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현실
친한 고등학교 친구 모임이 있다. 소박하게 나까지 딱 네 명. 아빠가 암 진단을 받기 전의 불안감부터 항암치료를 중단했다는 오늘날의 나의 감정까지도 드러낼 수 있고, 그런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를 건네주는 친구들이다.
그러나 타인을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겪어보지 못한 감정을 헤아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는 종종 친구들에게 감정을 이해받지 못해 아쉬운 순간들을 마주한다. 그들 나름의 배려와, 최선을 다해 나를 위해주는 것일테지만 나는 그들의 부족한 이해심에 실망한다. 그러나 나도 괴로워하는 아빠의 고통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 진통제 먹었으니 이제 괜찮아질거야, 손을 잡고 부드럽게 달래는 말 따위 뿐이다. 나는 당신의 아픔을,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헤아림은 그저 거기까지일 뿐이다. 내 눈 앞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당신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나는 인터넷 창에다 폐암의 고통을 검색해본다. 암 환자를 주인공으로 한 글이나 영화, 드라마를 당신 몰래 찾아본다. 우리는 종종 눈 앞에 있고 피부로 느껴지는 현실을 통해 현실을 알려고 하기 보다는 완전한 타인의 정제된 말을 통해 현실을 가늠해 본다.
부끄럽게도 아직 얕게 알고 있는 수준이지만 내가 공부하고 있는 학문의 한 줄기인 이론 분야에서는 그런 논의를 나눈다. 우리가 현실을 바탕으로 세우는 이론은 현실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논의. 어떤 학자는 이론으로서 현실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누군가는 이론이라는 것이 오히려 실재를 구성한다고 피력한다. 얼핏 궤변으로 들릴 수 있지만 하나의 이름없는 사물을 생각하면 이는 간단명료하게 다가온다. 교수님이 사례로 든 것은 나뭇잎이다.
우리는 저 여러 명칭으로 나뭇잎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잎몸, 측맥, 주맥, 꿀샘, 잎자루, 턱잎, 톱니가 아닌 부분은 무엇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측맥과 측맥 사이의 넙적한 부분만을 지칭하려면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가? 나뭇잎 끝에서부터 왼쪽 5번째 잎몸? 거기엔 왜 이름이 붙지 않았을까? 아마 그 부분은 특이점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고, 따라서 굳이 별도의 이름을 붙여줘 가면서까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테다. 그런데 만약 위에서부터 왼쪽 5번째 잎몸에 특별한 기능이 발견된다면 그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생길 것이다. 그를 주목한 연구도 진행될 것이고, 아이들은 나뭇잎의 구조를 배울 때 왼쪽 5번째 잎몸의 이름을 외울 것이다. 나뭇잎을 줍고는 '엄마 이 전체는 잎몸이라고 하지만, 잎몸의 요 부분은 OO라고 해.'라고 자랑할테다. 즉, 이론이 어떤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잎몸은 과학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나뭇잎에 존재하던 부분, 이미 실재하던 것이었지만 이론을 통해 비로소 하나의 실재로서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과연 현실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 기반해 어떠한 이론가가 세운 이론은 정말로 실재에 다가갈 수 있을까? 이론은 실재보다 더 진리에 가까울 수 있어서 현실을 잘 분석해내는가? 그렇다면 이론의 기능은 무엇일까? 이론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일까, 실재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은 이론사회학은 물론 과학철학을 비롯한 관련 학계에서 계속되어 오고 있는, 다시 말하면 그 답을 찾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논의이다. 그렇게 부르디외, 하버마스 등 감히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대학자들의 심도깊은 논쟁이 있다는 것 정도만 인지하고 있는 내가 이론이 실재보다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고, 따라서 이론의 기능은 설득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갖게 된 것은 얼마 전 친구와의 대화 때문이다.
어느 주말 그 친한 친구 그룹 중 한 명과 우연히 시간이 맞아 갑작스레 만남을 갖게 됐다. 당시 친구는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터라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그를 달래기 위해 짬짬이 독서를 하곤 했다. 그 날도 서점에 다녀왔던 그녀가 들고 있던 책은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였다. 앞길 창창했던 젊은 의사가 갑작스레 암 선고를 받고 동시에 환자가 되어 써 내려간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 책을 마무리하지 못한 그를 대신해 그의 아내가 몇 페이지 가량 써내려간 에필로그 아닌 에필로그도 있었다. 나는 어느 주말 서점에서 선 채로 그 책을 읽었다. 폴 칼라니티의 글을 통해서는 아빠의 기분과 마음을 이해해보고 싶었고, 그의 부인의 글을 통해서는 일종의 공감을 통해 위로받고, 그의 이야기가 내 마음과 정신을 무장하는 데 도움을 줄 것 같았다. 또 광고 홍보 덕을 꽤나 보고 있는 그 책이 암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는 어떤 알림과 울림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발암이니 암유발이니 하는 끔찍한 단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는 이 사회가, 그걸 제지하지 않는 이 사회가 나는 원망스러웠으니까.
내게는 꽤나 익숙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나는 일기를 읽듯 술술 훑어 읽어 내려갔다. '맞아, 그랬지. 그랬겠다.' 고개를 끄덕였고, 아내의 담담한 글에 나의 나중을 그려보며 마음을 단단히 했다. 그렇지만 처음 기대하던 바였던 아빠에 대한 이해라는 목적은 달성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우선 아빠는 그 사람이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곁에서 지켜보는 아빠의 모습은 그의 글처럼 숭고하고 비장하기보다는 날선 고통 그 자체였기 때문에. 타인을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 아름다운 글을 읽고도 나는 내 옆의 아빠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그 책을 읽어볼까 한다고 들고 나타났을 때 내가 그랬듯 그녀가 나를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고 그 책을 골랐을 것이란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친구는 우리 모임의 채팅방에 출근길에 책을 읽다 너무 감동적이라 울어버렸다고 얘기했다. 문학적이고, 글을 참 잘 썼다며 한 번 읽어보라고 다른 친구에게 추천했다. 채팅 내용을 뒤늦게 따라 내려가면서 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감동적'이라는 말이 이렇게 의미없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의 나레이션이 부족했나, 라는 의심을 했다. 분명 배려심 넘치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믿고 지냈고, 책을 읽으면서 내 생각이 났다고 말했던 그녀지만 그 책보다 더한 현실에 살고있는 내 앞에서 그를 거진 문학처럼 소비하며 감상평을 남긴 친구의 발언은 나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근거리에 있는 나의 실재보다 누군가의 정제된 이야기, 이론이 그녀에게 더 와닿을 수도 있겠다 수긍했다. 그리고 이론이 설득에는 효과를 발휘할지언정 나라는 타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적절한 수단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감동적이라는 말이 이해는 된다. 스스로가 출간을 고려하고 시작했을 만큼 그의 서사는 분명 감동적이고 문체는 아름다우니까. 다만 내가 허무한 것은 그녀의 근거리에서 내가 이렇게 그 현실을 헤쳐나가고 있고,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을 울리는 건 얼굴도 모르는 어느 먼 타인의 이야기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야속한 것은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났다고 말했지만, 내 생각을 했다면서도 어떻게 감히 감동적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하는 마음에서 온다. 암 환자의 가족으로, 그것도 아버지의 투병을 일상으로 살아나가고 있는 나의 마음을 헤아렸다면 내 앞에서 암 투병기를 감히 감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무엇이든 돌아보면 어느 정도 조금이라도 미화되는 것처럼 칼라니티의 정제된 글은 비장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름답지만은 못한 현실이었을 것이고, 나에게도 그런 현실이다. 현재진행중인 아빠의 날것의 투병은 숭고하고 담대하기보다는 참 많이 아프고, 괴롭다. 우리의 현실은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전투적이고, 처절하다.
이번 달까지 아빠가 곁에 있을 수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저런 푸념이 무엇이 중요한가 싶다. 나조차도 아빠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는 와중에 속만 좁았다. 지금은 이론과 현실이니, 타인을 이해하니 같은 글을 이어나갈 자신이 없다. 우선은 여기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