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안다는 것

by space 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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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운행 안내판이 붙기 전이다.


그냥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간다.

뛴다는 것과 빨리 탈 수 있다는 것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정해지지 않은 거리를 빨리 뛴다고 비를 덜 맞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정해지지 않은 시점을 위해서 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타려는 버스가, 내가 정류장에 도착하기 직전에 떠나는 그런 불운만 없기를 바랄 뿐이다.

정류장에 다 달아 버스번호가 보이기 시작하면 걸음과 눈이 조금 빨라지긴 한다.

서 있는 버스들의 번호 확인이 끝나면 기다리기 시작하고 익숙한 번호가 나타나면 잽싸게 올라탄다.

정류장에 오기 전이나 도착해서나 버스가 언제 올 지는 알 수 없다.

정해지지 않은 시간만큼을 기다리고 마침내 탄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보이면 올라타는 단순 반응 정도의 일이지 기다리는 시간 동안의 주제까지 가지는 않는다.

운행사고 수준의 연착이 아니라면 감정도 그다지 요동칠 정도는 아니다.

기다림과 승차로 이루어진 간결한 구조다.


디지털 운행 안내판이 붙은 후이다.


버스 정류장으로 뛰듯이 간다.

정류장에 가면 로또번호 확인하듯이 오늘의 버스 운세를 바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내판을 바라보는 순간 희비가 엇갈리기 시작한다.

5500번 버스의 남은 시간 35분은 거의 패닉 수준이다.

5007번의 26분은 조금 낫기는 하지만 운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5005번과 5500-1번의 7~9분은 아쉽기는 해도 한자릿수 이기에 참을 만은 하다.

곧 도착이란 네모칸 안에 있는 9003번을 비롯한 버스들의 손님들은 흐뭇하다.


남은 시간에 따라 사람들이 나눠진다.

많이 남은 사람은 이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이나 게임을 하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조금 남은 사람은 운행판의 혹시 모를 실수에 대한 염려인 지 연신 도착하는 버스번호를 확인한다.

곧 도착이 예고된 사람은 교통카드를 만지작거리며 공중볼의 낙하지점을 예상하듯이 자리싸움에 들어간다.

안내판에 시시각각 바뀌는 도착시간의 카운트다운은 정류장에 서 있는 우리의 시간을 내내 지배하고 버스 타는 일은 주제가 되어 버린다.

정류장 안내판은 기다림을 관리하고 사람들의 소중한 시간들을 보살펴 아껴주려 했지만,

도착시간을 미리 알고 기다려도 그 기다림은 줄지 않고 보살펴진 시간은 버스도착시간을 공부하는데 쓰였다.

미리 안다는 것 그리고 그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얻었나.

앞서 알았기에 무엇을 준비하고 또 움직일 수 있었나.

알기 위해 애쓴 것에 비하면 그 효용은 초라하다.

미리 알게 되었기에 그것에 더 오래 지배당했을 뿐이다.

더 일찍 화내고 기뻐하고 슬퍼했을 따름이다.


신문과 텔레비전도 일어난 일보다는 일어날 일을 맞추기 위해 애를 쓴다.

전해 들은 것에 보태어 글짓기를 해서 지면과 방송시간을 채우기에 바쁘다.

날씨에 대해 미리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기에 그렇다.

하지만 대부분은 해야 할 일과 관련 없이 조바심과 궁금증 그리고 앞날에 대한 관음증에서 시작한다.

미리 알기 위한 노력의 대부분은 축구 중계방송과 닮아 있다. "오른쪽으로 볼을 찰 것 같습니다. 아니 왼쪽으로 찰 것 같습니다. 프리킥을 직접 슛을 아니. 옆에 있는 누구에게 줄 것 같네요."

선거는 누가 되어야 할 지보다 누가 될지가 궁금했기에, 여론조사는 춤을 추고 앵커는 비장한 얼굴로 몇 시간 앞서 당선자를 발표한다. 투표 마감을 한 시점에서 당선 예측을 미리 알고 최종 결과를 기다리는 것과 모르고 기다리는 것과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고, 몇 시간의 '앞섬'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보람을 주었을까, 미리 알기 위한 그 비용이 필요한 것이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한다.


시골에서는 읍내나 면소재지가 아니면 신문이 배달되지 않기에 식당 같은 곳을 가면 날짜 지난 신문을 반갑게 읽곤 한다. 신문에 찍힌 그 날자에 우리의 심장박동수를 높여주던 기사들을, 그 결과를 알고 있는 지금 다시 읽어 보면 철 지난 바닷가처럼 허전하다.


앞날에 대해 장황했던 글들은, 그 앞날이 되어버린 지금에서 보면 실제와는 별 관련이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때가 되면 알게 되는 것은 그때를 기다리는 것도 좋을 듯하다.


우리는 지금 아는 것을 처리하기에도 꽤 바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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