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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호 Sep 01. 2017

개, 파트라슈, 플란다스

 플란다스의 개 다시 보는 남자 #5

이름 : 파트라슈Patrasche
나이 : 알 수 없으나 노견으로 추정
견종 : 부비에 데 플랑드르Bouvier des Flandres
체고 / 체중 :60cm ~ 70cm / 27kg ~ 40kg
특징 : 덩치가 크고 누런 털을 가지고 있으며, 지능이 좋고 주인에게 순종적


파트라슈는 쓰러진다.


못된 철물상 주인에게 물도, 먹을 것도, 휴식도, 사랑도 받지 못하고 부림 당하다 정신을 잃고 길에 주저앉는다. 채찍질과 욕지거리를 해도 소용 없자 주인은 길섶에 파트라슈를 버리고 장터로 향한다. 동물 학대에 이어 동물 유기다. 만화영화 속 전형적 나쁜 사람인 철물상 아저씨는 동물에게 손을 댈 뿐만 아니라, 네로와 친구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한다. 적잖이 감정 이입되며 부들부들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아니, 어린이 만화영화인데 이래도 되나. ‘플란다스의 개’를 볼 때마다 이런 물음을 던지지만, 만화영화를 보던 그때의 나를 리플레이하는 기분으로 차분히 보려 했다. 음, 그래도 철물상 아저씨는 좀 화난다.

다시 한번 부들부들.

 


파트라슈는 어떤 종류의 개일까 궁금했다.

파란 화면의 PC통신조차 발달되지 않았던 그 시절엔, 아 정말 크고 복슬복슬한 개다,라고 생각하며 입 벌리고 그저 봤다. 알려주는 이도 없었고 그렇다고 딱히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던, 양념치킨이 만원 이하였던, 호시절이다. 초록 검색창으로 웬만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요즘과 다른 순수함이 남아 있던 시절이다. ‘개 좀 안다’라며 방귀 좀 뀌던 친구가 ‘아 저거 무슨무슨 종이야’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영어로 뭐라 뭐라 말해서 기억에 남지 않는다. 영어로 된 단어는 지금도 외우기 어렵지만 그때는 더 외우기 어려웠다. ‘아 그렇구나’라고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 뒤돌아서 공 차러 운동장에 달려갔었다.


음, 그래서 견종이 뭐라고?


견종은 ‘부비에 데 플랑드르’ 다.

‘세인트 버나드’, ‘버니즈 마운틴 독’, ‘그레이트 피레니즈’ 등 파트라슈 견종에 대한 다양한 설이 있지만, ‘부비에 데 플랑드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거론된 견종 모두 덩치가 크고 털이 복슬복슬한 개들이다. 그렇다면 왜 ‘부비에 데 플랑드르’가 파트라슈의 견종일까.


견종 이름에서 볼 수 있듯 ‘플랑드르 Flandres’는 벨기에 지명이다. 지명을 영어식으로 고쳐 발음하면 ‘플란다스’다. 소설 원작과 만화영화에서는 견종을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지만, 제목이 ‘플란다스의 개’인 것을 보면 지명과 견종이 연관되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부비에Bouvier’는 소몰이를 뜻하는 프랑스어. 이 견종은 벨기에 플란다스 지역에서 소 떼를 몰고 다니는 소몰이 역할을 했는데, 가축을 보호하고 수레를 끄는 일을 했다. 만화영화 속 파트라슈의 역할 그대로다. 뿐만 아니라 ‘부비에 데 플랑드르’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부상병을 구조하고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하니, 파트라슈의 착한 성격도 여기서 비롯된 듯하다.

 


네로는 못된 철물상 주인이 혼자 낑낑거리며 수레를 끄는 모습을 보고, 파트라슈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한다. 이곳저곳 파트라슈를 찾아 헤매던 네로는 길에 쓰러진 파트라슈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간다. 네로는 옆집 누레뜨 아줌마네 집에서 짚풀 한 뭉텅이를 구해와 파트라슈에게 아늑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지극 정성으로 파트라슈를 보살핀다. 파랗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파트라슈를 바라보며 간호하던 네로는 옆에서 그대로 잠이 든다.

그 시절 나는 ‘힘을 내, 파트라슈’ 라고 응원을 하고 있었겠지? 만화영화를 보던 나는, 네로에게 감정이입 되어 학대받는 파트라슈를 구하고 싶던 수많은 꼬맹이 중 한 명이었다.



지금은 살림살이가 퍽퍽한 독거 삶에 조그만 반려식물 죽돌이(죽돌이는 대나무다)만 키우고 있지만, 꼬맹이 시절 우리 집은 까맣고 허리가 길쭉한 닥스훈트를 키웠다. 만화영화를 본 잔잔한 여운을 담아 쓰다듬어주고 간식을 챙겨주면, 홀랑 간식만 가지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 혼자 놀던 ‘복달이’다. 종종 엄마는 현관 우유 투입구에 열쇠를 놓고 갔다. 그러면 '복달이'는 열쇠 꾸러미를 우유 투입구에서 저어 멀리 물고 가져다 놔, 나는 팔을 뻗고 막대기로 휘휘 저어 열쇠를 끄집어냈었다. 씩씩거리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고음으로 ‘복달이’를 부르면 자기집에 숨어서 나오지 않던 녀석이다. 지금은 무지개다리 너머 잘 지내고 있겠지.


헛헛한 마음에 ‘반려견을 삶에 다시 초대할까?’라고 생각했다. 


헛생각이다. 반려견 행동 전문가 강형욱 씨가 쓴 ‘당신은 개를 키우면 안 된다’라는 책 제목처럼 나는 강아지를 키우면 안 된다. 혼자 두는 시간이 길고, 많은 시간 산책과 놀이를 함께 하지 못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군가를 15 시간 기다린 적 있습니까?’라는 책의 문구는 자못 뜨끔하다. 내 삶 속에 반려견은 일부인데, 반려견은 자신의 세계에 내가 전부다. 나는 아직 반려견의 ‘전부’를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네로처럼 파트라슈를 정성껏 보살필 수 있을 때 함께 해야겠다.


그때가 되면 강아지 이름을 ‘파트라슈’로 지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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