2021

출판 계약서 구경하기 힘드네

나도 싸인 엄청 잘하는데

다시 한번 밝히지만 난 방송국 드라마 작가가 아니다. 그저 모든 게 실제 상황일 뿐이다. 이번이 벌써 몇 편인 줄 아는가. 무려 아홉 번째 글이다. 인기 있는 드라마는 횟수를 일부러 늘리기도 한다는데 난 애당초 그럴 의도도 여유도 없었다. 여기까지 흘러올 줄은 예상도 상상도 못 했다. 결과물 없이 질질 끌어가며 연재해야 할 줄 알았다면 시작도 안 했을 테다. 여태 아직 계약서 구경도 제대로 못 해보고 있는 상황이라니 쓰는 나도 답답하다. 스타일에 안 맞는 지겨운 구성을 애초에 짰을 리가 없다. 한풀이는 그만하고 지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기적처럼 운명의 출판사를 만났다. 구름 위를 걸어 다니는 기분을 만끽했다. 이야기가 너무 잘 통했다. 그러다 누군가 일부러 숨겨놓은 듯한 위기가 발생했다. 사소한 문제가 아닌 모든 게 없던 일로 될 수 있는 상황.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위기의 출발은 원고의 정체성이었다. 글을 배워 써본 적도 없고, 책을 내본 적은 더더욱 없다. 머리에서 나오는 대로 글자에 담기 바빴다. 쏟아낸 글이 모여서 어떤 종류의 책이 될 수 있을지 따져봤을 리 없다. 원고 투고할 때가 되어서야 '출간 분야'를 뭐라고 할까 들여다봤다. 육아를 겪은 나만의 이야기니까 당연히 '육아 에세이'겠거니 하다가도, 아빠 엄마들이 널리 알았으면 하는 내용이기도 해서 '부모 교양서' 같기도 했다. 뭐라고 딱 집어 말하기 어려웠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법인데. 쓴 사람도 헷갈릴 정도니 남이 보기엔 더 그랬으리라. 편집자는 처음부터 정확히 짚어냈고 방점을 '부모 교양'에 찍자고 했었다. 난 반대했다. '에세이'라는 외래어가 가지는 사대주의적 멋짐 때문인지 끝끝내 이를 고집했다. 내 고집을 존중해줬고 내부 최종 검토 회의에서 최선을 다해 변호했지만 결국 에세이 출판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이 났다. 거부했던 '부모 교양'으로 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출간 계약의 무산이 확실했다.


편집자의 메일을 받고 한동안 멍했다. 출판사와 구체적인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수도 없이 뒤집힌다더니. 나쁜   빼먹지도 않고 챙겨 먹는다. 어쩌지, 어떡하지. 온갖 별생각  났다. 출간 제안을 했던 다른 출판사 대표님께 이제라도 다시 기회를 달라고 죄송하다며 연락을 해야 하나 싶어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수능날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처럼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정신을 잡기 위해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나서 찬찬히 상황을 다시 살폈다. 그동안 오고 갔던 편집자와의 대화를 꼼꼼히 읽었다. 핵심이 보였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책의 방향, 목차 흐름, 대상 독자까지 변하는  없었다. 출간 분야 변경 가능성도 처음부터 서로 알고 있었다. 조용히 적어 내려갔다.  글과 생각에  들어준 편집자를 믿으면서. 그대로 변함없이 담길 수만 있다면 출판사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전했다. 보내고 나서  풀리길 바라는 기대를 잠재우느라 혼났다.   있는   했으니 기다릴 뿐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상대를 배려하며 지내던 그때처럼 편집자를 믿고 기다렸다.


며칠  답이 왔다. 간단했다. 출판사 입장을 양해해주어 감사하다고. 보낸 의견처럼 원고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분야가 결정되었으니    팔리는 방향으로 고민하겠다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출간 분야 변경은 출판 브랜드 변경으로 이어졌다. 상관없었다.  속의 것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많은 독자에게 전달하는  그들의 전문 영역이기에 믿고 맡겼.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출간 일정부터 인세율, 선인세처럼 전설로만 들어오던 소재가 오고 갔다.


그 이름도 웅장한 '출판권 설정 계약서'


드디어 서명했다. 엊그제 계약이 완료됐다.  정도면 완전한 리얼 타임 실시간 중계다. 방송계였다면  주는 사람이 하나는 있지 않았을까. 처음 책을 내려고 마음먹었던 소신을 증명해냈다.  생각이 담긴 글이 세상에 퍼질 만한 가치를 가졌다고 여기는 누군가가 정말 있었다. 그날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언젠가  거로 생각했지만 되고 나서의 흥분과 감동은 상상과 달랐다. 기분이 좋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예상보다 훨씬.


아마 이쯤 되면 궁금해할  있다. 도대체  군데 출판사에 투고해서 계약에 이르렀을까? 구체적인 숫자는 나중에 엄청나게  되고 나서 하 회고 방식으로 밝히겠다. 어지간하면  하겠다는 말이다. 묻지마 투고는  했다. 어디서 투고 이메일 주소를 잔뜩 받아다가 통으로 단체 메일 뿌리는 방식은 피했다. 하나하나 세심히 출판사를 살펴서 구별하고 구분했다. 가지고 있는 출판사 리스트  보낸 곳과  보낸 곳이 각각 절반이다.  맞는 곳은 보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정도 보내면 되고도 남겠지 했다. 차이고 차이면서 오기가 생겼다. '어라,  더하면 되겠지?' 어느 순간부터 쌓이는 숫자는 의미를 잃었다. 어차피  때까지  거였고, 아직  만났을 뿐이라고 여겼다. 낙담하다가도 재빨리 회복했다. 믿었다. 나를 믿고  생각이 담긴  글을 믿었다. 아무도 믿지 않을 때도 나만은 믿어주었다. 하나는 확신할  있다. 어떤 출판사 수를 생각하든  이상일 거라고. 하긴 전체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아보면 인생은 모두 그랬다. 대학 합격도, 취업 성공도, 결혼 골인도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2, 3  이상 있어 봤자 골칫거리였다. 결국 필요한  1. 나를 위한  하나의 승리. 내게 찾아온 지금의 귀중한 1승에 만족하고 감사하다.

이전 08화 첫 책은 이곳에서 내고 싶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