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없는 플랫화이트를 위하여
아침에 눈을 뜨고도 침대에서 나오지 못한다. 커피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마실 수는 없다. 집안에 커피 기계만 세 종류가 있지만 지금 마시면 나중에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머리에 안개가 낀 듯한 상태로 집을 나서고, 지하철역까지 40분 남짓 터덜터덜 걷고, 긴 계단을 내려가다 오른쪽 무릎에 시큰함을 느끼고, 지하철 좌석에 앉아 사람들의 우울한 얼굴을 살피고, 인천시청역에서 내려 3번 출구 계단 층계참 다섯 곳을 오른다. 과음한 다음 날에는 계단 막바지에서 욕지기가 올라오기도 한다.
그래도 이제 다 왔다. 카페 “러셀”의 문을 열고 들어가 가장 가까운 창가 자리에 쓰러지듯 몸을 맡긴다. 매일 마시는 플랫화이트는 이미 완성되어 있거나 준비 중이다. 지하철에서 내리면서 "안녕하세요. 플랫화이트 한잔 마시고 갈게요. 감사합니다."라고 메시지를 보내놓았다.(처음에는 드립 커피를 미리 부탁하기 위해서였는데 나중에는 습관이 되었다.) 지난번에 미리 결재해 놓은 돈이 남아있어서 따로 계산할 필요도 없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일어난 지 두 시간, 집을 나선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황갈색 컵에 담긴 커피가 받침대와 함께 나온다. 머그컵이 아니라 밑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고전적인 컵이다. 마시기 전 거품층을 본다. 가끔은 얇아 보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 한결같다. 입에 대고 싶은 충동을 잠시 누르고 사진을 하나 찍는다. 그 뒤에 아주 작은 첫 모금을 맛본다. 새롭지는 않지만 여전히 놀랍다. 한 모금 마시는 것만으로 지금 기분, 오늘의 전망, 약간 과장하자면 인생에 대한 태도가 바뀔 수 있다니. 아침 여덟시 사십분, 이제서야 몸과 마음이 궤도에 오른다. 오늘 하루도 그럭저럭 살아질 것이다. 언젠가 최악의 하루가 닥쳐오겠지만 러셀에서 플랫화이트를 마신 오늘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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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출근길에 들를 만한 카페를 검색해 보다가 이곳을 발견했다. 직장에서 약간 멀긴 하지만 카페 이름 "러셀"때문에 관심이 갔다. 처음 방문했을 때 인상은, 소박하고 작은 카페에, 젊은 남자 사장이고, 무척 친절하다는 것. 러셀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나중에야 물어보았다. 나에게 흥미 있는 “러셀”은 버트란트 러셀, 허튼소리를 용납하지 않는 분석철학의 원년 멤버이자 나중에는 자기를 무시한 비트겐슈타인의 스승(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박사 논문 심사 위원인 러셀에게 '당신이 내 논문을 이해하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세번째 결혼을 64세때 26세 여성과, 네번째 결혼을 80세 때 52세 여성과 했고(요즘은 알파치노나 가능한 일이다), 감옥에 갇혀서는 제임스 조이스 소설을 읽다 껄껄 웃었다는(도대체 왜) 그 러셀밖에 없지만, 그는 이제 어디에서나 인기가 없는 인물이다.(아마도 자기 전공인 철학과에서조차) 게다가 그가 커피를 즐겼을 것 같지도 않다. 툭하면 과자에다 홍차를 마셔대는 영국인 아닌가.
그런데 카페 이름을 바로 그 버트란트 러셀에서 따왔다고 한다. 러셀 주인 말로는, 자신이 신해철을 정말 좋아하는데 그의 밴드 이름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읽어보다가 그의 스승 러셀까지 찾아 읽어보게 되었고, 글과 인생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카페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역설이 흥미로웠다. 신해철은 서강대 철학과에 입학하였지만 출석일수를 채우지 못하다가 중퇴하였고,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을 가르치면서 그가 장차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정작 비트겐슈타인은 그 문제가 잘못 제기된 것, “철학자의 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난했다. 러셀은 1차대전 때 반전운동을 하다 투옥되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전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포병장교였다. 그런데 카페 이름은 신해철과 무관하고 비트겐슈타인과 대척점에 선 러셀이라니.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의 글에서 더 큰 영향을 받았는지에 앞서, "비트겐슈타인"은 매니악한 앰프 제조회사에나 어울릴 것 같고, 카페 이름은 "러셀"이 제격이다. 이 얘기를 들으면 두 언어철학자 모두 무덤에서 돌아눕겠지만.
아무튼 그 러셀이라니 좀 놀라웠다. 그리고 자신에게 영향을 준 책의 저자 이름을 따서 만든 카페라면, 단지 카페인을 내 몸에 공급해 주는 것을 대가로 돈을 지급받는 가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러 날의 탐구를 통해, 카페 러셀은 단지 커피와 테이블과 의자 등 단지 사물들의 총합이 아니라, 러셀 주인이 만들어 제공한 커피를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마시는 사실들의 총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러셀에서 현실적으로 발생한 케이스는 아래와 같다.
러셀은 친절하다. 도서관에 아침 일찍 자리 맡으러 왔지만 자기 수학 점수의 한계를 아는 재수생이든, 사무관 승진을 두어해 전부터 접어둔 장년 이후의 공무원에게든(물론 이들의 배경은 내 상상의 결과다) 똑같은 정도로, 적어도 내가 지켜본 지난 몇 년 동안 한결같이 친절했다. 얼굴에서는 항상 옅은 웃음기가 있고, 손님이 들어올 때 인사, 나갈 때 인사, 커피를 내어줄 때 인사도 잊지 않는다. 커피를 만드는 중이거나 주문을 받거나 다른 일로 바쁠 때도 가급적 꼭 인사를 한다. (물론 스타벅스에서도 인사를 받는데, 그곳에서는 누가 하는지도 모르는 인사말이 공중에 떠다니다가 내 귀에 부딪칠 뿐이다.) 그가 웃음기를 순간적으로 잃는 때는, 사람이 많이 몰린 점심시간에 내가 드립커피 지금 되냐고 물어보는 때 정도다.
러셀에서는 자리에 앉아있으면 커피를 가져다주고, 다 마신 뒤에도 치워준다. 요즘은 음식 파는 곳을 제외하면 호텔 카페는 되어야 이런 서비스를 제공해 준다. 음악도 좋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만 딱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요일마다 장르를 정해두고, 작은 미니컴포넌트에 시디를 돌려 틀어준다. 시디 케이스는 카운터 앞에 세워놓는다. 손님과 얘기하다가 목소리가 묻히는 것 같으면 볼륨을 살짝 조절한다. 나는 트레이시 채프먼과 팻 메쓰니를 틀어 놓은 날에 평소보다 오래 앉아 있었다. 책도 한 두 권 전시해 놓는데, 들춰보면 조심스럽게 쳐놓은 밑줄과 추상적인 단어의 뜻풀이를 옮겨놓은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내가 진득하게 읽은 것은 이십세기 소년 만화책 네 권뿐이지만. 어느 날은 키에르케고어 책과 엘리엇 스미스 시디를 나란히 전시해 두었는데, 바라만 보아도 커피가 몹시 부족한 기분이었다.
러셀에서는 나를 기억해준다. 어느 날 플랫화이트를 마시면서 약간 단맛을 더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유를 부은 뒤 설탕을 넣어 젓느라 거품을 망치고 싶지 않았고, 우유 넣기 전에 시럽을 타달라고 했다. 처음엔 달았다. 다음 날 시럽을 줄여 달라고 해서 마셔보니 좀 아쉬웠다. 다음 날 약간 늘려달라고 해서 마셔보니 살짝 달았고 다음 날은 더 약간 줄여달라고 했다. 이렇게 몇 번 시행착오 끝에 달콤함으로 시작해서 쓴맛이 사라지지 않게 끝나는 수준을 찾아냈고, 그다음부터는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딱 맞춰 주었다. 뿐만 아니라 빨대를 안 쓰는 것도, 슬리브를 안 끼우는 것도 기억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함께 방문할 때도 내 잔을 바로 알아볼 수 있다. 가끔 메뉴를 고민하는 단골에게, '어제 마신 그것 어떠셨어요'라고 묻는 것을 보면 나만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이쯤 되면 커피 맛이 덜해도 단골이 될법한데, 맛도 무척 뛰어나다.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시키면 다른 곳보다 오래 걸리는데, 막상 거품에 입술을 대보면 그 밀도와 부드러움에 절로 감탄이 나오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클레버 드리퍼로 내리는 드립커피의 향도 드립 전문점 못지않게 훌륭하다. 다만 나는 언제나 플랫화이트를 마셨고, 이제는 좋은 커피라고 하면 예의 그 갈색 잔에 담겨 있는 그 플랫화이트 외에 다른 것은 잘 떠오르지도 않는다. 얇은 우유거품과 함께 밀려들어오는 절제된 단맛과 고독한 쓴맛. 이곳에서 플랫화이트를 마시기 시작한 이후로 다른 카페에서도 이 메뉴가 있으면 시켜보지만 항상 실망한다.
러셀은 커피를 마시는 곳이지만, 커피만 마시는 곳은 아니고, 커피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곳이지만, 커피 그 이상의 것 때문에 오는 곳, 나에게는 하루를 시작하는 곳이자, 매일을 버텨나가게 하는 카페인과 용기를 주는 곳이다. 그리고 이제 문을 닫았으니 그 결핍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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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며칠이 지난 아직까지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부지런하고, 이렇게 친절하고, 이렇게 맛있는데, 한 젊은이가 열과 성을 다해 온몸으로 부딪쳐서 구축해 나간 세계인데 이곳을 닫아야 한다니. 이곳보다 비싸고 불친절하고 맛없는 커피를 파는 곳도 그대로 남아있는데. 이는 이 세계가 근본적으로 공평하지 못하고 근원적으로 심각한 오류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사례이자 징후 같았다. 나는 실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했다. 그리고 러셀 주인장도 그렇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세이집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말하고 싶은 것들"에서 이렇게 썼다. "... 누군가로부터 까닭 없이(라고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비난을 받았을 때, 또는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하고 있던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때, 나는 언제나 여느 때보다 조금 더 긴 거리를 달리기로 작정하고 있다. 여느 때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만큼 자신을 육체적으로 소모시킨다. 그리고 나 자신이 능력에 한계가 있는 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한다. 가장 밑바닥 부분에서 몸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긴 거리를 달린 만큼, 결과적으로는 나 자신의 육체를 아주 근소하게나마 강화한 결과를 낳는다. 화가 나면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분풀이를 하면 된다. 분한 일을 당하면 그만큼 자기 자신을 단련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는 건방지게도 이 책을 그에게 선물하며 그가 좌절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사실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지난 4년 동안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고 했고, 배운 것이 많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고 했다. 이미 저 책도 가지고 있었다.
러셀 주인은 문을 잠가놓고 손님을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들에게 이제 문을 닫게 되어 미안하다고 웃으면서 작별인사를 고했다. 나에게는 이것이 견고한 자아, 진정으로 노력했던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의연함, 의지를 가지고 행복하기를 선택한 사람의 특징으로 보였다. 손님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네, 하고 바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하는 사람, 다시 문 열면 꼭 연락줘하며 너스레를 떠는 아줌마, 말하고 싶은 것이 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아 아 하며 고개를 꾸벅하고 돌아서는 사람. 나는 운 좋게 그 상황에서도 드립커피를 얻어마시면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하며, 이곳을 무척 아쉬워하게 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2023. 6. 12. 러셀에서 마지막으로 플랫화이트를 마셨다.
지금은 러셀에서 얻어 온 플랫화이트 잔에 편의점에서 사온 커피를 옮겨서 마시고 있다. 언젠가 다시 한번 러셀의 플랫화이트를 마실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