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 다시 보는 남자 #3
찌뿌둥하다.
머리맡 충전기에 꼽아둔 핸드폰 비명소리에 경기 일으키듯 깼다. 매일 듣는 알람이지만 매번 새롭게 놀란다. 오늘이 아직 수요일이라는 사실에 또 놀란다. 금요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켜 세우고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꿈을 되새겨 본다. 현란한 꿈을 꿔서 아직도 몸이 무겁다. 십분 정도 멍을 때리다(?) 출근 준비 시간 한계치에 이르러 빛의 속도로 준비하고 나섰다. 버스 뒷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꼽고 고막에 음악을 밀어 넣으며 지난밤 무슨 꿈을 꿨는지 재생하다가, 고개를 떨구고 다시 꿈에 빠져들었다. 단잠에서 깨어보니 회사 앞 버스 정류장이다. 세렝게티 초원에 사는 초식동물의 생존본능 같은 기상 본능에 감사해하며, 바삐 회사 정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할아버지, 저 전에도 여기 왔었죠?”
앤트워프 마을 성당에서 네로는 어렸을 적 엄마와의 추억이 있는 루벤스 그림을 발견한다. 네로는 지금껏 엄마와의 추억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속에 떠오르던 장면의 배경이 이 곳임을 깨닫는다.
성당에서 본 그림은 꿈속에서 엄마와 함께 있던 순간 보았던 그림이다. 실제 앤트워프 노트르담 성당 제단에 놓인 17세기 루벤스의 '성모승천'이란 작품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후 육체와 영혼이 함께 승천했다는 가톨릭의 교의敎義다. 그림 아래 묘사된 사람들은 빈 석관을 보고 놀라고 있고, 푸른 옷에 황금 수가 놓인 흰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성모는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살이 오른 오동통한 아기 천사들 은성모를 수호하며 날고, 두 명의 천사는 그녀에게 장미 화관을 씌우려 한다. 명암은 신성하면서도 부드러운 권위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할아버지는 네로에게 엄마가 생전에 좋아하던 작품이라고 알려준다. ‘그림을 보면 가슴속에서 용기가 솟아난다고’ 말했던 엄마는 지금 없지만, 엄마의 감정을 네로는 조금 알 것 같다. 루벤스 그림 앞에서 할아버지와 네로는 기도를 올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눈 앞에서 본 그림에 강하게 이끌린 네로는 그날 밤 루벤스 그림에 대한 꿈을 꾼다. 그 꿈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네로의 꿈에 마중물이 된다.
퇴근 시간,
몸을 찌뿌둥하게 만들었던 지난밤의 꿈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흐릿하게 이미지라도 잡히면 좋으련만 다음 수업시간을 위해 깨끗이 지워진 칠판처럼 남아있지 않다. 머릿 속은 분필 먼지만 가득한, 막 칠판을 지운 교실 앞자리처럼 뿌옇다. 새삼 네로의 꿈 재생 능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요새 나는 영화 ‘인셉션’에서 킥맞은 것처럼 나를 둘러싼 세계가 무너지듯 잠에서 깨어 악당에 쫓기듯 출근한다. 매일이 미션 임파서블이다.
출근과 업무라는 중대한 미션을 수행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Mission complete다. 후우. 쏟아지는 총알을 피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영화 주인공처럼, 냉장고에서 시원한 수입 맥주를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수입 맥주를 마셔야 성공한 기분이 든다.) 매일 이러니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이 찌뿌둥한가 싶었다. 나른히 등을 기대고 하루의 긴장이 풀리는 순간, 생각은 별안간 네로가 꿨던 꿈에 다다랐다. 내가 네로만 한 나이였을 때 꿨던 꿈은 어디 갔을까. 기존 질서에 편입되어 그날그날의 진부한 흐름에 파묻혀 지내고 있구나. 은밀한 불안감이 밀려오며, 불현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재 제일,
회사에 들어왔지만 내가 인재였나,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인재인지 의문이 들었다. 네로는 자신이하고 싶은걸 품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꼭 되고 싶고 하고 싶은 게 있어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 냉탕과 온탕 사이, 짜장과 짬뽕 사이를 넘나들며 생각을 주고받다가, 이런 생각도 하다니 내가 여유가 좀 있구나 싶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바라던 회사에 왔는데 막상 일을 하니 무던히 무뎌졌다. 현실과 이상은 달랐고, 목표와 하는 일은 어긋났다. 이 와중에 배운 것은 조금의 뻔뻔함과 유연함이다. 계획은 수정되기 마련이었고,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여유가 생겼다. 안 풀릴 때는 커피 한 잔 마시고와 다시 쳐다보면 실마리가 풀렸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한참 씹어주니 기분이 나아졌다. 이렇게 생긴 유연함은 허탈한 순간에도 웃게 했고, 안 좋은 순간에는 더 나은 방안을 찾게 했다. 물론, 이 저도 다 안될 때도 있었다.
“네로, 이 할아버지는 말이다 네가 빨리 커서 힘도 세고 아주 믿음직한 남자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30대가 된 나는 네로 할아버지의 말처럼 빨리 크지도 않고 힘도 세진 않지만 적어도 믿음직한 사람은 된 것 같다. 이 믿음信은 은행에서 ‘신용도’란 이름으로 부여했다. 이 믿음 덕에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먹고 싶은 걸 벨트 풀고 먹을 수 있는 카드가 생겼다. 감사하게도 이 믿음의 카드는 다음 달에도 내가 회사에서 돈을 벌고 있을 거라는 것 예상 가능하게 해준다. 카드값을 갚기 위해서다. 놀라운 세상이다.
회사 생활에서 배운 뻔뻔함과 여유 덕에 꿈도 낙낙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삶은 2시간 러닝 타임 영화가 아니라 50부작 대하드라마라고 생각하니 조급함이 사라졌다. 30대 나의 꿈은 네로의 꿈처럼 갓 잡은 활어마냥 팔짝팔짝 뛰진 않지만,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선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대로 뻔뻔하게 웃어넘긴다. 대신에 되는 건 확실하게. 이렇게 네로 할아버지의 나이가 되면, 그때는 꿈에 근접해 있을 것 같다. 채우려 하지 않고 밀려서 차 오르듯 색칠하면서 말이다.
그때가 되면 전날 꿨던 꿈은 지금처럼 기억나진 않겠지만
눈빛은 또렷이,
조금만 뻔뻔하고, 여전히 유연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