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 Sep 03. 2024

리들리 스콧 2018 영국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 소감

By Ridley Scott (Feb 2018)

[저자 소개] ; 최근 에이리언: 로물루스 (Alien: Romulus, 2024)의 개봉으로 기존의 에이리언 팬들과 이제 막 해당 시리즈에 입문하는 분들 모두 기대 반, 설렘 반으로 극장을 찾고 계신 듯합니다. 저도 최근에 해당 작품을 보았는데, 개인적으로 무서운 장면들을 잘 보지 못하는 편이라 줄곧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리기 일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에는 참 웰메이드 영화구나 싶었습니다. 에이리언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에이리언 (Alien, 1979)을 비롯하여,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2012), 에이리언: 커버넌트 (Alien: Covenant, 2017)를 감독한 리들리 스콧 (Ridley Scott)이 이번에는 제작에 참여해 힘을 보탰습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리들리 스콧 감독은 아주 친숙합니다. 앞서 언급한 에이리언 시리즈 말고도 숱한 명작들이 있습니다. 그중 제가 좋아하는 필모그래피를 꼽자면, 누구나 엄지척하며 인정하는 글래디에이터 (Gladiator, 2000), 감독의 흔치 않은 로코물 어느 멋진 순간 (A Good Year, 2006), 골든 글로브 작품상 (뮤지컬-코미디 부문)을 받은 마션 (The Martian, 2015) 등이 있습니다.


1937년 영국 태생인 리들리 스콧 감독은 어느덧 9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감독에게 정지 버튼 따위는 없습니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The Last Duel, 2021), 하우스 오브 구찌 (House of Gucci, 2021), 나폴레옹 (Napoleon, 2023), 그리고 올해 하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는 글래디에이터 2 (Gladiator II, 2024)까지. 모두 최근 5년 간 리들리 스콧 감독이 내놓은 대작입니다. 다만, 40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장편 영화 데뷔작을 선보인 리들리 스콧 감독 입장에서는 지금의 속도가 전체적인 타임라인상 딱 알맞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그 이전에는 CF 광고 감독으로 유명했습니다. 약 10,000편의 광고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압도적인 필모그래피에 비해, 리들리 스콧 감독은 생각보다 화려한 수상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미국 아카데미상에도 현재까지 4번이나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한 적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리들리 스콧 감독이 지난 2018년 영국 아카데미 공로상 (BAFTA Fellowship)을 수상했을 당시, 이 업계에 종사한 지 40년이 되었지만, 누군가로부터 상을 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을까요?


물론, 상술한 바와 같이, 마션 (The Martian, 2015)으로 골든 글로브 작품상을 받긴 했지만, 이는 다수의 제작자와 함께 제작자로서 받는 상이었고, 감독상이나 공로상처럼 개인에게만 주는 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수상자 입장에서는 느낌이 달랐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당시 리들리 스콧 감독은 감독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글래디에이터 (Gladiator, 2000)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을 포함하여 총 5개 부문의 상을 휩쓸 때, 정작 감독상 후보에 올랐던 리들리 스콧 감독은 고배를 마신 바 있습니다. 유난히 개인상과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리들리 스콧 감독이 굳이 “처음 (the first time they've ever given me anything)”이라고 강조하는, <2018년 영국 아카데미 공로상 (BAFTA Fellowship)> 수상의 기념비적인 순간을 제 브런치에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다음 리들리 스콧 감독의 수상 소감을 통해서, 그의 개인적인 인생 여정에 대해 들어 봅시다.


원문: https://www.bafta.org/media-centre/transcripts/sir-ridley-scott-winners-acceptance-speech-bafta-fellowship-ee-british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Thank you. Thank you. Thank you. Thank you.]


다 큰 남자는 이럴 때 떨지 않는다고 하던데, 저는 지금 꽤 떨리네요. 이 업계에 종사한 지 40년이 되었는데, 업계 사람들이 제게 뭔가를 준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this is the first time they've ever given me anything). 따라서, 저는 조용히 지나가지 않고, 충분히 소감을 전하려고 합니다.


저는 절대 배우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대사를 절대 외울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미리 준비해 온 메모를 보면서 소감을 전하고자 합니다. 본 상을 수여해 주시고, 따뜻한 말씀까지 전해 주신 윌리엄 왕세자 전하께, 그리고 영국 아카데미 (BAFTA)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역대 공로상 수상자 명단에 제가 포함될 수 있다니, 이는 엄청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론 매체는 제가 팔순 노인 (“octogenarian”)이라고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단어 (“octogenarian”)를 잘 모르시는 분들이 있다면, 일단 젊은이들이 가는 디스코텍 느낌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군요. 그보다는, 밀짚 모자를 쓰고 느긋하게 론볼 (lawn bowls; 잔디 위의 컬링으로 불리며, 잔디에서 공을 굴려 표적에 더 가까이 붙이는 팀이 점수를 얻는 종목)을 즐기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혹시 제가 이 공로상을 받게 된 것도, “너무 늦기 전에 그에게 뭔가를 주는 게 좋을 거야”라는 진짜 이유가 작용했기 때문은 아닌지 궁금하네요.


저는 언제나 후발 주자 (late starter), 즉 늦게 시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15살이었을 때, GCE (General Certificate of Education, 영국의 대학 입학 자격 시험)를 앞두고 있었을 때입니다. 여기에 계신 미국인 분들께서는 GCE에 대해 잘 모르실 테니, 이렇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GCE를 본다는 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있다는 것이고, 영국에서는 보통 15살 정도가 되면 큰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아버지는 제 성적표를 보셨고, 제가 반에서 29등인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런데, 저희 반에는 총 29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4년째 계속 꼴찌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게으른 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정말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실 겁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손을 제 어깨에 얹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최선을 다할 뿐이야. 대신,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꼭 네가 사랑하는 일을 하도록 해.” 아버지는 정말 다정하고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시면서 애써 실망감을 감추려고 하시는 걸 알았습니다. 저는 일주일 정도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의 조언, 즉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뭔가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했습니다. 목공과 미술, 이 두 가지를 참 잘했습니다. 저는 그림 그리는 걸 매우 좋아했습니다. 이쪽에는 꽤 재능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미술 학교 진학을 강력히 권유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보통의 아버지라면 절대 추천할 만한 진로는 아니었습니다. 빈둥거리고, 담배 피우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논하지만 정작 특별히 하는 건 없는 걸로 유명했던 저는, 아버지의 권유가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왠지 미술 학교에 진학하면, 자유분방한 보헤미안 스타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의 교육 시스템에서는 GCE 과목 중 1개만 통과해도 미술 학교에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렇게 저는 하틀풀 예술 학교 (Hartlepool College of Art)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교에서는 의외의 장면들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기괴한 옷을 입고 개성을 표출하는 학생들이나, 학생들에게 진실된 관심을 갖고, 그들을 그저 참고 견디는 게 아닌, 정말 이해심을 갖고 그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열정적인 선생님들을 보는 게 새로웠습니다. 이는 제가 이전까지 경험했던 학교 교육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정적인 선생님들은 특별하고 비범한 것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학생들의 잠재력을 끄집어냈고, 자립심을 타오르게 했고, 더 나아가 어떤 것이 일어나기를 마냥 기다리지 않고, 직접 자신의 미래를 디자인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모든 직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직, 즉 학생을 가르치는 직업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인지하게 된다면, 많은 사회 문제들이 해결될 것입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 오랫동안 논의해 왔고, 아직도 논의 중에 있습니다. 이는 극히 중대한 사안입니다.


선생님들의 아낌없는 격려와 아버지의 직관 덕분에 오늘밤 제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마침내 저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예술 학교인 왕립 예술 학교 (Royal College of Art)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학 후, 저는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저는 교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고, 이런저런 시설들을 이용했습니다. 여기는 가르침을 받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기회를 잡아야 했습니다. 이를 깨달은 시점부터 저는 각성 상태가 되어, 제 주위에 있는 모든 경쟁 요소를 잘 처리하는 법을 스스로 체득하였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세계 최고 인재들 중 일부가 분명 여기에 있었으니까요.


미술 대학에는 종종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우리에게 강의를 해 주었던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 로널드 브룩스 키타이 (Ronald Brooks Kitaj),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과 같은 유명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뉴욕에서 온 광고 전문가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배울 수 있는 필름 스쿨은 없었습니다. 저는 디자인 학부에서 소형 카메라를 찾아냈습니다. 볼렉스 (Bolex, 영화 카메라를 제작하는 스위스의 회사) 제품이었습니다. 저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그 카메라를 빌렸습니다. 그런데 작동법을 몰랐습니다. 그때 마침 아무도 사용한 흔적이 없는, 손때가 묻지 않은, 작은 설명서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잠시만요.

여러분, 지금 제 얘기가 지루하신 건 아니죠? 괜찮으신 것 맞죠? 그럼 계속 진행해 보겠습니다.


영국 북쪽에 위치한 더럼 (Durham)의 해변가로 장면을 바꾸겠습니다. 아주 혹한의 날씨였습니다. 두 명의 배우와 스태프는 버스 정류장에서 대기하는 중이었습니다. 제가 그 정류장에서 또 하나의 촬영을 진행하려고 할 때, 배우는 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배우는 제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단돈 65 파운드 (한화 약 11만 원)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때 영화 제작의 첫 번째 교훈을 얻었습니다. 바로 예산의 효율적인 활용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저와 함께 영화를 찍었던 배우는 제 남동생이자, 훗날 탑건 (Top Gun, 1986)의 감독을 맡게 된 토니 스콧 (Tony Scott)이었습니다. 지난 201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50년 동안 제 영화 파트너였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그는 조금의 꾸물거림도 없이 열심히 일했습니다.


영화는 위대한 예술 형식입니다. 어쩌면 모든 직업을 통틀어서 가장 재미있고도 도전적인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국 최대의 민간 방송국 ITV (Independent Television) 개국의 첫 번째 수혜자로서, 저는 광고 제작이라는 신나는 세계에 입문해 그 작업을 즐겼습니다. 말하자면, 이게 제 필름 스쿨이었습니다.


오늘날 다양한 콘텐츠 플랫폼과 소셜미디어 채널의 폭발적인 증가 덕분에 영화는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접근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365일 연중 무휴로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됨에 따라, 영화는 더욱더 평등하고 대중적인 예술 형식으로 거듭났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진정성 있고 유의미한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기회는, 필히 영화와 스토리텔링이 훗날 지대한 영향력을 갖도록 하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스토리텔러, 즉 이야기꾼으로서, 우리는 항상 이 막대한 영향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유념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의 핵심 원칙, 즉 모든 최고의 스토리는 <진실>에 기반한다는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리 영화가 허구를 다루는 예술 형식이라고 해도 말이죠.


우리는 또한 영화가 교육의 영역에서 엄청난 파급력을 지님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영화가 허구적인 이야기를 다룬다고 할지라도, 결코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교육적인 측면에서는 요즘 다큐멘터리들이 글로벌 의식 수준을 높이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


다큐멘터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야기꾼의 최고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아마 영국의 자연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블루 플래닛 (The Blue Planet, 2001)을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해당 시리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지구를 위한 아마 가장 위대한 TV 광고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진실>을 보여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재능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저와 함께 일한 모든 재능 있는 분들, 모두 저와 같은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제 자녀들, 그리고 제 아내에게, 그리고 여기 계신 윌리엄 왕세자 전하께 다시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영국 아카데미 (BAFTA) 관계자 여러분, 이렇게 위대한 상을 주심에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아주 특별한 공간에 이 상을 보관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참, 그건 그렇고. 저는 내년 2019년 가을에도 시간이 날 테니, 다시 불러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꼭 부모와 자녀를 생이별시켜야만, 속이 후련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