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 다시 보는 남자 #4
월세는 내고 다니냐?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 송강호는 범인으로 추정되는 용의자 박해일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라고 묻는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는 송강호의 외마디와 달리, 심증은 또렷하게 물증은 뚜렷하게 네로 할아버지의 ‘월세’ 걱정은 현실적이다. 집주인은 네로 할아버지에게 이번 달 월세를 낼 수 있는지 묻는다.
한스 : 영감님이야 워낙 계산이 깔끔하니까 걱정은 안 하지만, 혹시 이번 달 월세를 밀릴 일은 없겠죠?
네로 할아버지 : 네… 밀리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한스 : 문제없음 됐어요, 이만 가보세요.
어린이가 시청하는 만화영화에서 주인공은 월세 걱정을 한다. 공에다 몬스터를 담아 누가 싸움을 잘하나 겨루고, 봉인된 영혼이 튀어나오는 카드로 유희를 즐기는 요새의 만화영화와는 다르게 지극히 경제관념이 확실하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빈부 격차는 극의 긴장감을 높이는 주요 요소다. 만화영화는 소설 원작보다 순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다. 벨기에나 대한민국이 나 월세 걱정은 월드 와이드다.
‘아침에 일어나니 내가 벌레가 되어있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보다 무서운 이야기는 바로 부동산에 대한 이야기다. 좁은 집과 비싼 월세를 생각한다. 소설처럼 내가 차라리 벌레였으면 이 많은 공간들이 필요치 않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육 첩 방 안에 널브러진 책들을 바라본다. 좁은 방에 책상과 노트북, 침대 그리고 그 사이를 꾸준히 메꿔주는 옷가지들이 시야에 가득 찬다. 무엇보다 가장 듬직한 사물은 바로 책이다. ‘언제 이렇게 책을 많이 샀지?’라는 혼잣말을 하며 켜켜이 쌓인 책들을 정리해본다. 번듯한 책장을 놓고 싶으나 공간이 여의치 않다. 누가 보면 몇 천 권의 책이 있는 것 같지만 고작 몇 백 권이다. 물론 이 숫자도 '고작'은 아니다. 활자중독과 책에 대한 *오덕五德 기질이 나의 공간을 점령하게 만들었다.
(*오덕五德 :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이르는오타쿠의 줄임말. 하지만 살아가는 지혜, 다섯 가지 덕목 중 하나로 '덕질'을 들고 싶어 쓴 표현이다.)
내 집 마련의 꿈과 함께 나만의 서재를 갖는 게 꿈이다. 번듯한 책장과 책상, 바라만 봐도 편안한 알칸타라 소재 안락의자가 놓인, 써라운드 돌비 사운드가 흘러나오는 스피커를 갖춘 공간을 갖고 싶다. (상상력은 돈이 들지 않으니 마음껏 떠올려봤다.)
내 집 마련의 꿈은 국경선 두만강 물 바라보듯 아득하다. 내 집을 갖게 된다고 해도 그건 ‘우리’와 ‘은행’의 공동 소유다. 온전한 내 집은 아니다. 현실과 악수하며 하는 부동산 관련 일은 속 시원한 '직방'과 커피 향 구수한 '다방' 같은 어플 뒤적이기다. 집을 구하는 것보다 방을 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현실을 망각하고 마구잡이로 책을 입양해왔다. 퇴근 후 문 앞에서 기다리는 택배는 여우 같은 마누라처럼 반갑다. 쌓인 책들을 바라보면 다 읽지 않았어도 왠지 지식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이것도 병이다.
가로 152mm 세로 225mm,
책의 주요 판형 가운데 하나인 신국판新菊版 사이즈다. 이 크기는 책 판형의 기준이 되며 많은 책들이 이 사이즈에 속한다. 판형의 바이블이다. 고작 152 X 225mm면 얼마나 되겠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마저도 쌓이면 꽤나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부동산 가격의 상승은 책을 사고 자하는 의지에 영향을 준다. 내가 가진 공간을 책 무더기가 차지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책들의 사이즈가 작아지고 있다. 무겁지 않은 내용의 책을 찾는 경향도 있겠지만, 물리적인 책 크기 자체가 작아지는 추세다. 24시간 yes인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2017년 4월 베스트셀러 20권의 사이즈를 살펴봤다. 단순 판매 순위로 나열한 것이라 시, 인문, 에세이, 아동 등 분야가 다양하지만 대략적인 가늠을 해볼 만하다. 가로 사이즈는 112 ~ 188mm까지, 세로는 184 ~ 257mm까지 다양했다. 물론 신국판 규격에 맞춘 책들도 있다. 전체 책 사이즈를 평균 내어보니 가로 148.6mm, 세로 214.4mm다. 표준 책 사이즈라 불리는 신국판 사이즈보다 가로는 약 4mm, 세로는 약 9mm 정도 작다. 책이 작아졌다.
책을 산다라는 것은 내가 거주하고 있는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내 공간을 내어주며 가지고 싶은 책은 많다. 하지만 책이 쌓이면서 걱정도 쌓였다. 생각보다 이 녀석들이 차지하는 공간이 커졌다. 자가 생식을 하는 아메바 같은 번식력이다. 이런 문제를 공대생 친구 녀석은 ‘그러면 중고 서점에 팔면 되지.’라고 E=MC²공식처럼 정확하게 짚어줬다. 천재다. 그럴 수 있지만 무릇 진정한 오덕五德이라면, 애정 하는 것들을 내놓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리라.
책 더미에 방의 중심을 내어주고, 방 한구석에서 책 제목을 눈으로 훑어본다. 책을 읽었던 단상과 생각이 필름처럼 스쳐간다. 눈에 걸리는 책을 다시 펼쳐 가물 했던 문구를 더듬었다. 이 맛이다. 책을 계속 읽지 않더라도 읽었던 책 제목이 시야에 들어와 있으면 주제와 문장들이 생기를 얻고 머릿속을 뛰어다닌다. 그래서 책 더미에 내 공간을 내어주고 있었나 싶다.
네로 : 진짜로 월세 낼 돈 있어요?
할아버지 : 넌 전혀 걱정할 거 없단다.
우유통을 잔뜩 실은 수레를 네로 할아버지는 앞에서 끌고, 네로는 뒤에서 밀며 앤트워프로 향한다. 참새는 지저귀고 햇살은 따사로운데 네로의 대사는 퍽퍽한 고구마 먹듯 목이 멘다. 현실 다큐 ‘인간극장’ 속 조숙하게 철든 소년 가장의 대사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집이 없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서글픈 일이다. 전혀 걱정할 거 없다고 말하는 할아버지도 크게 대책은 없어 보인다. 오늘도 그저 우유통을 성실히 나를 뿐이다.
작아진 책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이동하면서 독서하라고 책이 작아지고 있나? 집이 좁아서 별의별 생각이다 드나 보다. 그럴듯한 책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에디슨이 달걀 품듯 품은 채 돈 벌러 나왔다. 부동산 대책이 어쩌고 저쩌고, 뉴스를 껐다. 위화감 드는 소식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는 본다.
이번 주는 책 대신 로또를 샀다.
내 집 마련의 꿈이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건, 기분 탓이겠지.
Ps. 브런치에 기 연재한 '책 때문에 집'을 가져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