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입김 어린 메시지를 보며
영하의 날씨. 춥다, 또 어떤 곳은 눈이 온다와 같은 카톡방의 아침 인사말들로 눈을 떴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하루를 준비하는 이들의 SNS 피드에는 더운 입김 어린 메시지가 넘친다. 따뜻하게 입고 나오세요, 란 말들이 정겹다. 랜선 넘어 체온 담긴 연대감 넘치는 말에 벌써 따숩다. 힘차게 돌아가는 보일러 덕분에 뜨근해진 방바닥에 발바닥을 데고 일어나 오늘 입을 옷을 고민했다. 추위를 질색하는 타는 탓에 무조건 보온성 위주다. 얼죽코(얼어 죽어도 코트)는 남의 얘기일 뿐이다.
까슬한 겨울 맛이 느껴지는 묵직한 스웨터에 머리를 밀어 넣었다. 하의는 코듀로이. 옛말에 골덴 바지라고 불리던 세로로 줄줄이 길이 나 있는 감색 바지에 다리를 끼워 넣었다. 둘둘 말려진 두터운 양말을 펼쳐 발을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폭신한 다운 패딩에 몸을 담그니 바깥공기가 두렵지 않다. 이제 집 밖을 나설 차례. 옷들 사이에 나를 담아놓고 문을 열었다. 쐬한 냉기에 코가 뻥 뚫린다. 순간 폐까지 깨끗해진 기분. 추위를 좋아하진 않지만, 겨울의 공기는 매콤한 매력이 있다.
단디 입어서 숨은 차지만 몸은 뜨끈하다. 나와 옷 사이 공간에 방안의 따뜻한 공기들이 촘촘히 메워져 있어서다. 나오는 길에 나도 몇몇 지인에게 추운데 따뜻하게 입고 나왔는지 물었다.
옷일을 하러 나섰다. 같은 표정의 옷을 연달아 찍어내는 산업 자본주의의 사명을 띤 직각의 일을 하고 있지만, 내가 다루는 옷들이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안겨주는, 오늘과 같은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위안을 전해주었으면 했다. 그런 류의 생각을 하며 사무실에 도착했다. 외투를 벗으며 각자의 체온을 데워준 일 인분의 옷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위로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위로에게 다가가고 내가 위로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안간힘>, 유병록
옷장을 열어 옷을 고르는 일. 유병록 작가의 말처럼 스스로 찾아가는 위로가 아닐까 싶었다. 각자의 온기를 듬직히 지켜주는 위로의 일을 매일 스스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입는 옷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었겠다. 그 덕분에 타인의 체온을 걱정하게 되으니까. 그래서 말할 수 있겠다.
아직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나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