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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AULE Sep 20. 2020

타인을 이해하기 2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지만


오늘은 찌질한 이야기이다. 아빠에게 남은 날이 얼마 없을 때 이 글을 남겼었다. 타인을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파혼후에도 나는 타인을 이해하는 게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되묻게 됐다.



내가 결혼할 뻔한 날. 공교롭게도 내 친구의 결혼식 디비디가 단체 카톡방에 도착했다. 내가 부케를 받은 결혼식이었다. 멀리 유학중이라 못 오는 친구와 신부 대기실에서 영상통화를 했었는데, 그 장면이 잘 잡힌 덕분에 반가운 마음에 보내준 것이다. 원래같았음 호들갑을 세차게 떨고도 남았겠지만 나는 차마 그 영상을 보지도 못했고 대화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씁쓸할 따름이었다. 절친이 오랫동안 고이 준비해온 결혼식에 있다는 사실에, 그의 부케를 받을 생각에 설레어 들떠있는 내 모습을 난 볼 수가 없었다. 바보같고, 불쌍하기도 했다. 미래를 몰랐던 그 때의 나는 죄가 없지만서도 한없이 멍청해보였다. 마음이 아팠다. ‘나도 이렇게 추억으로 남기려고 했었는데. 오늘 이 영상을 나도 만들었어야 했는데.’ 결혼식 영상을 보내준 친구가 참 야속했다. 그 날이 내 결혼 예정일인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싱숭생숭해 할 나를 달래러 오려다가 사정이 생겨 못왔었다. 대화창에 있던 다른 친구들도 덩달아 미웠다. 누구 하나 내 마음 좀 생각해서 더는 언급하지 말자고 옆구리를 찔러줄 순 없었을까? 평소엔 정말이지 배려가 넘치는 사람들인데, 왜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들을 조금 원망하면서도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내가 파혼을 앞두고 힘들어 할 때, 모든 게 끝나고 나서도 흔들릴 때 나를 잡아주었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그래서 더 이해가 안됐다. 왜 이런 아픔을 주는건지. 그래도 그간의 고마움을 생각하며 그냥 넘기려 했다. 내가 예민한 탓일지도 몰라.


그러나 얼마 전에는 그 친구의 본식 사진이 도착했다. 카톡방은 그 날의 우리 사진으로 꽉 채워졌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렇지만 그 친구의 바뀐 프로필 사진에도 내가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쁠 때 잘 나온 수많은 사진 중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을 해놨다는 건 그만큼 우리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혹자는 신부를 빛나보이게 하기 때문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했지만). 그렇지만 나는 내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끼고 좋다고 웃고 있는 나를 또 마주할 수, 용납할 수도 없었다.


비참하고, 괴로웠다. 다 무의미한 게 되어버려서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아니었다. 한 마디로, 미래를 모르고 들떠있는 내 모습이 한심하고, 꼴보기 싫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 꼴을 볼 내 심정이 어떨지 전혀 고려하지도, 아니 생각조차 않은 친구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는 내 많은 눈물을 함께해준 사람이었다. 내가 울 때 같이 울어주고 흔쾌히 시간을 내어준 친구였다. 그래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거야? 왜 내가 화도 낼 수 없게 만드는거지? 나는 화를 내면 안되는 건가?


시간을 갖고 감정을 추스리고 결정을 내렸다. 친구에 대한 미움이 깊어지기 전에 나는 이 마음을 말해야만 했다. 나는 친구를 좋아했고, 계속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사진들 정말 예쁘고 좋았던 날이지만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하고, 호들갑 떨지 못해 미안하다고. 상기된 내 모습을 보기 싫으니 프로필 사진은 내가 없는 걸로 해달라고. 전에 보내줬던 결혼식 디비디도 내 예정일날 보내주는 바람에 맘 아파서 못 봤다고. 부케를 내가 받았는데 이렇게 되어 미안하다고.


친구는 곧이어 자신이 생각이 짧았다며 내 요청대로 바꾸어주었다. 멘탈 회복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짧게 나누고 대화는 고맙다는 이야기로 끝났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연락을 했다. 내 마음 혼자 추스린다고, 거리두기 2.5단계여서 오랫동안 약속 잡을 생각도 안했었지만 한 번 만나고 싶었다. 7월 말에 보고 한 달 넘게 만나질 못했다. 가끔 너무나 외로웠지만 그러려니 했다. 시국이 시국이었고, 신혼 부부의 주말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야속한 마음도 있었다. 언제든 연락하라 했으면서, 한 번 쯤 먼저 좀 챙겨주면 안돼? 그렇지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날씨가 너무 좋은데 보고싶다고. 그렇게 오랜만에 만남을 요청한건데 아직 연락이 없다. 원래도 카톡을 읽을 때만 읽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곧 연락한 지 8시간이 넘어간다. 아쉬움이 차오른다. 남자친구 아니 남편 카톡은, 중고나라 거래 문자는 재깍재깍 보면서, 나 만나면서 야구도 보면서 왜 이 연락엔 답을 안하는거야? 스물스물 피어나던 아쉬움이 밥을 한창 짓는 압력밥솥의 증기처럼 힘차게 치솟는다. 이어서 나오는 지질한 속마음.


‘나는 네 남자친구가 장기 해외출장 갔을때 주말을 그렇게 챙겨줬는데. 평일에도 만났는데. 네가 외로울까봐, 많은 공백에 힘들까봐 먼저 연락하고 시간을 보냈는데. 그러니까, 너는 내 생각을 진짜로 하고 있는거야, 친구야?’


모든 관계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거저 얻는 관계는 없다. 아쉬움이 하나, 둘 쌓이고 기대가 점점 적어지면 끝나게 된다. 나는 이것이 내가 상실을 겪으면서 유난히 예민해졌기 때문인지 수시로 검열했다. 그러나 아빠가 가망이 적은 투병 중일때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투병기를 읽고 감동을 논했고, 아빠를 모실 추모공원을 보러다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뉴욕 여행 계획을 신나게 얘기했다. 내가 마지막 순간에서 파혼을 했는데도 내 결혼 예정일이었던 날 결혼식 디비디를 보고 웃고, 부케순이한다고 신난 나와 찍은 사진을 동의 없이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다(솔직히 내가 잘 나온 사진도 아니었다).


내가 호구였다는 생각은 안 한다. 자그마치 17년이다. 우리가 함께 해 온 시간. 위로받고, 응원하고 함께 나이드는 기쁨을 누려왔다. 그러나 아주 조금 다른 결핍이 생겼던 나는 조금만 더 많은 이해를 바랐다. 내게 상처를 줄 의도가 하나도 없었지만 내가 상처를 받는다면 그건 내 문제인 것일까? 10년을 친구로 지내고, 7년을 연인으로 함께 했으면서도 결혼식 한 달 전에 내 손을 놓는 사람도 있는데, 오랜 친구 관계라고 반드시 지속할 이유가 있을까. 나 역시 그들에게 이런 상처를 주었을까. 그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러니까, 누군가를 이해하는 건, 이해한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일인 것일까. 요즘의 나는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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