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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Apr 07. 2024

사랑하는 사람에겐 말도 사랑스럽게

[전업 아빠 육아생존기] 10화

오랜만에 큰 소리를 냈다. 매일 아침 치르는 조급한 의식인 아들의 학교 갈 준비가 더디고 더뎠다. 늦는 이유는 이미 다 해봐서 더는 새로운 게 없을 것 같았지만, 여전히 예상을 뒤엎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날은 굳이 아침을 티브이 보며 먹겠다고 우기더니 우유를 기어코 카펫에 쏟았고, 옷을 다 입혀 놓으니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로 향했고, 신고 갈 신발을 엄마가 출근하며 몰고 간 차에 두고 내려 신을 게 없었다. 일부러 작정한 것처럼 제시간에 등교할 수 없는 온갖 경우의 수를 동원했다. 


어느새 등교 시간은 한참 지나있었고, 결국 난 답답한 마음에 상황을 원망하며 허공에 대고 탄성을 질렀다. 아빠의 갑갑함을 전하려는 의도도 섞여 있었다. 놀란 아들은 움찔하며 울먹였다. 아차 싶었다. 그동안 꽤 오래 감정을 잘 다스리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무너지며 실수했다. 정신을 바로 차리고 굳어있는 아들에게 연신 사과했다. 학교에 보내놓고 나서도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하교 후 눈을 마주 보며 다시 잘못을 고백하고 풀었지만, 그렇다고 벌어진 일이 사라질 순 없었다. 좁디좁고 얕디얕은 못난 속을 자책하며 다시 한동안 자숙했다. 별일 없이 잘 지냈다며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을 무렵, 아이의 폭탄선언을 들었다.


무사히 하루가 지나갔다고 안도하며 잠이 들려던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뜬 아들은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난 인정할 수 없었다. 무려 하루에 3번이나 혼이 나서 기분이 좋지 않다는 충격적인 폭로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떠올리고 기억을 뒤져봐도 단 한 번을 찾을 수 없었다. 넉넉히 물러난다고 해도 반 번 정도는 되려나. 결백을 주장하려 입을 열다가 진지한 어린아이의 표정을 보고는 곧장 다물었다. 가해자는 몰라도 피해자는 명백한 사연이 있을 테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속상한 스토리를 끝까지 들었다.


처음은 미술 수업에서 그려온 점토 도자기가 떨어져 깨졌을 때. 딱딱한 바닥이라 약한 걸 놓치면 박살 나기 쉽다. 아들이 직접 옮기다가 산산조각이 났다. 공들여 만든 것이라 많이 속상해했다. 하나 난 함께 속상해하지 않았다. 나까지 같이 슬퍼하면 되돌릴 방법이 없는 상황을 더 아까워할까 봐서. 네가 마음이 아픈 게 당연하다 설명하며 슬퍼하는 아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현장을 정리했다. 만든 이가 원하는 대로 그릇에 조각조각 모두 모아 담아서 건넸다. 분명히 화를 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들은 내게 위로받지 못했기에 깨뜨린 것 때문에 혼냈다고 느꼈다.


다음은 각자 떨어져서 서로의 일정을 보낼 때. 우리는 함께 놀며 지내기도 하지만, 중간중간 자신만의 시간을 가진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나는 책을 보고 아들은 혼자 놀이하는 식으로. 시간 개념이 생긴 아들은 그때마다 "몇 시야? 몇 분 뒤 같이 놀 수 있어?"라며 단골 멘트를 날린다. 시계를 보여주며 긴 바늘이 어디로 갈 때까지 각자 놀다가 만나자고 설명해준다.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정을 짓지만, 곧 다시 돌아와 같은 질문을 또 한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거의 3분마다 찾아왔다. 그럼에도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이 몇 시고 언제까지 약속했으니 아빠에게 시간을 달라고. 아들은 물어보고 같은 답을 반복해서 듣는 동안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내 차분한 말투가 오히려 차갑게 느껴져서 계속 물어보다가 혼났다고 여겼다.


마지막도 애매하다. 요리에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는 내가 드물게 1시간 이상 공을 들여서 음식을 만들었다. 얼핏 봐도 완벽했고, 이제 맛있게 먹기만 하면 완성이었다. 아들을 식탁으로 부르니 바로 오지 않고 뜸을 들였다. 솜씨를 뽐내고 싶은 마음에 아이를 부드럽게 재촉하며 다시 불렀다. 그제야 느릿느릿 다가오더니 메인 요리는 쳐다보지도 않고 음료수를 한 잔 달라고 했다. 음식과 잘 어울리고 좋아하는 걸 골라 기분 좋게 컵에 담았다. 꼬마 손님의 추가 요청대로 빨대도 꽂아 주었다. 자리에 앉아 한 입 넣기도 전에 일이 벌어졌다. 영롱한 음료를 통째로 식탁과 바닥에 쏟았다. 자주 하던 빨대 장난을 이번에도 치다가 컵을 놓쳐버린 것이다. 꾹꾹 막아두고 있던 모든 게 한 번에 빠져나왔다. 요리의 수고로움, 기다리느라 쌓인 배고픔, 끝없는 요구사항, 지난 끼니도 뭉그적대다 식어빠진 기억. 극단적인 나로 돌아가 밥 먹을 때 물 말고는 어떤 마실 것도 금지라고 정했다. 샤우팅을 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정색했다는 증언. 아이에겐 식사 시간의 나쁜 경험이 또 하나 추가된 셈이다.


묵묵히 듣고 보니 그럴 만했다. 아들과의 관계도 남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인지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자의 것은 차이가 있었다. 화를 내지 않고 혼을 내지 않았지만 분명 평소와 달랐다. 표정엔 웃음이 사라졌고, 들어주는 처지가 쏟아붓는 처지로 바뀌었다. 커다란 변화는 아이에게 혼나는 것과 같았다. 내가 취한 대화의 태도가 상대방의 기분을 결정했다. 미칠 듯이 날뛰진 않았지만, 가시 돋친 말을 전한 것은 틀림없다. 말을 예쁘게 하자는 말을 아내에게 자주 듣는다. 표현은 정확히 해야 한다는 핑계 같은 고집이 있어서 내겐 어려운 기준이다. 그럴 땐 아이의 맑은 눈을 바라보며 깨우친다. 친구도 아니고 아래 두는 사람도 아닌 소중한 어린 영혼. 보살피고 사랑을 주어야 할 대상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가시가 아닌 사랑을 담은 표현으로.


다음 날 아침에도 우리는 바쁘다. 밥하고 먹고, 몸 씻기고 씻고, 옷 입히고 입고. 그 와중에 아들은 궁금하다. "얼마나 놀 수 있어?" 학교 갈 준비를 마치면 놀 수 있다고 설명해도 소용없다. '참을 인'과 '사랑 애'를 번갈아 가며 마음에 새기다가 말이 헛나왔다. "옷 입으면서 놀아." 잠깐 주춤하던 아들이 되물었다. "도대체 옷을 입으며 놀라는 게 무슨 말이야?" 한 번에 한 가지밖에 할 수 없는 녀석의 당연한 질문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쁜 상황의 한숨과 분노가 수그러들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한 나는 서둘러 말을 바꿨다. "옷 먼저 다 입고, 5분만 놀고 학교 가자!" 평소보다 빨리 움직인 아들은 기분 좋게 놀고 지각도 하지 않았다. 


좀처럼 커지지 않는 마음의 넓이를 위해 자주 외치는 말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말도 사랑스럽게.' 계속하다 보면 나아진다는 믿음으로. 어제보단 나았으니 괜찮겠지.



홍석준 작가의 [전업 아빠 육아 생존기]

"옛날에는 아빠도 육아를 함께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대."라며 마치 여성도 투표할 수 있게 해 달라 주장하던 옛사람처럼 잊히길 바란다. 내 바람이 지금 읽고 있는 당신으로부터 시작되길 바라며 글을 보낸다.

아빠도 함께하는 육아를 만드는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 저자 홍석준
*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원고료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전액 기부합니다.)



[전업 아빠 육아 생존기] 10화



<연재 배경>

네이버 연애 결혼 <썸랩>으로부터 원고를 요청받았다. <썸랩>은 네이버와 문화일보의 합작 회사로 네이버의  '연애 결혼' 주제판을 운영했었고, 현재는 연애 결혼과 관련된 컨텐츠를 네이버 내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 에디터님께서 우연히 내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를 읽고 내용이 정말 좋아 연재를 부탁한다고 했다. 보내주신 칭찬을 괜히 덧붙이자면 '쉽게 읽히면서도 중심이 잡힌 글'이 참 좋다고 했다. 세상에 필요한 육아하는 아빠 이야기를 들려주며 꼭 같이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제안에 감동했다. 이 글은 그렇게 탄생했다. 






세상에 필요한 변화를 만드는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교보문고 https://bit.ly/3u91eg1 (해외 배송 가능)

예스24 https://bit.ly/3kBYZyT (해외 배송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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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






이 책의 탄생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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