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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호 Jun 19. 2019

6월의 <무진기행>과 반소매 셔츠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꺼낸 옷

그러니까 벌써, 일 년의 절반이 지난 6월이다.

오래 꺼내놓은 보리차처럼 바람이 미지근하다. 밖으로 드러난 살갗을 간지럽히고 불어가는 6월의 더운 바람은 자연스레 가벼운 옷을 입게 만들 수밖에. 요 앞 가뿐히 걷고 오면 슬몃 땀이 모공 밖으로 배어 나올 날씨다. 올해도 무지 덥겠다, 를 모든 대화 속에 슬쩍 던져도 어색하지 않은 지금. 가상의 도시 ‘무진’에서의 6월의 짧은 며칠을 담았던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의 문장이 떠올랐다. 지금의 온도를 담은 그때의 문장.

 


그러나 하여튼 그들은 색 무늬 있는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고 데드롱 직()의 바지를 입었고 지나쳐 오는 마을과 들과 산에서 아마 농사 관계의 전문가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관찰을 했고 그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얘기하고 있었다.

-    김승옥 <무진기행>, 민음사


 

<무진기행> 속 화자이자 주인공 ‘윤희중’은 버스를 타고 자신의 고향 ‘무진’으로 향한다. 버스의 덜커덩거림과 6월의 바람은 주인공을 반수면 상태로 끌어넣고 있고, 버스 뒷 자석에는 농사 관련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앉아 있다. ‘색 무늬 있는 반소매 셔츠’를 입고 시골 사람 답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점잔을 빼는 모습은 어느 정도 지위 체계를 갖춘 조직의 일원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그들이 입었던 반소매 셔츠. 셔츠긴 셔츠지만 반소매 셔츠다. 근데, 그게 무슨 큰 의미라고?

 

셔츠는 속옷이다. 셔츠는 수트를 입을 때 받쳐 있는 속옷 역할을 한다. 그래서 셔츠 안에 속옷을 따로 입지 않는 것이 매너로 통용된다. 이 정도까지는 지금의 우리에게 어느 정도 널리 알려진 상식. 흔히 난닝구라 불리던 러닝셔츠를 셔츠 안에 입는 모습은 조금 옛날 사람임을 보여주는 클리셰 역할을 하기까지 한다(물론, 러닝셔츠는 의도된 스타일일 수도 있으며 사람에 따라 최신 트렌드로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굳이 함께 언급해두겠다).

 


영화 <안개 부인> 속 한 장면 / 실제 <무진기행>이 영화화된 작품은 영화 <안개>다.

발췌에 언급된 그들이 입은 반소매 셔츠는 변종이다. 셔츠는 기본적으로 속옷이고, 자켓과 함께 입어야 하는 옷이기 때문이다. 격식과 더위와의 타협으로 인해 태어난 반소매 셔츠는 셔츠의 본고장 유럽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아이템이다(물론 패션에는 답이 없다). 자켓을 입지 않더라도 셔츠의 소매를 접어 걷어 올리는 것이 정석인 셈. 복식을 떠나 합리성으로 따지자면 반소매 셔츠 또한 훌륭한 아이템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공무원 조직의 권장 복장, 중고등학교 교복으로 반소매 셔츠가 널리 입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는 러닝셔츠 바람으로, 바지는 무릎 위까지 걷어붙이고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초라해 보였고 그러나 그가 흰 커버를 씌운 회전의자 위에 앉아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몸짓을 해 보일 때는 그가 가엾게 생각되었다.

-    김승옥 <무진기행>, 민음사


 

서울 사람 ‘윤희중’이 바라본 무진에 사는 친구 ‘조’의 모습이다. 주인공은 ‘조’가 ‘무진’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서울의 제약 회사 임원이 되는 것을 앞두고 있는 주인공에게 ‘조’의 생각, 말투, 옷차림은 어떻게 보였을까. 소설 속 문장은 담담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등장인물의 묘사하며 무진의 기운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1960년대 작품이란 걸 언급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표현 방식은 말쑥하다.

 

소설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을 ‘서울’과 ‘무진’이라는 공간 안에서 풀어낸다. 6월의 온도를 담은 문장 속에서 끄집어낸 셔츠와 반소매 셔츠, 그리고 러닝셔츠도 그 공간 안에서 변주되는 요소 중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살갗이 드러나는 계절에 자신의 내면을 도회의 어법으로 담아내는 소설 <무진기행>을 읽어 보는 일. 이 또한 지금을 충실히 누리는 방법 중 하나겠다.

 

광장의 시계탑처럼 선명하게 여름이 다가옴이 느껴지는 지금. 6월의 ‘무진’과 어울렸던 반소매 셔츠를 옷장에서 꺼냈다. 봄옷의 미끈한 부들거림과 달리 특유의 까슬거림이 느껴진다. 차가운 도시의 사무실에 들어설 땐 소름이 오스스 돋지만, 치열한 밖에선 요긴할 소재. 더할 나위 없다. 셔츠의 정석, 패션의 정석은 아니지만 추천해 마지않는다. ‘무진’의 안개보다 더 지독한 여름엔 반소매 셔츠를 입어보자. MD라고 항상 교과서만 말하지는 않는 법이니까(고백하자면 우리네 MD는 반소매 셔츠도 만들어 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벌써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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