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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호 Feb 25. 2020

흔한, 퇴사하고 여행 간 사람의 기분

술김에 파리행 티켓

삼성을 퇴사하며, 난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거야,라고 호연지기 넘치게 회사 밖을 나왔지만 직장 생활만 하던 내가 별 수 있겠나. 썰물 후 드러난 갯벌처럼 물기 삐쩍 마른 글만 써 재끼던 날들이었다. 글 쓰는 일을 탄식하며 친구 집에서 함께 술 한잔 들이켜다가 술김에 파리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언젠가 제목만 슬쩍 보았던 헤밍웨이의 <파리는 언제나 축제>를 들먹이며 멘트는 그럴싸하게, 그래 파리는 언제나 축제겠지, 마시자. 그 말 이후 기억은 달아났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깨어보니 친구 집 거실 테이블 아래에 뻗어있었다. 파리행 티켓팅이라니. 취기와 용기의 정비례적 상관관계는 역시 사이언스라는 걸 깨닫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만든 공유 숙박 업체 에어비앤비의 메인 카피처럼 여행지 한 달 살기가 각자의 버킷리스트에 하나씩 담기는 추세. 유행을 놓칠 수는 없지. 나 또한 여행지에서의 한 달을 질렀다. 돈은? 계획은? 아무 대책 없이 항공 티켓팅 후 출국 이틀 전에야 파리 현지 한인 민박을 예약했다. 한인 민박은 여행지에 대한 정보와, 현재 여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여행 정보의 보고. 여행지에 대해 막막함이 앞선다면 하루나 며칠 정도는 추천하는 바다. 기일은 한인 민박에서, 나머지 일정은 떠오르는 대로 움직여보기로 했다. 유심과 환전하는 일만 겨우 챙기고 비행기에 올랐다. 봄, 4월 어느 날이다.

 

누가 봐도 전 관광객입니다, 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온몸으로 뿜어내며 캐리어를 질질 끌고 한인 민박집에 도착했다. 눈에 익지 않은 외국인들 사이를 뚫고 한국인과 한국어를 만나니 잠시 반갑다. 이런저런 얘기를 들은 후 짐을 내려놓고 구글맵 하나 믿고 길을 나섰다. 여행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찬 순간. 에펠탑으로 달려갔다. 프랑스의 축적된 기호가 모여있는 곳으로.

 

에펠탑 앞. 술김에 파리행 티켓을 질렀지만 당시의 취기에 감사했다. 숙성과 발효가 빚어낸 알코올의 위대함에 감사함을 표하며, 근처 마트에서 산 작은 와인 하나를 오픈해 마셨다. 달큰히 취했다. 기분이 좋아지는 건 당연지사.

 


같은 경험을 해도 그때마다의 감응과 기억은 다르다. 수많은 이들에게 에펠탑도 그러하리라. 첫 회사를 합격하고 입사까지 여유를 가지던 시간. 유럽 배낭여행을 하며 보았던 에펠탑의 기억을 더듬었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던, 입사를 기다리던 시간에 보던 에펠탑과 퇴사하고 무얼 먹고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는 시간에 보는 에펠탑은 물성이 달리 느껴졌다. 입사와 퇴사 그 사이 시간 동안 에펠탑은 달라진 건 없었고(좀 녹이 슬었을지도), 나는 좀 더 나이를 먹고 진짜 녹이 슬었다. 뻐그덕 거리는 무릎을 붙잡고 여행자 특유의 설익고 들뜬 감상을 누렸다. 

 


“그러나 파리는 아주 오래된 도시였고 우리는 너무 젊었으며 이 세상에 그 무엇도 단순한 것은 없었다. 가난도, 갑자기 생긴 돈도, 달빛도, 옳고 그름도, 달빛을 받으며 곁에 잠들어 있는 한 사람의 고른 숨소리마저도….”

- <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폰과 카메라로 에펠탑 앞에서 자신의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 사이에 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어느새 관광지의 먹을거리 냄새, 빵 냄새, 백인과 흑인, 중동인의 모습이 눈에 익어 익숙해지고 있었다. 파리에서 썼던 헤밍웨이의 문장처럼 낭만을 씹다가 파리행 티켓을 지르던 그날 밤 나누었던 취기 어린 대화를 떠올리며 주변의 관광객처럼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파리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파리에서의 첫날만 이렇게 생생하다. 흔한, 퇴사하고 여행 간 사람의 기분이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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