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쑥쑤루쑥 Feb 05. 2024

방학이 끝나고 어머니.

큰 동심이가 드디어 개학했다. 유딩이보다 더 방학이 긴 대한민국 초딩이다. 숙제 안 내주시기로 유명한 현 담임 선생님께서 숙제를 하사하셨다. 방학 중 있었던 일 적어오기. 10줄 이상이란 단서가 붙었다. 어디 많이 돌아다니진 못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공부'를 좀 하면서 좋아하는 걸 충분히 즐긴 방학이었다. 글씨 쓰는 걸 귀찮아하는 동시에 악필인 아이가 무려 두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그것도 예쁜 글씨로 또박또박. 


지면의 절반은 종이접기 공방과 고양이 얘기다. 몇 년째 아이의 장래희망은 종이접기 아티스트.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훨씬 더 좋아하는 것 같단 생각에, 방학 때 종이접기 선생님께 가서 수업을 듣는다. 나름의 커리큘럼이 있어 각 과정을 이수하고 나면 무려 자격증을 딸 수 있다. 어린이 종이접기 급수 자격증. 집에서 혼자 해오던 것보다 훨씬 쉽고 시시할 수 있는데 괜찮겠냐는 걱정도 물리치고, 너무 즐겁게 방학마다 풍덩이다. 공방에는 다정한 선생님만 계신 게 아니라 고양이 가족 4마리가 있다. 생김새도 성격도 각양각색인 엄마, 아들, 딸 둘. 종이접기를 하러 가는 건지 냥이들이랑 놀러 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튼. 


그리고 집에 놀러 온 이모와 보드 게임을 한 일, 이모가 사 준 선물 이야기, 드라이브 삼아 다 같이 이모를 집에 바래다 드리고 돌아오는 밤길에 아이가 좋아하던 음악을 차 안에서 실컷 들었던 순간도 적혀 있었다. 년에 한두 번 가는 키즈카페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방학 때만 한 번씩 가는 듯하다). 필통을 잃어버리고 속상했던 이야기에서는 감정의 변화가 디테일하게 드러났다. 학원 선생님이 선물해 주신 애정하는 샤프들 하며, 담임 선생님이 이름을 각인해서 주신 세상에서 하나뿐인 자를 잃어버렸다며 (거기에 엄마가 깎아주신 연필과 엄마가 골라주신 필통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흥). 하지만 키즈 카페에서 신나게 노는 동안 필통 걱정이 옅어졌다며. 그러다 기타 학원에서 아기다리고기다리던 필통을 되찾아 너무 기뻤다는 이야기. 아이의 또 다른 최애 해리포터 5회독을 시작한 얘기도 빠지면 섭하다. 


화려한 여행이나 값비싼 외출 없이도 아이의 방학이 꽤나 알찼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아이가 떠올릴 수 있는 즐거웠던 일이 저리도 많았다. 아이는 찰나의 순간에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자기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변화도 이제 스스로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24시간을 같이 있다시피한 주양육자인 내가 아이 글에 종종 등장했는데, '나'를 '어머니'라고 일컫기까지 했다. 한 번도 육성으로 들어보진 못했지만, 아니 듣고 싶지 않지만, '어머니'라니. 그것도 깨발랄 장꾸가. '성장'이란 단어가 이토록 잘 어울리는 방학이 있었던가 싶다. 그저 고맙다. 



사진: UnsplashFaris Mohammed


매거진의 이전글 꿀 빠는 풍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