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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 Sep 30. 2022

할시 (Halsey); 낙태는 내 삶을 구했습니다.

By Halsey (July 1, 2022)

[저자 소개] ; 할시 (Halsey)는 미국의 팝가수이다.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본인의 곡들을 공유하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체인스모커스 (The Chainsmokers)의 "Closer," 방탄소년단 (BTS)의 "Boy with Luv (작은 것들을 위한 시)" 등의 협업곡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특히 "Closer"로는 빌보드 시상식에서 "Top Collaboration" 상을 수상한 바 있다.


원문 ; https://www.vogue.com/article/my-abortion-saved-my-life-roe-v-wade-halsey



[읽기 전에] ; 할시 (Halsey)가 본 글을 쓰게 된 배경

2022년 6월 24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 판결을 통해 낙태권에 대한 헌법적 권리성을 부정하였다. 이로써 낙태권을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하여 기념비적인 판결로 평가되었던 'Roe v. Wade' 판결(1973)과 그 후속 판결인 'Planned Parenthood of Southeastern Pennsylvania v. Casey' 판결(1992)은 폐기되었고, 미국에서 낙태 규제는 개별 주(州)의 재량에 맡겨지게 되었다.

출처: 미 연방대법원 "헌법은 낙태권을 보장하지 않는다." (2022년 7월) / https://www.lawtimes.co.kr/Legal-News/Legal-News-View?serial=180072&kind=CC03&key= 

이러한 현실에 분노하며 하기와 같이 할시 (Halsey)가 Vogue의 요청으로 글을 작성한 것이다.



나는 지난 2021년 7월 14일에 아들을 출산했다. 아름다운 분만이었다. 나는 뒤로 기대어 앉아 무릎을 벌렸고, 남편은 내 옆에서 함께 있었고, 마침내 아들을 출산했을 때 웃을 수 있었다.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극도의 기쁨은 사실 내가 기대한 건 아니었다.


나는 이전에도 간호사들과 의사들에 의해 침대에서 옆으로 눕도록 배치된 적이 있고, 흐느끼며 온몸을 들썩이면서 마치 작은 거미라도 내 피부 밑에 있는 것처럼 피가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느낌을 경험한 적이 있다. 나는 24번째 생일 이전까지 총 3번의 유산 경험이 있다. 참 역설적이게도 나는 쉽게 임신을 했지만, 임신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다. 한 번은 "애프터케어 (aftercare)"가 필요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내가 낙태를 해야 한다는 것의 젠틀한 표현이었다. 당시 내 몸은 자연 낙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의료적 개입이 없다면 패혈증 (sepsis; 미생물 감염에 대한 전신적인 반응으로 주요 장기에 장애를 유발하는 질환)에 걸릴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펑펑 울었다. 나는 내 삶이 두려웠고, 절망적이었다. 나는 내 생명을 위협하는 임신을 절실히 끝내고 싶었다.


나는 내 아들이 태어났을 때, 그때 당시 일을 아주 잠깐 떠올렸다. 병원에서는 그때와 같은 소독약 냄새가 났고, 그때와 같은 하얀색 침대 시트가 있었고, 그때와 같이 불안감을 주는 무선호출 소리와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그러나 내 아들 엔더 (Ender)가 태어났을 때, 세상은 조용했다. 때때로 내 삶에서 "실패했던 (failing)" 내 몸은, 그래서 스스로 엄청 미워했던 내 몸은, 이번에는 모든 걸 제대로 해냈다고 생각했다. 산후조리 때 지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것은 내 몸이 건강하게 작동됨을 알게 된 데 대한 행복의 눈물이기도 했다.


덕분에 내 삶에서 오랫동안 나를 옥죄어 온 유산과 낙태 경험이라는 족쇄가 그 순간만큼은 그저 책 한 페이지 정도로 일단락되는 기분이 들었다. 과거의 경험은 그저 "비포 (before)"로, 앞으로의 경험은 애프터 (after)로 구분된 것이다. 다시 말해, 아주 위험했고 원치 않았던 임신들로부터 야기된 피와 고통과 절망의 시간들 이후에는, 비로소 "선택한" 모성 (motherhood)의 행복감이 시작된 것이다.


임신 후반부에 나는 다시 한번 유언장을 작성했다. 과거 경험들로 인해 나는 최악을 준비해야만 했다. 나는 내가 사망하거나 뇌사 상태가 되었을 때, 내 장기를 어떻게 기부할 것인지와 관련하여 자세한 설명서를 작성했다. 즉, 내 심장은 계속 뛰는데 뇌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될 때, 주 (State)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여전히 온기가 있고 홍조를 띠고 있는 내 살을 잘라서 내 장기를 나눠줄 수 있다고 허락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 웃긴 일이다. 수술대 위에 올라가면 내 심장은 그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될 뿐이고, 오히려 내 자궁 속에 있는 심장 박동의 주인공이 내 생사 결정권을 갖게 된다는 게 말이다.


이것이 바로 여성의 낙태권을 무효화하는 데 동의하는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몇 년간 고생한 뒤에 아이를 낳은 지금, 낙태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느냐고. 즉, 이제 낙태에 반대하지 않느냐고. 내 답변은 확고한 "아니오 (No)"다.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공고해졌다.


나는 낙태를 했기 때문에 내 생명을 구할 수 있었고, 내 아들도 그의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모든 여성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이 위험하고도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험을 겪을지 선택할 권리를 부여받아야 마땅하다. 나는 한 팔로 내 아들을 안고 있을 것이고, 남은 팔로 온 힘을 다해 여성의 낙태권 보호를 위해 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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