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들이 홀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상처들
최근에 엄마랑 화상통화를 하다 이름만 대충 알고 있던 지인의 남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엄마는 그런 얘기를 했다. 너희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왜 내가 느끼는 슬픔을 사람들이 똑같이 느끼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느낀 슬픔이 10이라면 이번에 지인의 남편이 죽은 것에 대해 느낀 슬픔은 1 정도라고.
나 역시 돌아가신 분의 자식들을 대충 알고 있었지만 크게 슬프지 않았다. 그저 "안됬네" 정도 말할 뿐. 그러면서 엄마는 아프면 고통받는 건 나 자신이니 건강관리 잘해라 하며 화상통화를 끝냈다.
어쩌면 당연하다. 내가 느낀 고통을 타인이 온전히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그 정도의 공감능력이 있었다면 모두 슬픔으로 죽어 인류는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타인을 공감하는 능력이 있지만 상대방의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만큼의 능력은 없다. 오히려 다행이다. 면역력처럼 어떠한 막이 개인마다 있어 타인의 슬픔을 어느 정도 차단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내 휴대폰 액정에는 항상 금이 가있다. 휴대폰을 자주 떨어트리는 탓에 액정에 여태까지 금이 안 간 휴대폰이 없을 정도이다. 최근 문득 화면을 캡처해서 이미지를 공유하려는데, 내가 공유하려는 이미지에는 액정의 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보여주려 한 이미지 속에 내 휴대폰 액정의 금은 당연히 보이지 않는구나. 이 금 이난 화면을 통해 보이는 화면은 나만 바라보는 풍경인 것이다.
최근 회사 동료와 주말에 만나 한잔하며 어렸을 때 자신의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의심 없이 사랑받고 부족한 것 없이 자랐을 거라 생각한 동료에게도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었다.
나는 내 감정 표현에 서툰 편이다. 긍정적인 감정이라면 모르겠지만 나의 부정적인 기억과 상처로 인한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는 보여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다짐하며 살았다. 하지만 때때로 내가 가진 모습에서 어떤 한 부분은 그러한 상처나 슬픈 사건들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그 사건을 이야기 함으로써 나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싶은 욕구가 들기도 한다. 다만 그것을 말한다고 해서 내가 바라보는 나 자신을, 그들이 바라보는 나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하게 하지 못함을 금방 깨닫곤 한다.
내가 매일 바라보는 휴대폰 액정에 금은 항상 내가 보는 이미지들 위에 놓여있다. 다른 사람에게 내 화면 액정에 금이 난 걸 보여준다 한들 그건 화면에 금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단 한 명도 금이 가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리고 놀랍게도 완벽하게 같은 금 이난 액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두들 그렇게 작고 크게 그리고 다르게 만들어진 상처를 통하여 각자 세상을 바라보고 소통하는 것이다.
최근 서부전선 이상 없음이라는 영화를 봤다. 세계 1차 대전을 독일 군의 시선으로 전개시키는 영화였다. 독일군의 시선에서 이야기하는 세계대전이라는 점에서 신선했고 당연히 참담하고 가슴이 아팠다. 지금 우리의 시대에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내가 단지 2시간 반 동안 바라본 풍경이 그렇게나 고통스럽고 가슴 아팠는데, 지금 전쟁을 겪고 있는 이들은 얼마나 큰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휴대폰 액정처럼, 이터널 선샤인처럼 쉽게 액정을 갈거나,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전히 나이브하게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 삶 속에 새겨진 크고 작은 금을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그런 상처를 받아들이며 같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홀로 감당해야 하는, 타인에게는 온전히 공감받을 수 없고 나눌 수 없는 그런 세상에 크고 작은 슬픔을 생각하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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