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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AULE Jun 07. 2022

편지

그대 부디 잘 지내길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있어.


내가 웃는 게 좋았대. 내가 눈이 안보이게 깔깔 웃으며 테니스를 치는 모습이 좋았대. 그러면서 나는 기억도 못하는 오래전 내가 타인에게 베풀었던 아주 작은 선행을 보고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었고, 그런 사람이 타인의 호의는 칼같이 거절하길래 내가 궁금했대. 그런 것에 비해 말도 거의 섞지 않은 채 두 계절을 신중히 보내고 나서야 내게 다가왔지만 말야.


나는 사실 가벼웠어. 나쁜 사람은 아닌듯 하고 말이 잘 통하고 취미도 같은데 한번 만나볼까, 하는 생각이었어. 그 사람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모르고 단 둘이 밥 한 번 먹은 적 없었으니까. 물론 관계를 시작하면서 다시 신중하긴 했어. 자정에 만나 새벽 네 시까지 차 앞 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서로 일종의 면접을 봤거든. 반 년간 가끔 테니스를 친 것 외에는 서로를 거의 잘 모르는데 이렇게 만나도 될까, 하면서 말야. 가장 최근에 한 연애가 언젠지, 긴 연애를 한 사람은 어떤지 묻더라. 그래서 난 말했어. 나도 한 사람을 오래 만났기에 상관없다고. 그리고 나는 파혼을 했는데 당신이야말로 괜찮냐고. 그랬더니 그때 왜 결혼이 하고 싶었고, 지금은 왜 아닌 지 묻더라. 약간의 충격을 받을 줄 알았는데 안 그렇더라고(최근에 알게 된 건데, 다른 사람이 이미 내 파혼 사실을 언급해서 알고 있었대.) 아무튼 이제 나이가 나이인지라 결혼이 급한 지 확인하고 시작해야 하더라고. 우리는 합의 하에 천천히 관계를 시작하기로 했어. 이야기를 마무리한 고요한 새벽 네 시, 아는 동호회 사람에서 연인이 되길 약속한 후. 잘 들어가라고 차에서 내려 어색하게 인사를 하려고 머뭇거리는 나를 안아주더라. 정말이지 포옥 감싸 안아줬어. 손도 잡기 전에 포옹이라니, 놀라는 건 찰나였고 나는 녹아버렸어. 그 품도, 닿은 뺨도 따뜻했어. 나 안아주는 거 정말 좋아하거든. 안아달라고 먼저 팔 벌리기 전에는 먼저 안아주지 않았던 너였는데. 그래서일까. 그 포옹 한 번에 나는 마음을 열어버렸어.


이제 다섯 달 같이 보냈어. 그런데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그 힘겨운 시간들을 보냈구나 싶을 정도로 고마워. 나를 정말 많이 아껴줘. 너는 항상 내게 나에게 의지가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 사람은 내가 정말 의지해도 될 것 같더라. 내가 너를 서툴게 챙겼던 것보다 훨씬 나를 따뜻하고 안정적으로 챙겨줘. 내가 잠은 잘 자는지, 밥은 잘 먹었는지,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 꼬박꼬박 챙겨줘. 너랑 달리 나보다 술도 잘 마셔서 걱정도 없어. 나를 전화로도 어르고 달래서 제대로 잘 준비를 하고 자게 만들어. 나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 진짜 싫어하는데 말을 듣게 되더라. 그래서 어느 날은 문득 그가 그렇게 나를 챙겨준다는 게 정말 고마워서 울기도 했어. 그런 든든함을 평생 모르고 살 뻔했던 내가 바보같아서 울었던 것도 있을거야.


때론 소통이 되지 않아 서운한 부분이 생겨도 그에 대해 얘기하는 나 역시 너를 만날 때보다 성숙했고, 그런 나를 대하는 그 사람도 좀 더 어른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왜 도대체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냐고 울 일이 없더라. 내가 제일 싫어했던 '다 너의 오해야'라는 식의 해명도 없어. 그저 몰라서 미안하다고 이제는 다 알겠대. 정말 알까 싶어서 유치하게 꼬치꼬치 물으면 진짜 다 알고 있더라. 그럼 나는 어리석게 혼자 키웠던 날선 마음을 내려놓아. '남자는 다 똑같고 인생은 어차피 혼자야!' 경계심을 잔뜩 세운 길고양이 같던 나를 마치 날 때부터 집에서 키운 강아지마냥 머리를 헝클이고 눈을 마주치고 등을 쓰다듬어줘. 우습지만 그 눈길과 손길에 나는 쉽게 똥강아지가 되어버리더라.


너랑 달리 나 만나는 동안은 휴대전화를 쳐다보지도 않아서 친구들이 나한테 압수당했냐고 놀릴 정도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자기 주변 사람에게 내 얘기도 많이 해. 말이 나오는 게 귀찮다고 나란 존재를 주변에 알리지 않았던 너와 제일 다른 점이야. 친구들은 물론이고 직장 동료들에게도 내 얘기를 하고, 테니스를 치다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여자친구 있고, 여자친구도 테니스 쳐요(사람들이 부럽다고 반응하면 사실 전 남자친구 때문에 시작했다는 농담도 할 줄 아는 사람이야)'라고 말하고 다녀. 나를 숨기지 않고 모두에게 자랑해. 재밌는 건 나 이전에 연애를 오래, 몇 번 했었는데도 부모님께 보여드린 사람은 내가 처음이래. 장난스레 내 장점을 단점처럼 말하며 소개하는데 아버님께서 웃으시더라. 네게서 받은 가장 큰 상처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그렇게 해주는게 눈물이 날 것처럼 좋았어.


자잘하게는(결코 자잘하진 않지만) 음악 듣는 걸 정말 좋아해서 내게 좋은 노래들을 알려줘. 영화나 기타 예술은 취향이 많이 갈리는데, 추천한 노래가 싫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취향은 아주 얄팍한 척도라고 하지만 맞으면 또 그렇게 좋은 게 없잖아. 넌 취향이 없었어서 난 네가 달걀 껍질이 들어간 후라이가 정말 싫다는 말 한 마디에도 큰 발견을 한 것 처럼 기뻤는데 말야. 내가 취미로 악기를 하는 것도 정말 좋고 멋지대. 친구들과 오래 준비해온 연주회도 못 오는데 연습실에라도 얼굴 좀 비춰달라도 부탁해서 온 너는 연주를 듣고 어색하게 웃음을 쥐어짰는데 이 사람은 먼저 연습실에 오겠다고 신나서 얘기하더라. 그의 예전 연인이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었단걸 알고 있어서 일개 아마추어인 내 연주를 보여주는 게 약간 부끄러웠는데 그는 내 연주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평가하지도 않아. 그저 일도 아닌데 이렇게 꾸준히 해오는 자체가 정말 대단하다며 자기도 잠시 놓았던 다시 악기를 다시 해보고 싶대. 너는 절대로 못하겠다고 했는데 말야. 신기하게도 참 다르지.


멋진 사람이야. 너만큼 잘난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인기 있는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지만 자격지심이 없어. 넌 둘다 가졌음에도 만족하지 못했는데 말야. 커리어에 대한 고민은 하지만 묵묵히 주어진 일도 잘 해. 그리고 일상에 충실해. 그게 참 멋져. 매일 같은 일상을 충실하게 영위하는 건 정말 힘들잖아. 인생 지겹다고 우는 소리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잘 보내. 주식과 비트코인 외에는 달라지려고 하지 않으면서 불평불만만 말하던 너와 달라. 밥도 잘 해먹고 청소도, 설거지도 해. 내가 더 게으르다니까. 나도 본받으려고 가끔 장봐서 집에서 적당히 해먹고 살게 됐으니 말야. 테니스를 못 가게 되는 날이어도 몸이 찌뿌둥하면 어떻게든 다른 운동을 하고 오더라. 밖으로 나가서 몇 바퀴 뛰고 오기도 하고, 헬스장에 다녀오기도 하고 말야. 할 수 있는 일은 꼭 하는 사람이야. 공부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쪼개고 쥐어짜서 생활이 마구잡이였던 내가 일상을 잘 지킬 수 있게 가이드해줘. 그래서... 이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 할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까지 들어. 결혼이 너무 두려웠는데 이 사람이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아져.


어떻게 이런 커다란 행운이 찾아온걸까 싶을 정도로 삶을 반짝이게 해주는 남자친구와 마음이   주말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어. 정말 아무 이유없이 문득 김광진의 '편지' 듣고싶어졌어. 오랜만에 들어도 좋다, 하며 운전을 하던 나는 불현듯 떠올렸어. 지금이라도 나를 놓아줘야할  같다고 네가 가져왔던 편지가 말야.  노래 멜로디도 좋고 가사도 멋져서 좋아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실 가사에 몰입한 적은 없었거든. 가사 내용은  상황과 딴판이니까. 근데 새롭게 깊이 행복한 지금에서야 편지를 쓰던  심경을 상상하게 됐어. 그땐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이러는  도저히 이해할  없다며 구겨 던져버리며  마음만 생각했는데 너와 헤어진  2년이 되어 가는 이제야...  덕분에   성숙한 사랑을   알게  이제서야  마음을 헤아려볼  있게 됐나봐.


네가 그랬지. 우리가   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우리 자그마치 7년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수가 있냐고   깊이 상처입었었는데.    알았는데 우리는 정말 너무 어렸나봐. 물론 그때도, 지금도 내겐 너무나 비겁했던 너이지만 네가   얼마나 힘들게  편지를 써서 가져왔을지 나는  노래를 다시 듣는 지금에서야 알겠더라.  편지도, 그걸 인정 못했던  모습도, 구겨진 편지를 다시 줍던 너의 모습도... 너는 그런  줄짜리 급하게  편지로 나를 놓아선 안됐어. 그렇지만 너도 많이 아팠을텐데. 너에게도 7년이었잖아. 정말 힘들었을텐데.  마음을  때는 도저히 헤아릴  없었어. 이제야 미안하다는 말을 남겨. 미안해. 나는 노래를 듣는 내내 뒤늦게  울었어.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하고 싶은 말 하려 했던말 이대로 다 남겨 두고서

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려하오.

그대 부디 잘 지내시오


기나긴 그대 침묵을 이별로 받아 두겠소.

행여 이맘 다칠까 근심은 접어두오.

사랑한 사람이여 더 이상 못 보아도

사실 그대있음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왔음에 감사하오.

좋은 사람 만나오. 사는 동안 날 잊고 사시오.

진정 행복하길 바라겠소.

이 맘만 가져 가오.




얼마 전에 생각치도 못하게 친구 인스타그램에서 네 옆 얼굴을 보았어. 걔는 센스도 없지, 내가 못 볼거라고 생각했나. 근데 한참을 보게 되더라. 일부러 올린 건가 싶기도 했어. 우린 가끔 네 얘길 했거든. 딸을 낳았다는 소식도 들었고 말야. 테니스장에 빼꼼히 보이는 너의 옆 얼굴을 보는데 기뻤어. 애기 보느라 테니스 모임에도 잘 못나간다고 들었는데 이 행사는 어떻게 또 참여는 했네, 좋았겠네, 싶더라. 나 이제야 진심으로 너의 행복을 빌 수 있을 것 같아. 나 잘 지낼게. 너도 부디 잘 지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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