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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호 Feb 18. 2020

이국의 냄새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떨림의 종류


드르륵. 폰이 떨린다. 손이 떨린다. 카카오 택시 기사님이 거의 다 도착했다는 메시지다. 사무실. 택시가 도착할 무렵을 얕게 계산하고 메일을 휘갈겼다. 토르 망치 휘두르듯 작성하던 메일에 엔터를 내리치고 자리를 벌떡 일어났다. 외근 다녀오겠습니다. 후다닥 택시를 맞이하러 갔다. 이렇게 바쁜 척을 조금 하면 그럴듯한 커리어career맨 이 된 기분. 허나 실상은 가방 하나 들고 잽싸게 외근 나가는 캐리어carrier맨이다.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 용례에는 커리어와 캐리어를 혼용하는 경우를 명시했다. 경력과 가방 사이. 커리어나 캐리어나 생긴 한글 모양새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속으로 마지못하여 쓰게 웃었다


택시 안에서도 바쁜 척이다. 무선 이어폰을 끼고 허공에 손짓하며 통화를 했고, 허우적거리던 손으로 스케줄표를 더듬었다. 아, 그날은 안되구요, 이 날은 됩니다. 그리고 이 날은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갑과 을의 관계. 통화 속에, 그 안의 을과 을끼리 업무를 이어갔다. 을과 을이라고 표현했지만 서로 병, 정일 수도 있겠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하늘의 기운을 구분했던 천간天干은 오늘날 각자가 서 있는 계단을 말해주는 상징이 되었음을, 이 말을 만든 이는 알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통화를 나눴던 우리는 병, 정보다 좀 더 허리 아래겠다. 통화를 끊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점심을 건너뛰어서일까. 입에서 단내가 났다. 

 

대학시절, 패밀리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하며 육체노동 계급에서 정신노동을 하는 계급이 되고 싶었다. 이름 그럴싸한 대기업에서 일하고 싶다, 라는 상승의 욕망으로 어찌어찌 삼성에 입사했고 CJ에 왔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생각은 소박하고 천진했음을 깨달았다. 육체노동을 하며 정신노동을 해야 했고, 정신노동을 하며 육체노동을 했다. 의류 박스를 나르고, 노트북을 이고 내달리는 육체노동과, 달리는 기차와 택시에서 노트북을 펼쳐야 하는 정신노동. 짬짜면, 낙곱새와 같은 혼합 메뉴 이름같이 일을 했다. 상품의 뒤에서 일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고상하게 일하고 있지 않았다. 회사원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된 큰 깨달음이다.

 

수서역. 부산으로 향하는 SRT 열차를 탔다. 가아끔 바다 건너 외국으로 출장을 가는 일도 있지만, 오늘은 부산행이다. 열차를 기다리며 햄버거 세트를 씹었고, 한 손에 더운 아메리카노 한 잔 들고 좌석에 앉았다. 좌석과 좌석 사이 콘센트 구멍에 노트북 전원을 밀어 넣고, 노트북 단자에 폰 충전 케이스를 밀어 넣었다. 이렇게 물고 물리는 전력 관계의 이음새를 보자니 내 충전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서 급속 충전, 다시 업의 영역에서 밖을 내달리니 삶의 배터리가 자잘하게 남아있었다. 다람쥐 통 같은 일상. 다람쥐는 없고 통은 굴러가고 있었다. 데구르르.

 

모니터에서 퍼렇게 발광하던 메일창을 닫고 지난 여행에서 찍은 사진 폴더를 열었다. 삶의 모자람이 있을 때의 치트키. 뚜렷한 목표 의식 없이 스크롤 다운을 이어갔다. 그때 그곳에 있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살갗에 닿았던 이국의 냄새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그래 갈 때가 되었다. 

 

이번엔 어디로 갈까. 출장 말고 여행이다. 이 날은 안되고 이 날은 괜찮겠다. 업의 스케줄표를 더듬던 손으로 내 스케줄을 쓰다듬었다. 내가 만든 스케줄에서 나는 오롯한 갑이다. 역시 돈 쓰는 사람이 갑. 가고 싶었던 여행지를 메모장에 적어보고 하나씩 랜선 여행을 했다. 여기도 좋고 저기도 좋다. 다 가고 싶지만 늘어지고 싶은 더운 남국이 조금 더 땡긴다. 

 

어느새 부산에 다 왔다. 더운 김을 내뿜던 커피는 잘잘하게 남아 차게 식어 있다. 여행 생각에 몸 달았던 열기도 조금 식고, 다시 현실. 옷을 여미고 밖을 나섰다. 서울보다 춥지 않은 공기에 뻣뻣했던 근육이 조금 풀린다. 남쪽은 가을을 아직 덜 거두어들였구나. 이렇게 아까운 계절 한 뼘 더 가져가 본다. 

 

드르륵. 폰이 울린다. 네 거의 다 도착해갑니다. 후다닥 택시 승강장으로 향하는 길. 계단을 내려가기 전 부산역 바깥으로 슬쩍 보이는 바다가 반갑다. 기분이 이러한 걸 보니 진짜, 여행을 가야겠습니다. 마음을 단디 먹었다. 손이 떨리던 아침과 달리, 마음이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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